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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Oct 14. 2016

어린 재봉사, 그대와 춤을


로맨틱 서사의 세계는 절대성보다는 다양성에 기준을 둬야 하지 않을까?

비슷하면서도 다른, 익숙한데도 매번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수많은 클리셰들은 오늘도 작은 탄식을 부른다.

엘리너 파전의 <어린 재봉사>는 뒷모습으로 등장해 이내 사라지던 조연들이 주인공의 춤을 춘다. 사랑이 무언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 이 동화를 되풀이해 읽던 마음은 엄마의 진주 목걸이를 걸어보던 순간과 같다.

형식면에 있어 <어린 재봉사>는 동화의 전형성을 취하고 있다. 동화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세 가지’란 클리셰는 반복된 이미지로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크림, 캐러멜, 우유 젤리 아가씨와 금빛, 달빛, 무지갯빛 드레스는 주인공 로타의 매력을 입체화 한다.

뜻밖의 반전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은 전형성을 통해 전형성을 비트는 파전의 특기가 잘 녹아 있다.

(파전의 작품 중 묘사가 서사를 이끄는 단편이기에 비교적 자세히 작성하겠다.)





솜씨 좋고 명랑한 어린 재봉사 ‘로타’는 요즘 어느 때보다도 바쁘다. 이웃 나라의 젊은 왕이 신부를 고르는 무도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옷들의 명예는 매번 큰 재봉사가 가로채지만 로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로타가 사는 나라를 다스리는 조지나 여왕의 가장 큰 걱정은 미혼의 조카 리처드 왕이다. 여왕은 매해 크리스마스와 생일 때마다 결혼을 재촉하지만 젊은 왕의 답장은 한결같이 느긋하다.


‘조지나 고모님

귀여운 필통, 정말 고맙습니다.

고모님을 사랑하는 조카, 리처드

덧말: 아직 시간은 넉넉해요.’


남에게 명령하는데 익숙한 여왕은 크리스마스도 생일도 아닌 날 다시 단호한 편지를 보낸다. 젊은 왕은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세 번의 무도회를 통해 신부를 고른 후 금요일에 결혼해 토요일에 돌아오겠다고 답장한다. 멋진 코스튬이 있으니 꼭 가장무도회로 열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사랑하는 조지나 고모님께

고모님 뜻대로 하세요.

고모님을 사랑하는 조카, 리처드

덧말: 나이는 열아홉 살 반, 허리둘레는 19인치 반인 사람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까다로워 보이는 조건에도 여왕은 용케 허리가 19인치 반인 세 명의 아가씨-크림 공작 아가씨, 캐러멜 백작 아가씨, 우유 젤리 아가씨를 찾아낸다. 뛰어난 솜씨를 지닌 로타는 세 아가씨 모두에게 주문받아 매일 밤을 지새운다.



첫 번째 무도회 날, 크림 공작 아가씨를 위한 ‘햇빛 드레스’가 완성된다.

마침 허리 치수가 19인치 반인 로타는 옷맵시를 보여주기 위한 착장 모델로 불려 간다. 눈부신 금빛 드레스와 금빛 구두, 금빛 티아라 차림의 로타는 젊은 시종의 안내를 받는다.


“어때요? 아름답죠? 임금님도 이 옷을 입은 크림 아가씨를 보면 함께 춤을 추지 않고는 못 배기실 거예요.”

“정말 그렇군요.” 시종은 우아하게 절을 하고 나서 말했어요.

“아가씨, 저와 춤을 추시겠습니까?”

로타는 깔깔 웃으며 대꾸했어요. “어머나, 폐하! 저야말로 영광이옵니다.”


로타와 춤추던 시종이 그녀의 머리카락이 햇살보다 눈부신 금빛이라고 말하려던 순간, 로타는 완성된 옷을 전달하기 위해 불려 간다.



다음날 캐러멜 아가씨를 위한 ‘달빛 드레스’를 입고 궁에 도착한 로타에게 어제의 시종이 알려준다. 젊은 왕이 저녁 내내 금빛 공작 아가씨와 춤을 추었다고.

달빛 드레스를 입고 한 밤의 달처럼 은은히 빛나는 아름다운 로타에게 시종은 다시 춤을 청한다. 춤을 추며 친해진 로타와 시종은 잡담을 나눈다. 젊은 왕의 결혼식이 끝나면 이웃나라로 돌아간다는 시종의 말에 로타는 어쩐지 쓸쓸해진다. 시종이 로타의 손이 달빛처럼 하얗다고 말하려는 순간, 로타는 완성된 옷을 전달하기 위해 불려 간다. 재봉실에는 여전히 고된 밤샘이 기다린다. 로타는 졸린 눈꺼풀보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마지막 드레스를 마무리한다.



세 번째 무도회의 밤, 로타는 우유 젤리 아가씨를 위한 ‘무지갯빛 드레스’를 입고 궁에 도착한다. 전날의 무도회 저녁 내내 젊은 왕은 달빛 드레스를 입은 백작 아가씨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시종은 로타에게 또다시 춤을 청하지만 며칠간의 고된 밤샘과 우울한 마음에 로타는 조금의 기력도 없다. 지친 로타를 감싸 안은 시종은 키스한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기도 전에 로타는 완성된 옷을 전달하기 위해 불려 간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로타에게 큰 재봉사는 웨딩드레스 주문이 들어왔음을 알린다. 세 아가씨 중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가 누구인지 아직 모른다는 것과 젊은 왕이 입고 나온 가장무도회 코스튬이 실망스럽게도 ‘시종의 옷’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밤새워 완성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로타는 꿈을 꾼다. 변함없이 그녀를 안내하는 시종이 데려간 곳은 대기실이 아닌 교회이다. 결혼식은 이분 만에 끝나고 금반지를 낀 로타는 시종과 함께 마차를 탄다. 마차 안에서 로타는 아주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든다. 시종의 어깨에 기대어.



잠에서 깬 로타가 도착한 곳은 이웃나라의 궁궐이다. 높은 계단의 끝에 이르자 누군가 싱글거리며 로타와 시종을 반겨준다. 그는 이웃 나라의 젊은 왕 리처드이다.

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니듯 로타 곁의 시종은 진짜 시종이었다.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던 젊은 왕이 무도회에 자신의 시종을 대신 보낸 것이다. 로타를 사랑하게 된 시종은 그녀를 자신의 신부로 선택한다.

조지나 여왕의 단호한 편지에 젊은 왕은 이번에도 다정한 답장을 보낸다.

완전 삐진 고모
또 한 고비 넘긴 조카의 답신




근대화 전 재봉 노동은 동, 서양 할 것 없이 여성들의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삯바느질은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의 노동이었지만 이마저도 할 수 없으면 눈발 속에 성냥이나 팔아야 했다. 불완전한 기술로 종종 자체 발화하던 유황으로 인해 성냥팔이는 무척 위험하고 비참한 직업군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여성보다도 더 약한 아동들이 성냥팔이의 구성원이었다. 성냥팔이보다는 나았는지는 몰라도 드레스 제작은 강도 높은 업무량에 감정 노동까지 동반했을 것이다.

로타의 행복에 요정이나 마법의 도움은 없다. 그녀가 획득한 행복은 자신의 재능이 만들어낸 우연의 기회다.

유리천장에 불구하고도 여전히 분투하는 현재의 여성들처럼.


젊은 왕 리처드와 조지나 여왕이 주고받는 편지에는 엘리너 파전 특유의 유쾌함이 넘친다. 결혼에 관한 세대 간의 신경전은 늘 있어왔지만 세기가 넘어서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오히려 부모를 넘어 타인, 심지어 국가까지 오지랖 넘치게 개입하려 든다. 때문에 필통 이야기를 덧붙인 한껏 예의 바른 인사치레는 살짝 얹은 깐족거림마저 통쾌하다.


앞서 말했듯 <어린 재봉사>는 동화의 세 가지 조건을 드레스로 치환해 이미지화하고 있다. 이미지와 더불어 고조되는 감정은 무지개와 눈물이 중첩되는 대목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무지갯빛 드레스에 파묻힌 로타는 너무 피곤해서 고개를 저었어요.

웃으려고 했지만, 굵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죠. 시종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무지개 속에 눈물이 어리는 것은 어쩐지 자연스러운 것 같았지요.’


젊은 시종은 함께 춤출 때의 천진함만큼 지쳐 쓸쓸해진 마음을 이해한다. 고단한 하루에 입맞춤을 보내며 위로하는 어떤 이. 온전한 이해력을 가진 다정한 이를 만나는 것은 신분상승을 선사해줄 왕자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적적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절대 없는 것도 아닐 이런 순간들에 대한 감정 이입이 오늘도 로맨스를 골라 들게 한다.

벽지 속 무수한 꽃처럼 오도카니 가려져 있던 그녀는 이제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온전한 주인공으로. 미슬토가 없이도 곧 키스할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출처 및 인용/ 

어린 재봉사, 엘리너 파전 (The Little Bookroom; The Little Dressmaker, Eleanor Farjeon, 1955, 일러스트 에드워드 아디존 Edward Ardizzone)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 전집 12/50 영국 편, 보리와 임금님, 어린 재봉사 (계몽사, 1973, 번역 신지식, 일러스트 송영방)

작은 책방, 작은 재봉사 (길벗, 2005, 일러스트 에드워드 아디존 Edward Ardizzone)


화려한 향연, 폴 베를렌 (Fetes Galantes, Paul Verlaine, 1869, 일러스트 조르쥬 바비에 George Barbier,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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