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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un 03. 2021

비밀의 화원 1, 내일의 장미


세상에 비밀은 없다지만 은밀함이 주는 긴장감은 특별한 기분마저 돋운다.

소녀 메리의 정원도 오랜 사연 속에 잠겨있었다. 비밀의 쌉싸름함으로 정원은 더욱 달콤하게 피어난다.

프란시스 버넷의 주인공들은 마법에 걸리지도 거대한 모험을 떠나지도 않는다. 그들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거나 발견되지 못한 품성이다.

다정함과 이타심 가득한 세드릭, 사려 깊은 무한 긍정 몽상가 세라와 달리 <비밀의 화원> 주인공 메리는 이기적이고 심술궂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외모만큼 푸석했던 소녀가 회생시키려 애쓴 정원은 자각조차 못했던 스스로의 외로움이다.

 

낭만주의의 감상성을 계승한 빅토리아 시대 초기엔 ‘우울’마저 유행의 일부였다. <비밀의 화원>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버넷의 개인적 비극에 관한 회환이 녹아있다. 클리셰 때문인지 작품의 인기에도 버넷은 매번 평가절하 당했다. <비밀의 화원>도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류작이란 억울한 비평을 감수해야 했다. 확실히 <비밀의 화원>에는 고딕 낭만주의의 감상성과 미스터리함이 흐른다. 그러나 그 낭만성이 자기 연민에 함몰되기보다 치유와 연대로 모색되었기에 이 정원은 여전히 사랑받는다.


#비밀의 화원 1, 내일의 장미 https://brunch.co.kr/@flatb201/266

#비밀의 화원 2, Flowers we are. https://brunch.co.kr/@flatb201/268

#비밀의 화원, 빈티지 일러스트 https://brunch.co.kr/@flatb201/269

#비밀의 화원, 빈티지 일러스트 2 https://brunch.co.kr/@flatb201/270


미국판 초판, Maria Louise Kirk, 1911 / 영국판 초판, Charles Robinson, 1911




붉은 가슴 울새에게

영국판 초판 일러스트를 그린 찰스 로빈슨의 고전적 이미지는 이후의 많은 판본들이 모사하거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특히 메리가 울새를 쫓아 헤매는 장면은 신비롭고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로 도입부를 요약한다.


“나를 기억하는구나!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울새는 자신이 아주 중요한 존재이며 얼마든지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직 메마른 황야, 스산하고 우울한 요크셔의 저택, 처음 느껴보는 고립감에서 메리를 이끄는 첫 번째 존재는 ‘붉은 가슴 울새 Robin Redbreast’이다. 이름대로 가슴팍이 붉고 체구가 작은 깜찍한 유럽 울새이다. 사랑스러운 묘사는 버넷 자신의 경험으로 이때의 애정을 에세이로 쓰기도 했다. 불행한 개인사가 이어지던 시기 메이섬 홀의 아름다운 창가에서 버넷은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울새에게 위안받는다. 반려동물까지는 아니어도 빈번히 창가를 맴돌던 울새는 다음 작품의 모티브이며 마스코트가 되어주었다.

부모와 사회로부터 방치된 소녀를 회복으로 이끄는 자연의 전령사에 이보다 적합할 수 없다. 울새에게 건네는 메리의 애정은 버넷의 고독이 중첩돼 보여 더욱 애틋하다.

#My Robin, 1912 https://www.gutenberg.org/cache/epub/5304/pg5304.html

Inga Moore, 2010 (#1) / Robert R. Ingpen, 2010 (#2,3)




알려진 정원

작품 속 정원인 미셀스웨이트의 모델이 된 곳은 켄트의 대저택 그레이트 메이섬 홀 Great Maytham Hall이다. 아쉽게도 요크셔의 거친 황야가 아닌 넓고 아름다운 목초지이다. 방이 100개도 넘게 있는 미슬스웨이트 저택과 규모가 다르지만 유명세에 힘입어 정원은 비교적 유사하게 꾸며두었다고 한다.

수백 년의 유행을 거친 영국의 정원은 18세기 접어들며 시골 대주택과 결합된 경관 정원 Landscape Garden 형태로 고착화된다. 컨트리하우스 Country House로 지칭된 영국의 대저택들은 봉건 장원에서 파생된 형태를 유지해왔다. 규모의 화려함과 거대함뿐 아니라 지어진 지 적어도 한 세기 이상 지난 증여 건물을 의미했다. 대저택의 정원은 가로수 진입로 Tree Avenue 너머 관목 울타리로 경계를 친 랜드 뷰를 포함하지만 자급자족용 간편한 경작지와 관상용 정원에 한정되는 경우도 많았다. 정원의 규모와 범위는 당연히 재력과 취향의 전시장이었다.

Great Maytham Hall


“깔끔하게 다듬지 말자. 이곳이 깔끔하면 비밀 정원이 아닐 것 같아.”


<비밀의 화원> 시기적 배경인 19세기의 정원은 기존의 르네상스풍 경관 정원보다 좀 덜 규격화되고 유연한 실용성을 중시했다. 경관 정원을 계승한 야생 정원 Wild Garden도 조형적인 기교보다 조화로움을 목표하는 영국 정원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는 동선은 세심한 설계의 결과였다. 오솔길을 통해 이어지는 과수원, 화원을 지나 관목 숲 너머 들판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풍경으로 관리되었다. 그 광활한 풍경이 대를 이어 물려진 사유지임은 공고한 계급의식을 보여준다.

빅토리아 시대에 번성한 부엌 정원 Kitchen Garden은 채마밭, 텃밭으로 지칭되는 식용작물 경작지이다. 경작물 재배가 용이하도록 습도, 온도 조절을 위한 3M 이상의 높은 담장을 두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당대의 자연주의를 적용해 주거지에서 비교적 떨어진 곳에 구획된 관상용 정원과 분리했다. 정원이 매개가 되는 아름다운 동화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Tom 's Midnight Garden, Philippa Pearce, 1958>도 채마밭에 붙어있는 높은 담장 위를 호기롭게 걷는 톰이 묘사된다.

담장 정원 Wall Garden은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본격 관상용 정원이나 화원을 의미한다. 다듬어 모양낸 상록수를 두르기도 했지만 유지보수가 용이하도록 일반 담장에 덩굴성 식물을 덮었다. <비밀의 화원> 속 장미 정원도 이런 구조인데 역시 높은 담장을 둘러 화원이 오랜 기간 비밀 속에 잠길 수 있었다.

#톰 깊은 밤 13시, 시간의 정원 https://brunch.co.kr/@flatb201/232


이런 기본 구획을 중심으로 관상용 정자 Folly, 간이 덩굴 정자 Pergola, 식물 해시계 Sundial, 조각이 비치된 연못 Pond과 분수대 Fountain 등이 유행에 따라 도입되었다. 유럽 본토만큼은 아니어도 토피어리 Topiary도 다양하게 활용된다. 20세기 들어 과학적 호기심과 지리적 확장으로 유럽 외 산지 식물이 다량 수입되자 온실 Green House의 유행도 가속된다. 이전 세대의 창문세 부과로 알 수 있듯 온실 유행은 너무 속물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재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18세기 내내 영국의 정원들은 자연주의 조경을 엄격하게 적용해 조망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철저히 조율되었다. 빅토리아 시기의 이런 강박적인 유행은 19세기 초에 들어서며 실용성이 중시된 혼용주의가 적용된다. <비밀의 화원> 속 정원들에도 혼용주의의 느슨한 분위기가 녹아있다. 동화라는 특성상 어린이들이 조경의 규칙에 연연할 리도 없고 말이다.

수세대를 걸친 유럽 정원의 유행에서 목가적 풍경에 열광하는 영국 정원을 이런 일반적인 요약으로 뭉뚱그릴 수 없지만 세계관으로 조성되는 정원의 매력이 여러 작품마다 듬뿍 녹아있다.




Where you tend a rose, a thistle cannot grow.

스테디셀러답게 영화와 드라마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드라마에서 듬직한 청년 콜린을 맡았던 배우 콜린 퍼쓰가 새로운 리메이크에선 상실에 휘청거리는 크레이븐 씨로 등장한다.

1987년 드라마의 결말은 각색되었는데 1차 세계대전 발발로 디콘은 전사하고 콜린은 부상을 입은 채 귀향한다. 크레이븐 가의 정원에서 해후한 콜린이 다시 한번 프러포즈하자 메리는 ‘우리의 정원에서 듣고 싶었다’고 대답한다.

나는 이 변주에 반발심이 들었다. 좋아하는 작품의 후일담, 더군다나 로맨스가 실현되는 순간을 목도하는 것은 팬심에 큰 만족감을 주지만 <비밀의 화원>에 굳이 이런 해석이 필요할까 싶다.

<비밀의 화원> 주인공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공통의 정서로 맺어진 연대감에 있다. 우리가 배워왔으나 정작 실현치 못한 ‘계급과 성별에 개의치 않고 선량한 호의로 맺어진 대등한’ 우정 말이다. 메리가 주도하는 서사에 콜린이 동참한다면 디콘은 상냥한 안내자이다. 메리, 콜린, 미셀스웨이트의 황야와 모든 들짐승이 사랑하는 무해한 소년이다. 그런 디콘은 무용하게 죽여버리고 헤테로 중산계급 러브스토리로 귀결되는 드라마의 결말은 연대가 동화 속에서나 가능함을 주입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기 소유 부동산에 장미 화원을 일군 소녀에게 로맨스는 일 순위가 아니다! 잡초뽑기만도 하세월이라구!

(@https://youtu.be/OHe9JZc-YmU)




내일의 장미

<비밀의 화원>은 황야가 기다림의 시간 속에 아름다운 계절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누구나 아직 피워내지 못한 아름다운 품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 작품이다. 그 아름다움은 저절로 피어나지 않는다. 흙을 돋우고, 벌레를 잡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세심히 물을 주는 지난함 끝에 얻어진다.

햇살과 비는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디콘의 선량한 낙관처럼 메리의 건강함은 전이된다. 과거를 비추는 거울 같은 콜린과 추억 속에 매몰된 크레이븐 씨의 마음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무사히 피워낸 장미 송이를 떠올리게 된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도 사랑하는 이와 바라볼 때 의미 깊어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긴다.

시간 속에 모든 것이 말라 버린 것 같은 정원에서 장미를 피워내는 과정들이 경이롭기까지 한 이유다.


카렐 차페크는 비밀 속 화원처럼 아름다운 에세이 <원예가의 열두 달 The Gardener's Year, 1929>에서 꽃을 피우는 것에 관해 이렇게 귀띔한다.

#원예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의 정원 https://brunch.co.kr/@flatb201/205


우리 원예가는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다. 장미가 피면, 내년에는 더 예쁘게 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십 년이 지나면 이 작은 당회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될 것이라고.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원예가에게 있어 가장 감동적인 것은 바로 우리들의 미래이다. 즉, 새해를 맞을 때마다 높아지고 아름다워진다는 것. 고맙게도 우리들은 또 한 살을 먹는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바라보는 장미는 한층 더 아름답다.

내일의, 내년의 장미에 담긴 소망으로 인해 우리는 정성스럽게 흙을 고른다.

아름다운 것들은 소멸되지 않는다. 다만 어딘가에 숨어있거나 다른 형태로 피어날 뿐.

그리고 그 꽃을 함께 바라볼 당신이 있음으로 인해 이 풍경이 완성된다.





@출처/ 

비밀의 화원, 프랜시스 호지스 버넷 (The Secret Garden, Frances Hodgson Burnett, 1911)

The Secret Garden (William Heinemann, 1911, 일러스트 찰스 로빈슨 Charles Robinson)

에오스클래식 20, 비밀의 화원 (현대문학, 2013, 번역 박현주)

걸클래식컬렉션, 비밀의 화원(윌북, 2020, 번역 이경아)

The Secret Garden, TV Movie (CBS, 1987)


원예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The Gardener's Year, Karel Capek, 1929)

원예가의 열두 달 (맑은소리, 2002, 편집 홍유선, 일러스트 요제프 차페크 Josef Cap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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