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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y 24. 2018

심야의 모험, 일제 비터와 모리스 샌닥

꼬마 헤베르만 / 깊은 밤 부엌에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영속성은 창작의 멋진 점 중 하나이다. 창작자들의 대화는 이토록 많은 ‘흐름’을 만들어왔다. 그 흐름 속 우연한 일치를 발견하는 즐거움은 후대의 관람객일수록 극대화된다. 관람객 1은 오늘도 새삼 부러움의 한숨을 쉰다.



잠 자기 싫은 어린이들

일러스트레이터 일제 뵌쯔 비터는 당대 독일의 유명 그림책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아서 래컴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화풍은 그림책에 대한 전형적인 기대감을 한껏 충족시켜준다.

일제 비터가 일러스트를 그린 <꼬마 헤베르만>도 독일의 민속적 특징을 낭만적 어조로 풀어낸 슈토름의 동화이다. 잠잘 시간을 넘겨 버티던 꼬마 헤베르만은 달님에게 떼를 써 한밤중 거리로 항해를 나선다. 더 달리겠다며 떼쓰던 헤베르만은 태양의 호통에 바다로 떨어지고서야 항해를 멈춘다.

비터는 우연한 모험의 흥분과 질주의 통쾌함으로 꽉 찬 밤을 슈토름만큼 낭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꼬마 헤베르만, 밤은 짧아 달려 꼬마야 https://brunch.co.kr/@flatb201/69


모리스 샌닥에게 최초의 영감으로 다가선 것은 디즈니의 <판타지아 Fantasia, 1940>였다. 대표작 중 하나인 <깊은 밤 부엌에서>의 전개는 디즈니와 팝아트에서 영향받았던 시기의 작품으로 애니메이션 장르 대한 샌닥식 오마쥬이다.

잠 못 이루던 꼬마 미키는 소음에 이끌려 침대 밖을 나선다. 둥실 떠오른 미키가 들어선 부엌에는 쾌활한 요리사들이 모여 반죽하고 있다. 실수로 떨어진 미키는 밀가루와 함께 반죽된다. 그러나 요리사들은 아랑곳 않고 케이크 굽는 것에만 몰두한다. 오븐에 구워지기 직전, 미키는 반죽으로 비행기를 만들어 탈출한다. 날이 밝아오자 졸음에 겨운 미키는 침대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든다.


일제 비터의 <꼬마 헤베르만>과 모리스 샌닥의 <깊은 밤 부엌에서>에서는 외형상으로 퍽 유사하다.

헤베르만과 미키는 똑같이 에너지 넘치고 말 안 듣는 꼬마들이다. 헤베르만은 침대보를 돛 삼은 요람을 타고, 미키는 빵 반죽 비행기로 청량한 밤을 신나게 질주한다. 꼬마들이 둥실 떠올라 침실을 벗어나듯 이들이 진입하는 세계는 당연히 판타지이다.

샌닥의 주인공들은 발을 구르고 난장판을 만들며 유아적 욕망에 충실하다. 슈토름의 원전에 기대고는 있지만 비터의 헤베르만도 이기적 욕망을 고수한다. 하늘을 달리며 극대화된 충족감을 맛 본 이들은 낙하를 통해 모험을 끝낸다.

헤베르만과 미키는 아직 자고 싶지 않다


둥실 떠오른 그들은 밤의 판타지로 들어선다




금기시된 밤의 가장 높은 곳을 질주하며 이들의 충만감은 절정에 치닫는다.


헤베르만은 타의에 의한, 미키는 자의에 의한 낙하로 심야의 모험을 끝낸다.



마주 보는 작가들

모리스 샌닥의 여타 작품처럼 <깊은 밤 부엌에서>도 여러 이슈를 몰고 온 작품이다. 가장 대표적인 소동은 아동 도서로 부적절한 선정적 성적 함의가 있다는 비판이다. 성기가 노출된 남자아이가 우유에 빠진 문제의 장면은 프로이트까지 인용되며 비난이 쇄도했고 미국 내 사서들에게 보이콧당했다. ‘나는 우유 속에 있고 우유는 내 안에 있어’라는 대사와 함께 보면 오해의 여지는 있어 보인다.


진실이야 본인만 알겠지만 샌닥이 밝힌 공식적인 의도는 ‘죽음과 재생’이었다.

유년의 모호한 두려움은 무의식의 세계로 가시화된다. 악몽 속 위기의 정점에서 미키는 자유롭게 날아 탈출하고 평화로운 잠을 되찾는다. 미키의 복귀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가 탈출한 요리사들의 부엌이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모리스 샌닥은 나치가 주도한 홀로코스트에 많은 혈육이 희생당한 유대인 이민자였다. 성인도 곤혹스러운 시대적 광기는 어린아이였던 샌닥에게 트라우마로 길러진다.

요리사들은 내내 흥겹게 반복한다. 


“우리는 케이크를 굽는다네!”


마리아치처럼 유쾌한 요리사들은 히틀러의 인상을 풍긴다. 흔들림 없이 반복되는 선창은 이제 흥겹기보다 비인간적이고 음험한 단조로 느껴진다.

선정성과 더불어 정치적(?) 이유로도 공공도서관 비치 금지 서적이었다고 한다.


작품마다 불거진 이슈에도 모리스 샌닥의 작품은 지금도 넓게 사랑받고 있다. 반면 당대에 샌닥만큼 인기 높던 일제 비터에 대한 평가가 사그라든 것은 시대성 때문만은 아니다. 당석을 압도적으로 점유해가던 나치는 독일 문화계에 밝고 희망적인 선전물만을 요구했다. 독일 고유의 민속성이 강조된 비터의 아름다운 작품도 그 일환이었다. 일제 비터의 일가 모두 적극적인 나치 부역자였지만 문서 증거 미비로 단죄받지 않았다. 전후 재산을 몰수당했음에도 축척해둔 부동산을 통해 대대손손 부유했던 그녀의 일생은 우리가 아는 친일파들의 결말과 너무나 흡사하다.

비터와 샌닥은 서로의 작품을 알고 있었을까? 서로의 판타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은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의도로 유용된 작품들은 시공을 거슬러 나누는 대담처럼 느껴진다.





@출처/

어린 해벨만, 테오도르 슈토름 (Der kleine Häwelmann, 1849, Theodor Storm)

Der kleine Häwelmann (Nürnberger Bilderbücher Verlag, 1930, 일러스트 Else Wenz Viëtor)

http://www.bambinietopi.it/2014/11/der-kleine-hawelmann-theodor-storm-else-wenz-vietor.html


깊은 밤 부엌에서, 모리스 샌닥 (In the Night Kitchen, 1970, Maurice Sendak)

In the Night Kitchen (Harpercollins, 1996, 일러스트 Maurice Send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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