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페에서 책 읽기 Jun 05. 2018

원예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의 정원


계절의 아름다움에 이유 따윈 없다. 매해 돌아오지만 단 한순간도 같지 않다.

특별함이나 권태로움은 우리의 얄팍함이 붙인 이름일 뿐이다.

카렐 차페크의 에세이 <원예가의 열두 달>은 그런 미세함을 기민하고 유쾌하게 그려낸다.

다리를 흔들며 툇마루에 앉아 허랑하게 보내는 오후처럼, 햇살에 부서지는 잡념에 목표 잃은 산책처럼, 우울과 불안의 진동을 일순간 흩어준다.


틴케이스가 인기 높은 홍차 카렐 차페크’는 이 체코 작가를 너무나 좋아한 창업주 야마다 우타코가 붙인 브랜드명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응? 샤방샤방을 추구하는 홍차와는 안 어울리지 않아?’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내가 읽은 차페크의 대표작들은 <도롱뇽과의 전쟁 Valka Mloky, 1936>, <호르두발 Hordubal, 1933> 같은 판타지 형식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작품마다 빠짐없이 재미있지만 <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 마저도 종종 정색하는 분위기가 물씬했기 때문이다. (*차페크의 단편집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1929>와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1929> 수록분을 편집해 발간한 절판본이다. 두 권 모두 완역된 개정판이 있다.)

대대로 유럽 문화를 선망해 온 일본에선 구대륙의 사소한 동화들도 꾸준히 발간되었다. 야마다 우타코는 어린 시절 사랑스러운 그림책으로 보게 된 차페크의 동화를 자신의 브랜드 정체성으로 규정했다. 야마다 우타코와 내가 경험한 차페크는 차이가 있던 셈이다.

카렐 차페크 30주년 틴 케이스


물론 동화가 아닌 차페크의 작품들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매력이 가득하다. 판타지의 외관을 하고도 현실에서 눈 돌리지 않는 정공법을 내내 곱씹어 보게 된다. 

<원예가의 열두 달>은 <초록 숲 정원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재발간된 적 있지만 판본마다 절판되어 읽어 보지 못한 에세이였다. 별다른 줄거리도 없이 원예가의 일 년은 느긋하게 흘러간다. 풀 한 포기 없는 겨울이나 모든 것이 피어나는 봄이나 정원사는 그 달의 미션으로 분주하다. 폭신폭신 좋은 흙에 대한 집착적인 묘사들은 읽다 보면 케이크가 굽고 싶어질 정도다.

그러나 단지 희희낙락한 수사의 나열이었다면 읽는 이마다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페크의 여타 대표작을 읽고도 몇 년 후에야 읽은 이 에세이는 그의 판타지가 공허한 수사가 아닌 이유를 새삼 되새기게 했다.


차페크의 정원에는 인생과 노동에 대한 따뜻한 통찰이 스며있다.

배경지식 없이 읽은 터라 격변기 체코에 대한 은유까지 알아채진 못했지만 그의 다른 작품처럼 정치적 함의도 품고 있다. 리얼리티가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격변기, 차페크의 판타지는 어떤 현실보다도 적나라하다. 시대적 광기 속에 범상함은 오히려 판타지가 된다.

관조적인 통찰로, 우왕좌왕 덕후의 집착으로 정원 안팎의 차페크는 분주하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한결같이 희망을 긍정한다. 겨울은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는 계절인 것처럼 다가올 미래를 낙관한다. 다음 해에 더욱 아름다울 장미를 기대하며 흙을 고른다.

#비밀의 화원, 내일의 장미 https://brunch.co.kr/@flatb201/266

요제프 차페크의 낭창하고 유쾌한 이미지들


..1월의 식물이라면,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창유리에 피는 얼음꽃이 있다. 물론 얼음꽃이 피려면 실내 공기에 사람의 입김이 얼마간이라도 섞여 있어야 한다. 공기가 건조한 상태에서 유리창은 얼음꽃은커녕 바늘 한 개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문에 약간의 빈틈이 있어야 한다. 열린 틈새로 샛바람이 들어오면 그 방향으로 얼음꽃이 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음꽃은 부잣집보다 가난한 집에서 더욱 화려하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부잣집의 창문에는 거의 빈틈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는 싹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는 것은 장래에도 없으며 우리의 눈에 싹이 보이지 않는 것은 흙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원예가는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다. 장미가 피면, 내년에는 더 예쁘게 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십 년이 지나면 이 작은 당회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될 것이라고.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원예가에게 있어 가장 감동적인 것은 바로 우리들의 미래이다. 즉, 새해를 맞을 때마다 높아지고 아름다워진다는 것. 고맙게도 우리들은 또 한 살을 먹는다.



극렬한 반나치주의자며 체코 자유민주주의 운동가였던 차페크는 그의 정원에 한그루 한그루마다 동지들을 의미하는 자작나무를 심었다. 어린 묘목에, 다음 해의 장미에 담긴 원예가의 기대처럼 차페크는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꽃이며 나무인 정원을 소망했을 것이다. 이런 낙관이 존재한다는 게 어쩐지 안도감을 준다.

꾸깃꾸깃 해진 날, 마음속 정원의 물기 어린 잔디를 밟아나가듯 읽게 되는 작품이다.





@출처/ 

원예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Zahradníkův rok (Gardener's Year), 1929, Karel Capek, 일러스트 요제프 차페크 Josef Capek)

원예가의 열두 달 (맑은소리, 2002, 번역 홍유선, 일러스트 요제프 차페크 Josef Capek)



작가의 이전글 심야의 모험, 일제 비터와 모리스 샌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