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페에서 책 읽기 Sep 29. 2016

수많은 달님, 몽상가의 달


한숨처럼 피어났다 흩어지는 몽상은 대부분 쓸데없을 테지만 때로는 새로운 미로로 안내하는 첫 번째 실타래가 되기도 한다. 가성비의 시대에 가시화되지 않은 것들은 무용한 취급을 받는다. 효율성이란 명분을 훔쳐 복제되는 조악함과 몰개성은 당당하다. 불성실함과 무례함을 몽상으로 팔아먹는 싸구려들은 또 얼마나 많나. 각자의 뜬구름이 꼭 완결된 세계를 낼 필요는 없다. 몽상은 그 무용한 자유로움으로 가치를 획득하기에.


제임스 서버에게 문학적 성공을 가져다준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1939>은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대공황의 긴 여파 속에 주인공 월터 미티의 하루는 그저 그렇게 진부하다. 그의 끊임없는 공상은 외부의 무례함으로부터 그를 위로해주는 보호막이다. 몽상이 터져버린 후의 열패감이 초라함을 배가 시키더라도 찰나의 자유로 오늘을 견딘다.

신드롬을 일으킨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은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터무니없는 공상을 하는 사람’이란 뜻의 ‘월터 미티적 인간 Mittyesque’이라는 관용어구를 만들어 냈다. 언제나 개집 지붕 위에서 이런저런 공상을 하는 스누피는 ‘월터 미티 콤플렉스를 가진 외향적 비글’이란 설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풍자가 특기인 작가들이 그러듯 서버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유머는 비극적인 모습으로 인한 희극이다. 유쾌하게 전개되는 소동은 사실 우울한 정서로 가득하다. 소심하거나 예민한 그의 주인공들은 미세한 내부 균열을 강박으로 드러낸다. 비주얼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가 사뭇 다른 분위기로 느껴지는 것은 서버 특유의 우울한 유머가 거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임스 서버의 작품은 예상보다 훨씬 방대하다. 어린 시절 ‘빌헬름 텔’ 놀이를 하다 한쪽 눈을 실명한 서버는 일상이 된 몽상과 작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를 눈여겨본 E. B. 화이트의 추천으로 시사 풍자잡지 <뉴요커 The New Yoker>의 필진으로 발탁된다.

이 시기 <뉴요커>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미디어들이 공격적으로 등장하며 고급 출판물들의 전성기는 사그라든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다양성을 구비한 잡지들이다. 타임, 포츈, 하퍼스 바자, 보그 등 무수한 정통지 사이에서 <뉴요커>는 ‘뉴욕 중심의 세련된 미국 문화 담론’을 지향했다. 헤밍웨이부터 하루키에 이르기까지 필진의 구색도 문학적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다.

외관상 이 풍자 잡지의 가장 큰 특징은 일러스트로 그려지는 표지이다. 사진의 위력 앞에 <뉴요커>는 필치가 살아있는 일러스트를 브랜드 시그니처로 내세웠다. 현재도 동일한 레터링의 제호 아래 일러스트로 표지가 채워진다. 함축적이고 유쾌한 일러스트를 구사한 서버는 <Is Sex Necessary?>를 비롯해 수많은 칼럼과 삽화로 <뉴요커>의 황금기를 함께 했다.

제임스 서버가 그린 <The New Yoker> 커버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서버는 <White Deer, 1945>,  <The 13 Clocks, 1950>, <The Wonderful O, 1957> 등 동화도 여러 편 발표했다. 그중 사랑스러운 소품 <아주 아주 많은 달>은 ‘우주선 시리즈’로 유명한 동화 작가 루이스 슬로보드킨의 일러스트가 유명하다. 그러나 슬로보드킨의 수상작보다는 중앙문화사 전집의 일러스트를 추천하고 싶다.

<수많은 달님>이란 제목으로 수록된 이 전집의 일러스트는 미니멀하고 그로데스크 하다. 동화용 일러스트임에도 섹시한 나른함이 더도 덜도 없이 우노 아키라의 것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우노 아키라는 현재까지도 장르를 넘나들며 걸출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시그니처는 196,70년대 분위기가 물씬한 일러스트이다. 한결같은 나른함은 바라볼수록 오히려 건조한 느낌이 든다.

우노 아키라의 이런 무심한 기운은 유머의 외피 뒤에 숨은 서버의 우울함과 퍽 잘 어울린다.

중앙문화사 수록분의 원전 <たくさんのお月さま, 1968>  일러스트 우노 아키라





어느 날 몸져누운 사랑스러운 레노아 공주. 왕은 공주에게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한다.


“달님이 필요해요. 달님만 따다 주시면 병이 나을 것 같아요.”


공주의 소원에 왕은 시종장을 불러 달을 따오라 명한다.

당혹스러운 얼굴의 시종장은 긴 두루마리를 펼치며 자신이 얼마나 격무에 시달리는지 토로한다.

실적 중 푸른 삽살개는 기억에 없다는 왕에게 시종장은 왕이 기억 못 할 뿐 분명히 있다고 우긴다.

왕의 닦달이 이어지자 시종장은 거대한 구리로 된 달은 절대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한다.


화가 난 왕은 음울한 얼굴의 마법사를 불러들여 같은 명을 내린다.

마법사 역시 긴 두루마리를 펼쳐 자신이 왕을 위해 행한 실적을 읊기 시작한다.

실적 중 마법 망토가 가진 불편함을 지적하는 왕에게 마법사는 절대 불편할 수 없는 물건이라 우긴다.

역시 왕의 닦달이 이어지자 마법사는 거대한 녹색의 치즈로 이루어진 달은 절대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한다.


화가 더해진 왕은 대머리 수학자를 불러 같은 명을 내린다.


나를 위해 했던 일들을 미리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공주를 위해 어떻게 하면 달을 손에 넣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주기 바란다.


왕이 선수 쳐 말했음에도 수학자는 긴 두루마리를 꺼낸다.

수학자가 읊는 실적 중 왕이 의문을 제기하자 수학자는 가정일 경우의 예측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럼에도 왕의 닦달이 이어지자 수학자는 납작한 금화 같은 거대한 달은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한다.


“한 놈도 쓸모없는 놈들뿐이야!

누구 하나 공주의 소원을 이루어 주지 못하는구나. 저마다 제멋대로의 말만 지껄여 대고 말이야.

물을 때마다 달은 크고 멀어지기만 하는구나.”


왕의 한탄에 어릿광대는 신하들이 묘사한 달과 공주가 생각하는 달에 관해 묻는다.

레노아 공주는 어릿광대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달을 말해준다.


.. “내 엄지 손가락의 손톱보다 약간 작을 정도겠지요. 왜냐하면 엄지 손가락을 들고 재어보니 꼭 손톱에 가려질 정도였거든요..”

.. “그럼 도대체 달은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요?”

“어머나, 뻔하잖아요. 금이지 뭐, 바보군요.”


어릿광대는 금으로 공주의 엄지손톱보다 작은 달 모양 목걸이를 만든다.

달 목걸이를 받은 공주는 기뻐하지만 왕은 그럴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진짜 달이 떠오를 테니까.

여전히 구태의연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신하들 사이에서 어릿광대는 ‘가지고 싶은 달’을 정의한 것이 공주 자신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어릿광대는 다시 공주를 찾아가 사뭇 풀 죽은 소리로 묻는다.


..공주님, 공주님의 목에 걸린 달님이 있는데 어째서 또 하늘 저편에도 달님이 빛나고 있는 것일까요?”

공주님은 어릿광대를 흘깃 보고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보 같으니. 이빨도 하나 빠지면 또 새것이 나지 않아요, 안 그래요?

궁정 정원사가 꽃을 자르면 또 새 꽃이 돋아나지 않아요? 달님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수많은 달님 중 하나를 가지게 된 레노아 공주는 행복하게 잠든다.

공주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오던 어릿광대는 창 밖을 바라본다.

살짝 눈짓하는 것 같은 달이 높이 떠올라 있다.





어린 시절 그저 귀여운 이야기로 생각한 이 소동극은 성인이 되어 읽어보니 사뭇 감흥이 달랐다.

이를테면 ‘회사원의 달’이다. 자기만족에 겨운 미션을 내는 클라이언트, 난감한 미션을 우격다짐으로 강요하는 리더, 실적 부풀리기나 자기 방어에 급급한 팀원들. 조직 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종종 마주치는 풍경이다. 이들의 자기 방어가 거듭될수록 ‘커져가고 멀어지는 달’처럼 미션은 표류한다.

아이디어에 적극적인 어릿광대-창작자들은 각자의 필요 앞에 오히려 피곤한 존재로 치부된다.


“모두들 영리한 분들뿐이니까 아마 저마다 바른말을 하였겠지요. 달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각기 생각한 대로의 크기이고, 그렇게 멀리 있는 게 틀림없나 봅니다.”


창작자들은 가장 사랑스러운 달을 끝없이 모색한다. 그런 창작자들이 시종장과 마법사와 수학자의 요란한 법석에 평가받고 재단되는 것은 서버가 묘사해 온 부조리함과 닮았다. 각자의 포지션과 평가 기준이 다름에도 각자의 업무 롤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법은 종종 쉽게 무시된다.

타인의 달을 부정하지 않고도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 아니, 결과와 상관없이 언제나 우선되어야 하는 기준이다. 심지어 창작자-진짜 몽상가는 자신이 몽상가라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종종 이름을 빼앗긴다. 그러나 이름을 올리지 못했어도 진짜 몽상가들의 수줍고 내밀한 재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재능이 일궈낸 공을 가로챌 순 있어도 재능 자체는 온전히 창작자의 것이다. 그 탐험이 달처럼 모습을 달리하며 한결같이 빛날 것이란 사실은 자조적이지만 작은 위로가 되어주지 않을까?





@출처 및 인용/ 

수많은 달님, 제임스 서버 (Many Moons (Later condensed as The Princess Who Wanted The Moon), James Grover Thurber, 1943)

新しい世界の童話シリーズ 9 , たくさんのお月さま (学習研究社, 1968, 번역 이마에 요시토모 今江祥智, 일러스트 우노 아키라 宇野亜喜良)

중앙문화사 소년소녀 세계수상문학전집 30권, 수많은 달님 (중앙문화사, 1979, 번역 윤숙영, 일러스트 우노 아키라 宇野亜喜良)

제임스 서버 (현대문학, 2015, 번역 오세원)



작가의 이전글 마니 摩尼, 천년 전 달빛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