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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Oct 06. 2016

마법사의 화장실, 망상과 환상 사이


특정 시대를 선호하는 작가들의 취향 중 권교정 작가의 중세 사랑은 익숙하다.

그저 크레스핀의 금발 미녀를 그리고 싶었다는 <기부르의 입맞춤>부터 <헬무트>, <청년 데트의 모험>으로 이어지는 중세 연작들은 그녀의 북마크를 살짝 엿본 느낌이다. <왕과 처녀>에선 후일담 형식을 통해 모험가들의 빛나는 연대기 이후 노년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헬무트>는 종교의 권위가 어느 때보다 무시무시한 중세 독일을 배경으로 신과 이단,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모험가들의 노년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 <왕과 처녀>


알려진 대로 중세의 갖가지 분란과 악행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권력을 틀어쥔 종교는 편리하게도 신의 분노를 내세워 공고해졌다. 페스트, 대기근 같은 재해에 대한 핑계는 물론이고 정치적으로 반하는 이들과 주로 여성과 평민일 사회적 약자가 ‘이단’이란 명목 하에 대대적이고 공개적으로 숙청된다.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의 기준은 연금술만큼이나 원초적이고 비과학적인 것들이었다. 이 시기 종교의 가장 첨예한 부분은 자비와 이타심이 아닌 야만성과 고문이었다. 현재도 많이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인간의 성경에 반하는 모든 것은 부정되었다.


<헬무트>는 요정과 마법사가 공존한다는 가정하에 무소불위의 야만성에 대항하는 이단자들의 연대를 그린다. 그들은 드높은 종교의 권위 앞에 가장 큰 죄인일 무신론자, 성별 자체만으로 사회적 존재감을 부정당하는 여성, 정체불명의 초월적 능력을 가진 이들, 시대를 앞서간 개혁론자와 과학자들이다. 혼란의 시대답게 수 없이 분열된 연방은 정치적 혼란이 가중된다.

<헬무트>의 ‘에리히 폰 리텐갈트 후작’은 이런 정치 상황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도피생활을 한 바 있다. 가문이 풍비박산된 경험으로 인해 에리히는 무의미한 권력 다툼을 종식시켜 정지척 안정을 도모하려 애쓴다. 그가 의지하는 ‘굴라스’는 소위 이단에 해당할 선대로부터의 마법사이다. 과거 어떤 사건으로 ‘마음을 묶은 자’가 된 굴라스는 일상적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성실히 에리히를 보좌한다.

단편 <마법사의 화장실>은 <헬무트>의 외전으로 에리히와 굴라스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편집 재발간으로 줄거리는 삭제합니다. 소장의 기쁨을 누리십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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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를 사로잡은 굴라스의 마법은 과학에 근거한 사소한 조치였다. 그러나 철저히 중세 꼬꼬마인 열두 살의 에리히에겐 기적과 같은 마법으로 충분했다. 앞서 말했듯 이후 작위와 성을 빼앗긴 에리히는 굴라스와 9년간 도피생활을 한다. 작위를 되찾은 후에는 굴라스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마법사의 화장실>은 아마도 굴라스에 관한 에리히의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추억일 것이다.

에리히 (복수를 다짐하는 차기 영주, 8세)


‘~다움’이란 말은 집요하고 광범위한 제약을 발휘한다. 크건 작건 누구에게나 외면하고픈 어둠이 있건만 에리히 역시 차기 영주이자 용맹한 사내아이로서의 관습적 특질을 강요받는다. 굴라스는 에리히의 우아하지 못한 사정을 비웃기보다 진지하게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가 초연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마음을 묶어 일상적 감정이 거세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그저 에리히의 고민에 무관심했을 테니까.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실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모호함은 상상으로 몸을 불려 공포로 거듭나곤 한다.

이단이란 허울 아래 사회적으로 배척당하던 마법사는 공포의 이런 속성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에리히의 굴라스 Before-After. 리텐갈트에 입성한 지 얼마 안되었을 무렵 굴라스는 배타적 종교로 인해 실체 없는 무수한 루머에 시달린다.

굴라스는 공포의 망상에 아름다움의 상상으로 대응한다. 화장실 어둠 따위는 하찮은 가차 없는 인생의 공포 속에서 굴라스의 합리적이고 품위 있는 상상력은 에리히에게 커다란 지지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아하지 않은 문제를 가장 우아하게 해결해 준, 아름답기까지 한 마법사를 어떻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름다움은 근심과 공포를 무장해제시킨다. 더없이 우아하게.





@출처/ 

마법사의 화장실, 권교정

피리 부는 사나이, 마법사의 화장실 (시공사, 2003)

헬무트 (대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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