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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Sep 28. 2016

마니 摩尼, 천년 전 달빛도


계절의 변화는 ‘어느새 갑자기’ 환기된다. 특히 가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높아진 하늘에 휘황한 달이 아닐까? 담요처럼 내려앉은 노란 은행잎 위로 덩그런 달. 이 익숙한 풍경을 천년 전 어떤 왕국에서도 아니 그 이전 고대와 공룡들이 바라보았을 것을 떠올리면 새삼 경외를 품게 된다.

(진화와 개량을 거친 현재의 은행나무는 초식공룡들의 먹이로 소비되던 종과는 차이가 있다. 은행나무의 기원이 되는 종은 공룡들의 전성기인 쥐라기에 함께 번성했다고 한다.)


드라마틱한 고려가요 중 하나인 ‘처용가’ 역시 무심히 휘황한 달빛 아래 흘러간다.

유시진 작가의 중편 <마니 摩尼>는 달빛 아래 애증마저 날려버린 채 홀홀한 처용의 이미지를 끌어와 영겁의 고독을 탐색한다. 평이한 판타지 학원물의 외피로 시작해 촘촘한 교차편집을 통한 존재론적 고찰로 마무리된다.

처용가를 모티브로 한 <마니>


권교정, 천계영, 박희정, 심혜진, 한혜연, 지혜안, 김은희 등은 대한민국 순정만화의 짧은 부흥을 한층 진보시킨 주축이다. 서사의 다양화를 바탕으로 밀도 높은 개인의식과 장르적 즐거움을 한층 세련되게 풀어낸다.

그중 유시진은 존재론적 고민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색해온 작가이다.

사회와 불화하는 개인을 섬세히 들여다본 <지난 봄 이야기>, <아웃사이더>, 개인적 세계관의 발견과 성장을 그린 학원물 <쿨핫>, 동양철학과 신화를 차용한 페미니즘적 전복 <신명기>, 세계관의 충돌로 인한 파국과 희망을 그린 <폐쇄자>, <온> 등 작품마다 철학적 사유와 페미니즘적 매력이 녹아있다.


서사와 별개로 데뷔 초 유시진의 데생은 종이인형처럼 납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얇고 건조한 이목구비가 자아내는 이 나른한 분위기를 좋아했지만 수려한 데생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신명기>의 스핀오프인 <마니>는 판타지 서사에 대한 테스트와 더불어 초기 화풍의 소박하고 나른한 분위기가 남아있다. 연재를 거듭하며 탄탄해진 데생은 안정된 프로포션, 좀 더 날카로워진 인상의 근육질 인물과 박진감 넘치는 구도로 채워진다. <애장판 마니>에는 복간 기념 특별 외전 두 편이 실렸는데 연재 시 화풍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가 반가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준다.

시계방향 순으로 나른한 화풍의 초기작 <베이지톤 삼색체크>, 데생이 무르익은 <신명기>,  애장판에 실린 <마니> 외전, <마니> 초판





평범해 보이는 여고생 ‘마니’는 사실 인간계로 도피한 용족의 왕녀이다. 한쪽이 목숨을 잃어야만 끝나는 후계 의식을 피해 주술사  ‘해루’와 떠돌며 은신하는 중이다. 마니의 후계 의식 상대인 ‘소양’은 선대의 어떤 용보다 강력한 마력을 지녔다. 몇 년간 용왕을 배출하지 못해 한층 과열된 백룡부의 기대 속에 소양의 즉위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마니의 보호자인 해루 역시 가공할 마력을 가진 주술사지만 어째선지 내내 혼돈의 계곡에 은둔해왔다. 어린 딸이 형식적 의식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볼 수 없던 마니의 어머니는 해루를 설득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해루는 계약에 응하고 이 일로 마니의 어머니는 용족에게는 죽음과 동일한 형벌인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안은 채 마니는 인간계로 몸을 숨긴다.

마니 어머니와 모종의 계약으로 묶인 주술사 해루


이번에 도피하게 된 고등학교는 그저 반복되는 도피처 중 하나로 보였다.

그러나 부모의 편애에 외로워하는 ‘진희’, 소원해진 어린 시절의 우정과 마니에 대한 짝사랑으로 고민하는 ‘서산’, 불치병으로 투병 중인 ‘연수’ 등은 마니에게서 감정의 고저를 이끌어낸다.

마니는 한시성으로 인해 의미를 가지는 삶의 순간을 돌아본다. 특히 연수의 죽음은 존재론적 각성과 더불어 해루에 대한 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포켓몬스럽지만 여의주다. 진짜다..


선대 용왕이 승천하자 마니의 은신 주기가 짧아지며 봉인된 여의주의 존재감도 강해진다. 여의주는 용족들이 가진 마력의 근원으로 내부에 공존하는 힘이다. 자신의 여의주에 씐 마니는 수학여행으로 간 동해에서 정체가 노출되고 소양은 자신의 주술사 ‘사하’를 급파한다.

사하로 인해 과거사가 밝혀진 해루에게 마니는 과거와 상관없이 자신의 곁에 머물러달라고 애원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루는 마니를 떠나버린다. 자신 역시 마니를 사랑하지만 그 마음보다는 살아있는 것이 더 중요한 삶의 지침이라 말하며. 해루가 떠난 후 소양과의 정면대결을 결심한 마니는 동해로 향한다.


소양의 마력은 듣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고 마니는 소멸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해루가 나타나 자신 역시 후계자 중 하나인 흑룡임을 밝힌다.

사실 해루는 용족과 인간의 혼혈이다. 온화한 성정을 지닌 그의 아버지 ‘처용’은 형제간 혈투가 싫어 평소 관심 가진 인간계에 영구 정착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부인과의 결별로 인간사에 회의를 품게 된 처용은 결국 아이와 함께 서라벌을 떠났다. 다시 용궁으로 돌아온 이상 후계 의식을 피할 수 없게 된 처용. 하지만 그는 무의식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는 어린 아들 해루가 더 고민이다.

해루를 용족으로 각성시키기 위해 처용은 자신의 마력을 조금 나누는 주술을 행한다. 그러나 처용의 여의주는 더 강한 기운을 가진 해루를 선택하고, 해루는 아버지의 마력을 모두 쓸어 담은 가공함을 보유하게 된다.

여의주에게 버려져 마력을 완전히 잃은 처용은 당연히 후계 의식에서 패배한다. 처용은 자신의 분신 해루를 남길 수 있어 기쁘게 죽지만 해루는 죄책감으로 은둔의 삶을 택한다.

(처용과의 후계 의식에서 이긴 선대 용왕이 마니의 아버지 ‘청룡’이다. 마니의 어머니는 주술사 출신이었기에 어린 시절 처용의 의식을 목격했었다. 원칙상 마니 이전 해루가 후계 의식에 나서야 하기에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마니의 도피를 돕기로 계약한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부채의식 때문에 마니를 떠난 해루지만 그 마음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해루는 후계 의식에서 패한 소양에게 마니와 자신의 여의주를 양보하겠다고 한다. 대신 자신들이 소멸된 것으로 해달라고 한다. 소양을 설득해 거래는 성립되고 마니와 해루는 홀연히 사라진다. 마니의 학교 친구들은 당혹스러우면서도 그녀가 그립다.

용족의 후계 의식을 용오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십여 년이 흐르고 가장이 된 서산은 피서를 왔다. 물에 빠진 딸을 구해준 훤칠한 남자는 감사의 인사를 하기도 전에 멀어져 간다. 그런데 멀어져 가는 그와 곁의 그녀가 어쩐지 낯익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온 마음을 빼앗아간 묘한 그 아이, 마니를 닮은 그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그녀는 어쩐지 살짝 미소 지었던 것도 같다.

불현듯 소환된 과거의 시간 속에 서산은 눈물 흘리고 만다.





보주 寶珠를 의미하는 마니 摩尼는 불행과 재난을 없애 주고 더러운 물을 정화하며 물 자체를 변하게 한다고 한다. 마니와 해루를 묶어준 것은 연심 이전에 죄책감이다. 다른 생명을 담보로 삶을 부여받게 된 이들은 자기 환멸과 부채의식에 시달린다.

해루의 죄책감은 마니에게 조력함으로써 정화된다. 삶의 우선순위까지 바꾸게 한 마니가 해루의 진짜 여의주였던 셈이다. 마니는 어머니의 희생으로 부여된 삶을 낭비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녀는 죄책감에 매몰되어 있기보다 해루에 대한 연심이든 목숨을 건 후계 의식이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자신을 던진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정공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체성은 선택받은 영웅의 타고난 자질이 아닌 관계를 통한 개인의 성장담으로 묘사된다.


천년 전에도 무심히 아름답던 달빛처럼 마니와 해루가 순례해야 할 시간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 시간은 스스로 쟁취해낸 것이기에 비로소 ‘삶’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마니> 속 이런 삶은 거대한 보주의 마력이 아닌 애틋함, 연약함 같은 작은 기억들에 의해 유지된다.

시간의 고리 속을 돌다 불현듯 우리를 흔드는 작은 순간들이야말로 영원한 기억으로서의 삶을 이루고 있다고 이 아름다운 작품은 말한다.





@출처/

마니 摩尼, 유시진

마니 摩尼 (서울문화사, 1995)

마니 摩尼 (시공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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