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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Oct 26. 2016

할로윈 브라이드, 입맞춤을 나누며


이계가 뒤섞여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마주치는 시기. 한 해가 거진 지나간 때 보내는 안부 같은 의식들.

동양권의 추석, 백중, 중추절 등은 이승과 저승을 동일선상에 둔 의식에 가까운 기념일이다. 추수감사절이 있긴 하지만 서양권의 세계관에선 아무래도 할로윈데이가 이런 특성에 어울린다. 과자를 얻건 장난을 치건 일상의 우리들은 되돌아온(?) 이들과 섞여 떠들썩한 하루를 보낸다.

서사만큼 건조한 화풍을 가진 한혜연 작가는 판타지와 미스터리물을 즐겨 그려왔다. 단편 <할로윈 브라이드>는 스산한 하루 속 애틋한 조우를 그리고 있다.





할로윈데이의 밤이지만 ‘프리실라’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코스튬이 아니다. 오늘은 그녀의 결혼식이 있다.

그녀가 연인 ‘테오’를 만난 것은 일 년 전 오늘이다. 친구가 주관하는 할로윈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탄 엘리베이터에 사고가 났다. 폐소공포증으로 패닉 상태가 된 그녀는 낯선 남자의 침착한 도움으로 진정한다. 연인이 된 둘은 첫 만남을 기념해 결혼식 날짜를 할로윈데이로 잡은 것이다.

우연한 사고에서 테오는 침착하게 프리실라를 도와준다.


친구들은 흥겹고 테오도 여느 때처럼 다정하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기분이 내내 프리실라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결혼식이 진행되고 신부 서약에 대답할 차례가 되었음에도 프리실라는 입을 뗄 수 없다. 손 내밀며 다가오는 다정한 테오의 모습 위로 알 수 없는 장면까지 겹쳐진다.


눈을 뜬 프리실라는 환자복 차림이다. 의사는 그녀가 엘리베이터 사고를 당해 지난 일 년 간 혼수상태였다고 말해준다. 건물이 붕괴되는 순간 그녀를 감싸 안고 있던 남자로 인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도.

그날의 사고로 그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거나 가사상태이다. 때마침 심정지를 일으킨 옆 침대의 남자는 분명 모르는 사람이건만 너무나 낯익다. 그의 얼굴은 기억 속의 연인 테오와 똑같다.

이제 막 돌아온 몽롱한 현실 속에서 프리실라는 떠나가는 친구들을 응시한다. 지난 일 년 간 사랑해 온 연인도. 테오는 자신의 신부에게 다정한 입맞춤을 남긴 후 사라져 간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뜻밖의 헤어짐을 맞게 되는 프리실라




미스터리 스릴러, 그중에서도 단편을 좋아하는 취향이라면 한혜연 작가의 작품을 탐독할 수밖에 없다. 판타지 미스터리 <Illusion>, 나르시스트 형사 노엘의 사건 일지 <M. 노엘>, 오후를 모티브로 뒤틀린 관계에 관해 탐색한 <자오선을 지나다>, 역시 상대적 관계에 관해 탐색한 학원물 <체리맛 캔디>, <어느 특별했던 하루>, 최근작 <빵 굽는 고양이>, 페미니즘 함의가 가득한 <기묘한 생물학> 등 다작 중에서도 옴니버스, 단편의 비율이 높다.

한혜연의 기담은 옛이야기나 초자연적 장치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말쑥한 화풍만큼 건조한 서사는 썰렁한 도시괴담에 가깝다. 주로 대도시의 일상으로 선정되는 현대적 배경은 이런 점을 극대화시킨다.

그녀의 주인공들이 품는 지순한 동심, 자존감, 절박한 연심은 대부분 배반당하거나 오해된다. 권선징악이라는 기담의 전형성을 피해 가는 서사는 슬래셔가 아닌 가치 상실이야말로 진짜 공포임을 보여준다.


한혜연 작품 세계의 또 다른 한 축은 소수자 간의 연대와 관계에 관한 관찰이다.

<그녀들의 크리스마스>, <금지된 사랑>, <아마존>, <자오선을 지나다> 속 인물들은 끝없이 자문하고, 이내 허물어지고, 애써 일어선다. 그들에게 희망이 남아있을지는 모호하다. 시선 밖에서 좌절하는 이들 대부분이 여성이거나 소수자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관계에 대한 이런 조밀한 관찰은 심연에 대한 탐색으로 변주된다. 사이비 종교에 관한 장편 <애총>은 한혜연 특유의 냉랭한 조소와 심리묘사가 절정을 발한다.


<할로윈 브라이드>는 <받아야 할 전화, 받지 말아야 할 전화> 등과 더불어 익숙한 도시괴담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의도치 않게 생사를 같이 한 테오와 프리실라는 분투의 시간도 함께 한다. 선의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 테오에게 보내는 위안이었을까? 무의식 속 프리실라는 그에 대한 부채감을 로맨스로 윤색해버린다. 자각하지 못했을지라도 우연한 사고 속에 한 시기를 함께 한 테오와 프리실라는 이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간다.

마치 그런 한때도 의미 있었다는 듯이, 애틋한 시간을 나누어 가지듯 입맞춤을 나누며.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스산한 10월의 마지막 날, 퍽 어울리는 헤어짐이다.





@출처/ 

Halloween Bride, 한혜연

Illusion, Halloween Bride (대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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