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천재성은 인생에 투자했고, 예술에는 재능만을 발휘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자기애는 그가 남긴 어록마다 절절하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유미주의를 선도한 당대의 트렌드셰터, ‘명성이 아니면 악명이라도 얻겠다’ 던 자기 현시적 기질, 거구로 인해 더욱 도드라진 드라마 퀸 같은 일련의 에피소드들. 진위가 의심되는 것도 있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수많은 명언을 뿌리며 주목받는 것을 즐겼다. 성 정체성 자각 후엔 동성애 관계의 미소년들에게서 받은 영감을 탐미적으로 풀어냈다. 내내 화려할 것 같던 안팎의 성취는 ‘퀸즈베리 송사’를 겪으며 일시에 쇠락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The Portrait of Dorian Gray, 1891>, <윈드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 1892>, <살로메 Salomé, 1894> 등 그의 대표작들은 현재도 반복되어 사랑받고 있다.
<살로메>를 읽다 보면 비어즐리 Aubrey Beardsley가 이 작품에 사로잡힌 것이 필연이란 확신이 든다.
비어즐리의 나른하고 예민한 선들과 오스카 와일드의 관능적인 문장은 우위를 가릴 수 없다.
오스카 와일드의 빛나는 재능을 먼저 알아봐 준 것은 동화였다.
두 편의 동화집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 The Happy Prince and Other Stories, 1888>, <석류의 집 A House of Pomegranates, 1891>에는 날카로운 시대 비판과 평생을 고민한 종교적 갈등이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금성출판사의 <칼라 텔레비젼 세계교육동화> 전집은 평이한 축약본이지만 일러스트만큼은 원전의 문장만큼 아름답다. 부감으로 도시를 내려다보는 첫 장면을 시작으로 시종일관 시원하고 과감한 구도가 펼쳐진다. 제비의 경쾌한 활공은 숭고한 승천으로 마무리되며 종교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온갖 보석으로 치장되어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조각상 ‘행복한 왕자’.
조각상 아래 하룻밤 쉬어가려던 작은 제비에게 빗방울처럼 왕자의 눈물이 떨어진다. 이유를 묻는 제비에게 왕자는 자신은 살아생전 궁궐 안에서 행복하기만 했다고 한다. 조각상이 되어 높은 곳에 오르고서야 도시 곳곳의 비참함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비의 도움을 받아 왕자는 자신의 보석을 비참한 이들에게 나눠준다. 겨울을 피해 남쪽으로 떠나야 하는 제비는 왕자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못한다. 하루만, 딱 하루만 더..라고 망설이며 제비는 왕자의 곁에 머무른다.
눈에 박힌 보석을 빼내어 장님이 된 왕자가 안쓰러운 제비는 자신이 여행한 이국의 풍광을 이야기해주며 위로한다.
..“귀여운 작은 제비야, 모두 놀라운 이야기들이구나.
하지만 그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란다. 비참함만큼 큰 신비는 없거든.
작은 제비야, 내 도시 위를 날아다니며 네가 본 것을 내게 말해다오.”
보석을 다 빼낸 왕자는 몸통의 금박까지 벗겨내어 나눠준다. 이윽고 싸늘한 계절이 되었지만 제비는 왕자를 떠날 수 없다. 자발적 선의의 충만함을 알게 해 준 왕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 마침내 그는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가까스로 한 번 더 왕자의 어깨 위로 날아오를 힘 밖에 없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사랑하는 왕자님!” 그는 겨우 말했습니다.
“네가 마침내 이집트로 가게 되어 기쁘구나, 작은 제비야.
너는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자, 내 입술에 입 맞춰다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저는 이집트로 가는 게 아니에요. 저는 죽음의 집으로 가요. 죽음은 잠의 형제라지요?”
왕자에게 힘겹게 입 맞춘 제비는 그의 발치에 떨어져 죽는다. 그 순간 납으로 만들어진 왕자의 심장은 슬픔에 겨워 둘로 쪼개져 버린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추레해진 조각상을 녹여버린다. 그런데 왕자의 심장만은 전혀 녹지 않았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죽은 새와 왕자의 심장은 도시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던 천사에게 발견된다.
영원한 행복의 나라에서 둘은 다시 함께한다.
선의 혹은 애정의 시작은 바라보기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을 가진 왕자와 하루 분량의 삶 외에는 관심 없던 제비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공조하게 된다.
멀리서 내려다볼 때 뿌옇게 아름답던 삶들은 가까이 들여다보자 그 비극성을 드러낸다. 밤새워 무도회복을 지어야 하는 여왕의 어린 시녀, 당대의 가장 흔한 아동노동이었던 성냥팔이 소녀, 아픈 아이에게 오염된 강가의 물 밖에 줄 수 없는 빈민가의 어머니.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허세와 위선을 갖은 보석으로 치장해 ‘행복한 왕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왕자에게 진짜 행복을 느끼게 한 것은 보잘것없는 납으로 만들어진 심장이다.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던 제비는 왕자를 바라보며 한 차원 숭고해진 조력자로 거듭난다.
물질적 희생에 추레해져도 기쁨이 넘치던 왕자는 제비의 희생만큼은 견딜 수 없이 아파한다. 심장이 쪼개져 버릴 정도의 슬픔은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대부분의 현실은 우화의 교훈보다 훨씬 뻔한 비참함으로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애틋한 연대가 해피엔딩이길 바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소망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출처 및 인용/
행복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 (Happy Prince and Other Tales - Happy Prince, Oscar Wilde, 1888)
オールカラー版 世界の童話 48 イギリスのお話, 幸せな王子 (小学館, 1967, 번역 나마치 사부로 奈街三郎, 일러스트 츠카사 오사무 司修)
칼라 텔레비젼 세계교육동화 14 영국 동화, 행복한 왕자 (금성출판사, 1978, 일러스트 츠카사 오사무 司修)
오스카 와일드, 아홉 가지 이야기 (열린책들, 2015, 번역 최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