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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Sep 23. 2016

소공자, 품위의 코스튬


프랜시스 버넷의 작품은 따뜻하고 풍부한 감성과 세밀한 이미지가 존재한다. 대표작 중 <소공자>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화사한 에피소드로 읽는 내내 즐겁다.

세드릭의 캐릭터는 성별과 연령대만 바꾸면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과 같다. 계급 이동으로 인한 화려한 생활은 시각적 대리만족을 (재벌 2세와 쇼핑에 나선 주인공이 드레스 쇼를 펼친다.) 기존 가치와 상이한 주인공의 성격은 히로인으로서 활력을 부여한다. (나를 이렇게 대한 사람은 니가 처음이야!;;;) 극 중 최대의 위기조차 예정된 해피엔딩을 위한 장치로 소비될 뿐 갈등에 대한 고민은 없다.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보지 않더라도 버넷은 현실의 아동 문제를 동화적 해결책으로 봉합한다. 그녀의 작품마다 반복 변주된 신데렐라 서사는 고루한 계급의식, 인물의 전형성과 더불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비평을 받았다.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버넷은 가세가 기울어 미국의 테네시 주로 이주해야 했다. 오랜 가난, 미래에 대한 불안, 작가로서의 성공과 엇갈린 개인사의 비극으로 인해 그녀는 평생 우울증을 앓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답게 말년에는 심령술과 신비주의에 빠져 기괴한 구닥다리 의상에 가발을 쓰고 다녔다. 그녀의 다른 대표작 <비밀의 화원>에는 이런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다.

고난 끝에 행복을 찾는, 그것도 일상적 행복이 아닌 계급 이동의 화려한 해피엔딩은 버넷 자신의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비밀의 화원 2, Flowers we are. https://brunch.co.kr/@flatb201/268



금발의 긴 곱슬머리, 레이스 칼라가 덧대진 벨벳 수트로 등장하는 세드릭은 버넷의 둘째 아들 비비안이 모델이다. 초판 삽화가 레지널드 버치가 버넷이 보내온 사진을 바탕으로 그려낸 세드릭의 이미지는 당시 부모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태생적 귀족의 기품’이란 컨셉이 덧씌워져 세드릭 코스튬은 한 세기 동안이나 유행한다. 패션 디자이너 입생 로랑은 1975년 쇼를 세드릭 스타일로 진행했다.

버넷의 둘째 아들 비비안
선풍적인 인기를 끈 세드릭 스타일


금성 전집의 <소공자>는 레지널드 버치의 원전 못지않은 수려한 일러스트가 실려있다. 1970년대 일본의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이케다 히로아키는 풍부한 색감으로 아름다운 인물을 그려내는데 능했다. 원전을 모사했음에도 이케다 히로아키 특유의 섬세한 화풍이 BBC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생생함을 더한다.

레지널드 버치의 원전(좌)과 이케다 히로아키가 그린 같은 장면(우)


레지널드 버치가 일러스트를 그린 초판


버넷이 미국과 영국을 통해 자유와 전통이란 가치를 대비시켰다면 이케다 히로아키는 명암대비를 통해 극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금성 전집 내 <소공자>는 장식성을 배제해 대상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주인공의 슬픔과 위기, 영국의 보수적인 분위기와 대부분의 실내 장면은 무겁고 어두운 화면으로 처리된다. 반면 대부분의 실외 장면이나 주인공의 성품을 표현하는 장면은 밝고 산뜻한 채도로 구현된다. 아름다운 드린코트 성을 조망한 후에 어둠 속에 침잠되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백작의 서재가 등장하는 식으로 직관적인 시각 대비가 반복 교차된다.


세드릭의 긍정 에너지는 대척점에 있던 이들조차 끌어당기는 자기장 같은 매력을 펼쳐 보인다. 세드릭이라는 캐릭터는 스타일링과 시너지를 내며 미국, 영국 할 것 없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매력적인 외모에 해사한 성격, 노력으로 성취할 수 없는 상원 귀족이란 배경. 앞다퉈 자식들에게 세드릭 코스튬을 입힌 당시의 부모들은 유행을 떠나 이런 이미지가 덧씌워지길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세드릭의 미모는 그렇다 쳐도 태생적으로 보이는 귀족적 품위는 사려 깊은 어른의 지도로 더해진 것이다. 극 중 세드릭의 어머니와 다수의 대체 아버지들은 세드릭에게 쏟아지는 편애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치환시킨다. 과정에 있어서도 세드릭 자신이 ‘베푸는 절대자’가 아닌 ‘친절한 조력자’가 되도록 조율한다. 순수한 선의를 목격한 타인의 자발적 감화는 드라마 속 재벌 2세와의 연애만큼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속에 살 수 있길 소망하게 만드는 이 작품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흔히 아이들을 빈 도화지로 표현한다. 누구나 자신의 혈연이 곱고 아름다운 그림으로만 채워진 도화지를 같길 바랄 것이다. 애정의 무게에도 부모는 그 그림을 대신 그려줄 수 없다. 그러나 부모는 아름다운 것을 채우기 위한 노력을 시현해 보일 수 있는 가장 가깝고 구체적인 조력자이다.

우리가 ‘품위’에 감동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넘어선 문명화된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의식하고 기본적인 수치심을 아는 어른인가? 아이에게 이상적인 코스튬을 덧씌우기 이전에 어른-부모 자신의 모습부터 돌아봐야 할 것이다.





@출처/ 

소공자, 프란시스 호지슨 버넷 (Little Lord Fauntleroy, Frances Hodgson Burnett, 1886)

Little Lord Fauntleroy (Charles Scribner's Sons, 1886, 일러스트 레지널드 버치 Reginald Bathurst Birch)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4권 미국 편, 소공자 (금성출판사, 1979, 번역 이전, 일러스트 이케다 히로아키 池田浩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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