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일상이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해진 배경처럼 느껴져서일까?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인간의 감정은 하찮게 오르락내리락한다. 모든 것을 불룩하게 흔들어 대는 바람이 부는 날이면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드라마틱 한 이 대기를 타고 어떤 사연이 날아올 것만 같아서.
<메리 포핀스>는 제목을 듣는 순간 이미 동풍을 타고 날아온 주인공이 떠오른다. 앵무새 머리장식의 우산을 끼고 한껏 멋을 부린, 누구에게나 단호할 정도로 당당한 그녀. 작가 트래버스의 어린 시절 하녀 중 한 명은 재미있으면서도 단호했다. 한껏 멋을 부리고 외출한 날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해 주다가도 ‘애들은 이해 못 해’라며 딱 끊어 꼬마들을 애태웠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이 메리 포핀스의 외형적 특징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뱅크스 씨처럼 은행가였던 트래버스의 아버지는 다정했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가정을 붕괴시킨 상처의 제공자기도 했다. 일상과 계급에 갇혀 시드는 뱅크스 씨는 트래버스 자신의 아버지를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전형적이긴 해도 영화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 Saving Mr. Banks, 2013>는 트래버스의 이런 양가감정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메리 포핀스>의 세계관이 트래버스의 유년 시절 상처와 소망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라는.
트래버스는 <메리 포핀스>가 요란법석 소동극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가 생각한 메리 포핀스는 필연적으로 마주할 세상의 어둠으로부터 아이들을 준비시키는 진지한 여성이었다. 때문에 빈부격차, 남녀차별, 여권 신장, 계급 충돌, 동물보호 같은 필수 사회의식이 동화적 결말로 안이하게 봉합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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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 “비는 생명을 만들죠.”
랄프: “햇빛도 그래요.”
영화 속에서 트래버스를 수행한 운전기사 랄프는 늘 날씨에 신경을 쓴다. 그의 딸 제인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기에 맑은 날에만 집 밖으로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사와의 의견 충돌로 실의에 빠진 트래버스에게 랄프는 딸의 <메리 포핀스> 책을 건넨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자신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그에게 트래버스는 사인한 책과 메모 하나를 건넨다.
랄프: “알버트 아인슈타인, 반 고흐, 루스벨트, 프리다 칼로.. 이게 뭔가요?”
트래버스: “이 사람들의 삶에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제인은 다른 이들이 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어요.”
이 에피소드가 실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메모 속 인물들은 트래버스가 여러 날을 두고 고심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사와 신경전을 하는 와중에도 마음 써준 랄프의 사연을 듣고 메모를 준비해 둔 것이다. 내내 냉소적이고 퉁명스럽지만 필요한 순간 정성을 다한 지지를 보낼 줄 아는 트래버스의 모습 위로 메리 포핀스가 겹쳐진다.
디즈니 실사영화를 끝끝내 못마땅해 한 트래버스도 줄리 앤드류스의 호연만큼은 흡족해했다.
영화와 뮤지컬의 인기는 셔먼 형제의 아름다운 넘버에 힘입었다. ‘Chim Chim Cher-ee’ ‘Supercalifragilisticexpialidocious’ ‘Spoonful of Sugar’ ‘Let's Go Fly a Kite’ 등 뺄 것 없는 트랙들은 카메론 매킨토시와 매튜 본의 박진감 넘치는 무대로 거듭났다.
<메리 포핀스>의 원작을 처음 접한 것은 120권짜리 <계몽사 문고판>을 통해서였다. 하드커버의 이 아담한 4·6판 전집은 <범우사 문고판>과 더불어 많은 어린이들의 명작 입문서가 되어주었다. 계몽사 판본은 여덟 권에 이르는 시리즈 중 1편을 옮겼다. 표지는 원전을 모사해 국내 작가가 그렸지만 본문은 메리 셰퍼드의 일러스트가 그대로 실려있다.
이름에서 유추되듯 메리 셰퍼드는 <곰 푸우 Winnie-the-Pooh, Alan Alexander Milne, 1926>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어네스트 셰퍼드의 딸이다. 아버지만큼 유려하면서도 좀 더 낙관적인 느낌의 화풍을 구사한다.
특히 <메리 포핀스>는 영국 계급사회 군상에 대한 빼어난 스케치로 가득하다. 어떤 버전의 <메리 포핀스>이든 그녀가 그린 이미지에 빚지고 있다. 지치지 않는 완벽주의자 트래버스는 런던 곳곳으로 직접 셰퍼드를 데리고 다니며 자신이 적정한 모델로 생각해둔 풍경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림 속에서 즐기는 티 타임, 주체할 수 없는 웃음 가스, 나침반 세계여행 등 에피소드마다 환상적이지만 언제나 우선으로 추천하는 에피소드는 <춤추는 암소>와 <생강빵의 별>이다.
한 집 한 집 돌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암소가 벚나무 거리에 나타난다.
메리 포핀스에 의하면 위대한 부자인 그 소는 언제나 사려 깊은 태도로 귀부인처럼 행동한다. 평화롭지만 매일매일의 분주함으로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던 소는 ‘하늘의 별들이 민들레처럼 보이고, 달은 그 별들 사이에서 들국화처럼 보이던 날 밤’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음악 한 곡조 없이도 활발하고 아름다운 춤이지만 며칠 동안 멈출 수 없자 소는 한계에 다다른다. 소는 뿔에 꽂혀있던 ‘별’을 떼어내고서야 춤을 멈출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그녀는 뭔가 허전하고 불만스럽다. 멈추지 않는 춤은 고통스러웠지만 순도 높은 희열을 주었기 때문이다.
소를 둘러싼 일상은 변함없지만 그녀 자신은 달라졌다.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는 소는 온전한 자신을 깨우치게 해 준 별을 찾아다닌다.
제인과 마이클은 메리 포핀스의 기괴한 단골가게에 가게 된다.
딸들에게는 우악스럽지만 어린이들에겐 상냥한 코리 할머니는 남매에게 금빛 종이별로 장식된 생강빵을 준다. 종이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집요하게 보관 장소를 묻는다.
그날 밤, 살며시 두 아이의 침실로 들어온 메리 포핀스는 구두상자 속에 보관된 종이별을 꺼내 거리로 나선다. 미처 잠들지 않았던 두 아이는 창 밖을 내다보곤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다. 높은 사다리 위에서 코리 할머니가 밤하늘에 풀칠을 하면 메리 포핀스가 바구니 속 금빛 종이별을 꺼내 붙인다. 종이별은 이내 형형한 빛의 진짜 별로 변한다.
제인과 마이클은 생강빵 별을 간직해둔 구두상자를 확인한다.
<춤추는 암소>는 페미니즘 함의가 또렷한 에피소드이다.
귀부인 같이 우아한 모습이라도 암소의 분주함은 결국 가사노동에 한정되어 있다. 달까지 넘게 해 준 별을 ‘떼어내게 하는’ 이는 남성인 왕이다. 진실을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춤은 암소에게 ‘진짜 자신’으로서의 자각을 가져다준다.
<생강빵의 별>은 별들의 기원을 동화적 판타지로 설명하고 있다.
메리 포핀스와 코리 할머니는 왜 생강빵의 별을 모았을까? 어쩌면 그 별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소망이나 찰나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간절함이나 온전한 충만함만이 아름다운 별빛으로 치환되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어느 날, 우연히 떨어진 별 하나는 그 안에 담긴 간절함을 발산한다. 관습에 매몰된 타인까지 춤추게 만들며.
앞서 말했듯 <메리 포핀스>는 동심을 위해 쓴 안이한 판타지가 아니다.
불우함과 차별을 견뎌야 했을 계급사회 속 약자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할 수 있길 소망한 이야기이다. 누구나 바람처럼 자유로울 수 있길, 소망의 간절함이 완결되길 바란다.
비록 평범한 금빛 종이로 만들어진 소망이라 해도 가장 높은 곳에서 오래도록 빛나길 바란다.
트래버스는 이루어지지 않은 어제의 소망 또한 아름답게 빛나길 바랬던 것 아니었을까?
높이 높이 나는 연보다 훨씬 더 높고 자유로운 곳에서.
@출처 및 인용/
메리 포핀스, 파멜라 린든 트래버스 (Mary Poppins, Pamela Lyndon Travers, 1934-1988)
계몽사 문고 78/120, 메어리 포핀즈 (계몽사, 1979, 번역 이규직, 일러스트 최충훈, 메리 셰퍼드 Mary E. Shep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