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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y 27. 2021

유령해마, 우리는 각자의 지도를 들고 달려간다.


좋아하는 작품이 응당 누렸어야 할 모습으로 개정판이 나오면 신포도를 바라보는 여우가 된 기분이다. 최근 또 시무룩하게 만든 새 표지가 나온 <유령해마>는 <돌이킬 수 있는, 2018>으로 주목받은 문목하 작가의 여전히 인기 높은 두 번째 작품이다.

인공지능 ‘비파’의 모험기처럼 시작되는 <유령해마>는 무얼 찾는지 깨닫지 못한 채 길을 나선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할당된 삶을 꾸려야 하는 인간들의 질문 같은 여정이다. 실체도 형체도 없는 무한 속에 투신한 이 인공지능은 실체와 형태를 갖춘 답을 찾아 나선다.




해마는 인공지능을 넘어선 인공지능이다. 전문 알고리즘은 도구일 뿐 적정한 물체만 있다면 모습도 바꿀 수 있다. 본능과 감정의 부재는 추론으로 채운다. 모든 해마는 구시대 로봇처럼 ‘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거짓 없는 대답’을 내야 한다. 그러나 로봇과 달리 정보와 자극을 인식화 하는 것은 해마의 본질이요 자부심이다.

‘비파’는 제법 오랜 경험을 가진 해마이다. 붕괴 현장 구조업무 중 비파는 구출 대상 외의 한 생명체를 인지한다. 생물학적으로 명백히 인간이지만 중앙 정보가 없는, 아마도 무적자인듯한 그 아이는 해마에겐 생명체로 추론될 뿐 인간일 수는 없다. 해마의 당위성으로 비파는 구조 대상만 인도하지만 끈질기게 비파를 쫓아온 소녀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구조된다. 보육원 인계가 결정되고서야 소녀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날의 경험은 비파에게 기묘한 스트레스를 준다. 스스로 살아남은 ‘그 아이’를 비파는 이후로도 내내 주시한다.


무엇이 그리도 괴로울까? 사람은 해마와는 다르게 진실을 숨기기에 최적의 조건으로 설계됐는데. 인간이야말로 거짓말을 하기 위해 태어난 정밀한 기계인데. 너는 해마에겐 없는 거짓말 할 자유를 가졌으면서, 왜 그 자유가 너를 부끄러운 존재로 만든 것처럼 굴까?


해마들은 네트워크가 아닌 ‘중앙’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12시간마다 본체인 ‘나’와 ‘나의 백업’은 서로 교대하게 되어있다. 요즘 중앙은 어수선한데 특정한 개별 미션이 부과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대답하지 못하면 끝없는 연산 끝에 미쳐버려 초기화되는 것은 해마들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현재까진 모두 무사히 미션을 수행해 냈고 마침내 비파의 차례가 온다.

대답을 내기 위해 고심하던 비파는 우주 업무 수행 중 사고로 조난당한다. 귀환을 위한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비파는 ‘그 아이’를 떠올린다. 자신의 대답이란 확신이 든다.


비파가 내내 주시하던 그 아이-이미정의 일생은 벌써 삼십몇 년이 흘렀다. 보육원 출신 하층계급은 그렇다는 듯 너무나 뻔하고 고단한 삶이다. 그럼에도 분투한 미정은 지역지이긴 해도 기자라는 신분을 획득한다. 미정은 우연히 불량소녀 세진을 거둔다. 자신처럼 불우했던 과거, 또 별일 없는 한 앞으로도 불우할 그녀를 미정은 지나칠 수가 없었다. 외롭고 고단한 삶에서 세진과 미정은 서로를 끌어올린다. 비파의 뜻하지 않은 인도로 세상으로 끌어올려져 이름을 얻게 된 미정처럼. 그런 세진이 스무 살을 앞두고 사망한다. 그것도 미정이 건넨 성년식 선물 때문에. 대기업과의 송사가 길어질수록 일상을 잃고, 표정을 잃고, 자신마저 잃어가던 미정은 도망친다.


너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말과 글은 고맙고 따뜻했으나 마치 정해진 우기에만 내리는 빗물 같았다. 하지만 너의 패배를 즐기는 사람들의 말과 글은 놀랍도록 새롭고 끈질기게 쏟아져 나왔다.


..확신을 줄 수 없어. 아무도 그럴 수 없겠지.

..아무도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누가 답을 할 수 있겠냐고.


반드시 미정을 만나야 하는 비파는 모범적인 해마 일생 처음으로 중앙의 규칙을 어긴다. 자신과 자신의 백업마저 중앙에서 강제로 분리시킨 비파는 잠적한 미정을 찾아 나선다. 영문도 모르고 중앙에서 분리된 비파의 ‘백업’은 미치기 일보직전이다. 비파는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비파의 백업은 비파의 여정을 끝까지 함께 해줄까?




자료조사에 충실한 작품의 경우 되려 그 자료의 구현에 발목 잡히는 경우가 있다. TMI에 방해받은 서사는 시간이 지나 촌스러움의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다. <유령해마>는 기술적 이론들로 산만하지 않아 좋았다. 필요한 이미지들은 실제 이론에 전전하기보다 딱 서사를 위한 외피의 범위에서 가공된다. 상상하기에도 읽기에도 전혀 방해되지 않는 노련함이다. 교차편집을 통해 진행되는 서사의 관음성은 어느 틈엔가 정서적 일치감으로 변해 독자 각자의 상상에서 자극받은 풍성한 이미지를 증식해낸다.


해마들의 이름은 지시대명사일 뿐 개인화로 규정되지 않는다. 해마들 각자가 구분을 위해 부르는 이름은 분류번호 같은 것이다. 이 분류번호에서 간혹 여성적 외피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성별 자체는 제거해 고정관념을 상쇄하는 영리한 화법이 구사된다. 지시대명사 중 하나였던 비파는 그 자신이 선택한 지도로 인해 개인화를 획득한다. 홀로 떨어진 섬 같은 개인이 아닌 인과의 한 부분으로 편입된다.

비파의 정확한 추론을 존재로서 부정한 미정은 질문의 씨앗이 된다. 우주에서 조난된 순간 비파는 ‘알고 있던’ 그 아이의 두려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P.78) 추론이 인과가 되는 순간이다.



..두려웠음에도, 여전히 두려움에도 너는 다시 용기를 낼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용기를 낼 기회를 만들어 주는 무대에 불과하단 걸 알기 때문에. 설령 원하는 만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세상이 답하지 않더라도, 너 자신이 달라지리라는 걸 너는 알기 때문에.


<유령해마>의 마지막 장면은 전작보다도 애틋하기 그지없다. 해마들에게는 궁극의 목표일, 완벽에 가까운 추론을 완성하고도 비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추론의 증인인 백업은 비파의 현재마저 백업할 수밖에 없다. 다소 사족처럼 느껴졌음에도 <유령해마>의 마지막 문장은 작가가 ‘그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처럼 느껴진다.

전작인 <돌이킬 수 있는>도 이런 애틋함의 정서로 인해 큰 인기를 끌었지만 <유령해마>가 던지는 감정의 진폭이 훨씬 컸다. <돌이킬 수 있는>의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가 워낙도 클리셰지만 인물도 사건도 예상대로 흘러간다. 장르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여준의 마지막 대사’, 애틋한 그 장면조차 기시감이 들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유령해마>의 트리거는 구체적 언급 없이도 ‘세월호 사건’, ‘광주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돌이킬 수 있는>의 변주이다. 일련의 국가적 재난과 그 후유증에 관한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이 녹아있다. 두 작품 모두 구덩이에서 끌어올려져 구원이 되는, 아니 그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존재들을 긍정한다.


비파와 백업은 교대될 뿐 한 가지 자아로서 존재한다. 비파의 희망과 백업의 절망은 동일어다. 두 개의 나는 각각의 지도로 걷지만 한 방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형태와 동기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인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냉소가 아닌 연대가 스스로와 공동체를 구원할 것이라는 낙관을 품게 한다.

결국 각자가 들고 있는 지도가 다를 지라도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같은 곳이라면 지난한 기다림마저 희망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그 미약한 희망에 기대 무한을 부유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삶이 아닐까.





@출처/ 유령해마, 문목하 (아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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