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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Feb 17. 2017

물의 아이들, 모든 신의 아이들


영문학사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인 <두 도시 이야기 A Tale of Two Cities, Charles Dickens, 1859>는 도입부부터 시드니 칼튼의 숭고한 독백까지 멋진 문장이 가득하다. 책을 탈탈 털면 명문장이 소복하게 쌓일 것이다. 그러나 찰스 디킨스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든 여타 작품들의 매력이 그보다 덜하지 않다. 디킨스의 군상들은 강박적이고 드라마틱하다. 그의 인물들은 늘 돈에 전전긍긍하고 수다스럽기 그지없다. 과묵한 이조차도 머릿속에선 온갖 상념이 널을 뛴다. 일상성에 관한 집착적인 세부 묘사는 부조리한 현실 속 계급 충돌을 꼼꼼히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 비참한 아동들이 여타 작품에 비해 특히 인상 깊은 이유일 것이다.

#디킨스의 트라우마 https://brunch.co.kr/@flatb201/53




찰스 디킨스가 바라본 19세기의 아동 노동

빅토리아 시대는 영광의 후광만큼 부조리의 어둠도 짙었다. 찰스 디킨스는 작품마다 아동 노동이 아동 범죄로 진화되는 사회적 악순환을 생생히 조망했다. 그 유명한 ‘민간인 대피 작전’ 시 자국 어린이 전체를 대피시킬 만큼 아동 보호에 힘쓴 영국이지만 2차 세계대전 때나 가서의 일이다. 빅토리아 시대 하층계급 아동들은 소모품보다 못했다.

남자아이들은 보통 굴뚝 청소를 했는데 추위를 피하거나 가스 중독으로 빈번히 질식사했다. 안데르센의 굴뚝 청소부 소년이 제일 먼저 아침 햇살을 맞아 환호하던 순간은 보전받은 남은 날 중 찰나에 불과했다.

여자아이들은 더 비참했는데 보통은 하녀가 되거나 재봉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바느질이 중노동일까 싶겠지만 저임금에 밤새워 반복되는 방대한 노동이었다. 이마저도 얻지 못한 소녀들은 거리에서 성냥을 팔다 유황의 발화로 화재 피해를 입는 일이 빈번했다.


불결하고 낙후한 환경 속에서 전쟁과 상관없이도 얼어 죽고, 굶어 죽고, 타 죽고, 맞아 죽고.. 이 아이들이 여차저차 무사히 나이를 먹는다 해도 소매치기나 창녀 외에 큰 활로가 있을 리 없었다.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 Charles Dickens, 1838>의 낸시가 유독 애달픈 것은 계층적 한계를 불사하고 선택한 인간적 자존감이 비극적 개인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엘리너 파전의 어린 재봉사 https://brunch.co.kr/@flatb201/96

#오스카 와일드의 비참한 사람들 https://brunch.co.kr/@flatb201/85




찰스와 찰스, 진화론의 아이돌들

찰스 킹즐리의 <물의 아이들>은 기억나지 않는 전집 중 한 권이었다. 몹시 예쁜 일러스트가 가득해 요정 판타지를 기대하면 집어 들었던 그 책은 좀 따분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소년 톰은 프로이슬러의 사랑스러운 물 요정처럼 처음부터 행복한 물의 아이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착취당하던 열 살짜리 굴뚝 청소부는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다 물에 빠진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물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고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잊은 채 곳곳을 여행하게 된다.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며 여러 경험으로 성숙해진 톰은 훌륭한 신사로서의 새 삶을 얻는다.


알려졌다시피 <물의 아이들>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문학적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킹즐리는 생물학적 진화에 관한 상상에 사회적 진화를 중첩시켰다. 톰의 여정은 낙후한 위생 환경과 무지에 대해 교육을 통한 사회 계도를 목표로 한다. 여행 중 만난 원숭이 종족이 사실은 나태한 부족의 변형이라던가, 하급 계층의 톰이 교육에 의해 신사로 거듭나는 것은 모두 빅토리아 시대 계몽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또 물에 빠져 새로운 존재로 구원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세례와 부활을 연상하게 한다.

<물의 아이들>은 찰스 디킨스의 작품과 더불어 당시 아동 노동의 심각성을 고발했고 아동의 노동 동원을 법적으로 규제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작품이 가진 기괴하면서도 시적인 상상력은 많은 일러스트레이터에게도 영감 주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워윅 고블 Warwick Goble의 일러스트다. 탄탄한 데생 아래 윤기 도는 컬러링은 고전적 신비함을 한껏 고조시킨다. 석판화 작업을 즐겨 구사한 워윅은 골든 에이지 시대의 슈퍼 스타 아서 래컴과 에드워드 둘락으로부터 깊이 영감 받았다. <물의 아이들>에서도 여백이 활용된 우키요에 풍의 석판화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워윅 고블 Warwick Goble의 일러스트


또 다른 유명작인 에드워드 린리 샘본 Edward Linley Sambourn의 일러스트는 좀 더 시니컬하고 캐리커쳐 느낌이 강하다. 시대 에너지가 반영된 개성적인 화풍은 괴기스럽게도 느껴진다. 때문에 종종 ‘킹즐리의 서사보다도 심술궂은 이미지’란 평가를 들었다고 한다.

에드워드 린리 샘본 Edward Linley Sambourn의 일러스트  (https://www.fulltable.com/vts/aoi/s/sambourne/wb/a.htm)




21세기에도 여전히 어딘가의 아동들은 비참하다. 후원 모집 광고들의 감정적인 호소는 물릴 정도다. 하다못해 점심때 먹은 샐러드의 새우조차 어느 어린이가 깠을 것이다. 물질적 차이를 떠나 관습적 제약, 인권 탈취로 고립된 아이들도 있다. 여자아이들은 국적 불문하고 성차별과 위협을 체험한다. 정서적 기형아 역시 필연적으로 늘고 있다.

구원받았든 도망쳤든 고난을 벗어난 아이들은 그 기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두 도시 이야기>에서 영감 받았다는 고담 시민들의 숭고한 선택보다 ‘인간은 고난을 겪을수록 이상해지기 마련’이라던 조커의 대사가 더 와닿는 시대니까.


자의적이지 못한 탄생, 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어딘가의 신으로부터 왔다.

자신의 아이만큼 타인의 아이 역시 신의 부산물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 이들이 인격적 진화를 거친 사회적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부모라는 계급이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부여받은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시키는 것, 그런 기회를 공유하고 확장시키려 애쓰는 것.

너무나 많은 비참함과 기괴해 보이는 가족주의를 마주할 때면 매번 이런 구태의연한 질문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출처/ 

물의 아이들, 찰스 킹즐리 (The Water Babies, Charles Kingsley, 1863)

네버랜드 클래식 30, 물의 아이들 (시공주니어, 2006, 번역 김영선, 일러스트 워윅 고블 Warwick Go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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