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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Nov 01. 2016

트립 트랩 레슬리,
지금 우리는 숲으로 간다.


그림 같은 루체른 호수 옆 리기 산 Rigi Berg은 세계 최초의 산악 열차가 개통된 곳이다. 아름답지만 험준한 이 산의 교통이 발달하기 전 때로는 손님을, 때로는 짐을 싣고 넘나들던 이는 노련한 마부들이었다. 이런 ‘산악 안내인 Rigiträgern’에 대한 그림책 <트립 트랩 레슬리>는 어떤 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좋아하는 작품이다.


절판으로 인한 주화입마는 동, 서양이 다르지 않아서 나는 이 작가의 책을 꽤 오랫동안 찾았다. 다작을 한 작가임에도 모리츠 케넬의 작품은 국내 발행본이 전혀 없다. <월간 꿈나라>에 <착한 마부 레슬리>라는 제목으로 요약되어 실린 이 작품은 우연히 여행지의 벼룩시장에서 헐값으로 얻었더랬다.

수십 년을 이어 발간된 시리즈들이 그렇듯 <Little Golden Book>은 시대별 일러스트의 흐름이 담겨있다. 쉽고 명료한 서사와 독특하고 다양한 빈티지 일러스트로 인해 현재도 수집 열기가 높다.

모리츠 케넬이 참여한 골든 북 시리즈는 당대의 분위기가 살아있으면서도 시대성을 초월한 개성을 보여준다. 

<Animal Counting Book, 1969>  <The Big Little Book, 1969> < My Little Golden Animal Book, 1969>
<Old MacDonald Had a Farm, 1960>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971>


골든 북 시리즈는 아니지만 <트립 트랩 레슬리>는 모리츠 케넬이 즐겨 사용한 주재료가 빼곡하다.

꼴라쥬 느낌의 캐릭터, 텍스쳐가 살아있는 비비드 한 색채는 완성된 스타일로 존재한다.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는 작품마다 녹아 있는 ‘알프스의 자연’이다. 이전에 소개한 알프스 출신 작가 셀리나 쇤츠처럼 그 자신도 리기에서 자란 모리츠 케넬도 체험이 바탕이 된 알프스 풍광을 즐겨 묘사했다.

#셀리나 쇤츠, 우즐리의 종소리 https://brunch.co.kr/@flatb201/38


스위스 민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한 <Tatzelwurm und Alpruoch>, <Hans im Glück>, <Märchen>, 산악열차에 관한 <Die Bergbahn> 등 발표작 대부분에 주인공으로, 배경으로 알프스의 자연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했다는 <트립 트랩 레슬리>도 리기 산에 대한 애정이 듬뿍 드러나있다. 구성 면에서 <Die Bergbahn>와 다소 겹치는 면도 있지만 훨씬 절정에 이른 화풍을 보여준다.

‘Tripp-Trapp’이란 단어는 주인공의 별명이면서 의성어로 추정되는데 의역하자면 ‘쿵쾅쿵쾅 레슬리(혹은 작품 내용상 달그닥 달그닥)’정도가 아닐까 싶다.

리기의 삶이 요약되어 그려진 내지





(약간의 생략과 의역이 있습니다.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베기의 자랑 외륜 증기선은 여름이면 물보라를 일으키며 루체른 호수 위로 많은 여행객을 실어 나릅니다. 승객 대부분의 목적지는 리기 산입니다. 자랑스럽게 우뚝 선 산들은 무척 가파르지요. 여행객들은 모두 짐을 가져오겠죠? 하지만 걱정 마시길! 방법이 있답니다.

선착장에는 여행에 강한 말들과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승객들은 휴식을 취하며 각각 마음에 드는 말을 살펴봅니다.


마부들 가운데 가장 어린 ‘레슬리’의 말은 가장 늙은 말로 목에는 손님을 찾을 때 쓰는 빛나는 종 Glöckchen을 네 개나 달고 있었습니다.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던 레슬리에게 한 신사가 다가와 산속 호텔까지 딸을 데려다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레슬리는 기쁨에 넘쳐 껑충 뛰어오를 뻔했습니다. 일을 구했으니 어머니를 위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레슬리는 ‘리제트’라 불린 소녀에게 재빨리 안장을 내주었습니다.

레슬리의 말 목에 달린 종이 Glöckchen이다.
지역색이 드러난 아름다운 코스튬과 풍부한 표정을 가진 꼴라쥬 같은 텍스처의 인물들.


트립 트랩— 언덕을 올라갑니다. 트립 트랩— 닭들이 꼬꼬댁거리고 염소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트립 트랩— 예쁜 농가를 지나갑니다. 소들은 평화롭게 신선한 풀을 뜯고 길가의 전나무들은 향기로운 내음을 풍깁니다. 아름다운 종소리가 가득히 퍼져나갑니다.

하지만 레슬리의 말은 무척 힘들어 보여요. 늙은 말은 잘 견딜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렇게까지 예쁠 필요가 있을까여?


리제트는 이미 한참 전에 말에서 내린 채 뒤에서 밀며 도왔습니다. Felsentor의 구름다리까지 왔지만 아직 목적지에 닿지는 못했어요. 레슬리는 리제트에게 미안하고 늙은 말이 불쌍했습니다. 목적지까지의 길들은 너무 힘겨웠습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레슬리의 집이 있었습니다.

노을이 반사되는 절벽은 수직으로, 구름다리는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역동적인 구도가 위태로운 분위기를 돋운다.


레슬리의 어머니는 아들이 데려온 손님을 환대했어요. 그들은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늙은 말을 마구간에 두고 가기로 했습니다. 늙은 말은 아마 기운 차릴 수 있겠죠? 기운 차리지 못하면 어쩌죠? 얇은 신발을 신은 리제트는 가파른 산을 오를 수 있을까요?

식사는 그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습니다. 테이블에는 빵과 우유, 버터가 차려졌습니다. 개 ‘블라스’와 고양이 ‘지지’까지 테이블을 넘봤습니다. 그러나 밖에서는 갑작스러운 폭풍우 구름에 태양이 사라졌습니다. 레슬리는 헛간에서 발견한 지게에 리제트를 태우고 다시 산을 오릅니다.

알프스의 전통 목조 가옥 휘테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뒤따라온 여우의 시선은 개 블라스가 건네받는다.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 최대한 많이 가고 싶었지만 지게 위의 소녀는 무거웠습니다. 블라스는 앞서 가며 길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산을 오를수록 폭풍우 구름은 더욱 어둡고 위협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겁에 질린 까마귀가 울어대고 무서운 동물들도 피난처를 찾습니다. 젖소는 전나무 아래로 피신합니다.

강한 폭풍이 산을 가로질러 휩쓸었습니다. 깜박하며 빠르게 번개가 지나가고 천둥이 울리자 리제트는 무서워했습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레슬리는 낡은 산장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레슬리는 자신의 외투로 리제트를 감싸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소프트하게 쓰이는 핑크를 어둠을 이루는 컬러 중 하나로 사용했다.


레슬리의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양이 지지까지 침대 밑에서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폭풍이 멎고 별들이 빛나는 깊은 밤, 두 사람은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딸을 만난 리제트의 어머니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레슬리는 감사의 말과 함께 넉넉한 품삯을 받았습니다.

역광을 이용해 배경을 강조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다.


레슬리는 늙은 말이 걱정되었습니다. 말이 죽으면 그는 다시 지게를 이용해 짐을 날라야 합니다. 지푸라기 위 늙은 말에게 결국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청록빛으로 채워진 배경 위 점멸하는 불빛과 별빛은 늙은 말에 대한 애조 띤 느낌을 고조시킨다.


몇 주가 흐른 어느 날, 한 선원이 크고 강한 백마를 끌고 왔습니다. 리제트의 아버지가 레슬리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다른 마부들의 부러움 속에 손님들은 모두 레슬리의 백마를 타고 싶어 했습니다. 넓은 안장을 얹은 레슬리의 백마는 두 사람을 태우고도 끄덕 없었습니다.





모리츠 케넬은 역동적인 이미지로 노동의 고됨을 모험의 긴장으로 치환시켰다.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거대한 절벽은 수평으로 가로지른 구름다리의 위태로움을 강조한다.

컬러 배치는 구도보다 훨씬 대담하다. 일반적으로 소프트하게 쓰이는 핑크를 어둠의 밀도로 채택한다거나, 청록빛으로 채워진 배경 속에 점멸하는 보색 대비의 불빛과 별빛으로 애조 띤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지역색이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투박해 보이지만 뜯어볼수록 꼼꼼히 디테일을 살려뒀다. 또 장면마다 조력자나 (개 블라스) 관찰자를 (숲 속 동물들, 대표적으로 여우) 배치함으로써 독자를 서사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레슬리는 황금이나 마법을 찾으러 숲으로 간 것이 아니다. 그가 산에서 보낼 날들은 앞으로 펼쳐질 인생만큼이나 녹록지 않을 것이다. 노을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는 흰 절벽과 커튼처럼 드리운 별밤으로 인해 가슴 설렐 날도 있겠지만, 종종 피신할 전나무 하나 없이 갑작스러운 폭풍우도 맞게 될 것이다.

모리츠 케넬은 하루 동안의 여정을 통해 자연 앞에 인간은 무용한 존재라는 것, 그럼에도 의지와 협업으로 공존의 이유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그리고 있다.


인생이 계절처럼 공정하고 규칙적으로 지나간다면 우리는 덜 불행할까?

험하고 안타까운 뉴스들로 마음이 무거운 요즘임에도 계절은 무심히 가을로 물들고 있다.

숲 속까지 가진 못해도 이내 사라질 이 계절을 한껏 누리자.





@출처/

트립트랩 레슬리, 모리츠 케넬 (Tripp-Trapp Resli, Eine Geschichte vom Rigiberg, Moritz Kennel, 1971)

Tripp-Trapp Resli, Eine Geschichte vom Rigiberg (Atlantis, 1971, 일러스트 모리츠 케넬 Moritz Kennel)

월간 꿈나라, 착한 마부 레슬리 (육영재단, 1981. 3, 일러스트 모리츠 케넬 Moritz Ke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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