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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un 24. 2016

꼬마 헤베르만,
밤은 짧아 달려 꼬마야!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종종 개인적인 좌절 속에 피어난다. 살아내기 길고 긴 날들에 지칠 때면 반전을 소망하게 된다. 현실로 이루어질 리 없는 목록일수록 동화적 환상을 쫒는다.

슈토름의 단편집 <세 편의 동화>도 현실의 자괴감을 문학적 환상으로 부정한 작품들이다. 낭만적 상징과 운문에 대한 슈토름의 관심은 동화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꼬마 헤베르만>은 <세 편의 동화>보다 앞선 초기작으로 민속적 성격이 강하다. 곰에 의해 키워진 소년 한스를 통해 모성애를 말한 <한스 베어 Hans Bär, 1837>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아마도 이 작품이 또렷한 서사나 결말을 내기보다 리듬감 넘치는 문장을 통한 공감각화에 집중하고 있어서 아닐까 한다.

#비 공주, 슈토름의 동화 https://brunch.co.kr/@flatb201/67


금성 전집에는 이 초기작 두 편이 모두 실려있는데 <꼬마 헤베르만>의 일러스트는 특히나 아름답다. 고적한 밤과 형형한 별빛 아래 시공간을 넘어선 질주가 흑백으로 미니멀하게 그려진다. 다소 뚱해 보이는 캐릭터들은 되려 작품의 유쾌한 분위기를 돋운다.




헤베르만은 떼쟁이 꼬마이다. 밤낮없이 제일 좋아하는 바퀴 달린 침대를 밀어달라고 떼를 쓴다.

종일 헤베르만을 돌보느라 지친 엄마는 이미 잠들었다. 셔츠로 돛을 만들어 침대를 띄운 헤베르만은 우연히 지켜보던 달님에게 떼를 쓰기 시작한다.

상냥한 달님의 도움으로 거리로 나선 헤베르만은 더욱 신나게 질주한다.


밤의 풍경 속에서 만난 수탉도 고양이도 모두 잠들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헤베르만은 잘 생각이 없다.

은은하고 상냥한 달빛 아래 헤베르만의 질주는 거침없다.

별들까지 헤쳐가며 헤베르만은 밤하늘로 뛰어든다. 달님은 잠들 시간이 훨씬 지난 그에게 묻는다.


“비켜라, 비켜!” 하고 헤베르만은 외치면서, 떼 지어 몰려있는 별님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꼬마야, 아직 멀었니?” 하고 달님이 물었습니다.

“아직 멀었어요.”

“달님, 좀 더 좀 더!”

꼬마 헤베르만은 이렇게 말하면서 달님의 얼굴 위를 비스듬히 달렸습니다. 달님의 얼굴은 짙은 갈색으로 변했습니다. 달님은 세 번 재채기를 했습니다.

“이젠 네 멋대로 해라!”



헤베르만의 고집에 지친 달님은 화가 나서 빛을 끄고 사라진다. 지켜주던 달님도 형형한 별님도 모두 잠들어버리자 헤베르만은 무서워진다. 어둠 속을 마구잡이로 달리는 그의 앞에 빨간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달님이 돌아온 것으로 착각한 헤베르만은 이내 또 떼를 쓴다.


“달님, 비쳐 줘요. 비쳐 줘!”

“꼬마 녀석아!.. 너 여기서 뭘 하고 있니? 내 하늘에서 무례한 짓을 한 괘씸한 놈 같으니!”


이글거리는 눈빛의 태양은 헤베르만을 바다 위에 떨궈버린다.

꼬마 헤베르만이 처음으로 헤엄을 배운 것은 이때다.





모호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꼬마 헤베르만>은 판본마다 일러스트가 아름답다.

아서 래컴 풍의 고전적 묘사에 능숙한 일제 비터는 다수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긴 일러스트레이터이다. <꼬마 헤베르만>은 우연한 모험의 흥분과 질주의 통쾌함으로 꽉 찬 밤을 그려내고 있다.

#심야의 모험, 꼬마 헤베르만과 미키 https://brunch.co.kr/@flatb201/204

Der kleine Häwelmann, 1930, 일러스트 Else Wenz Viëtor


역시 절판본인 <Little Hobbin>은 리즈벳 츠베르거가 일러스트를 그린 영문본이다. 츠베르거 역시 고전적 화풍을 구사하지만 분위기는 좀 더 미니멀하다. 작가의 특기인 여백과 프레임을 이용한 액자식 구성 아래 타로 카드처럼 펼쳐진 환상이 투영된다.

츠베르거의 작품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아름답지만 <Little Hobbin> 속 밤의 항해는 슈토름의 상상력만큼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둔탁한 밤의 컬러를 어쩜 이토록 투명하고 나풀나풀거리게 묘사했을까 싶다.


여덟 페이지 정도의 이 짧은 동화는 줄거리나 결말이 모호하다.

금성 전집의 이 결말이 초월 번역인가 싶어 살펴본 <Little Hobbin>의 결말도 유사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꼬마 헤베르만은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벌써 당신은 잊어버렸나요.

왜, 그때 나하고 네가 가서 그 아이를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 아이는 틀림없이 물에 빠져 죽었을 게 아니겠니?

나하고 네가 구해 주러 가지 않았더라면 말이지..


Then what?

Why, that's when you and I came to the rescue and picked up little Hobbin in our boat.

If we hadn't saved him, he might well have drowned!



슈토름은 헤베르만의 모험에 독자를 끌어들여 서사를 확장시킨다. 이야기 자체는 닫히지만 이야기 밖의 독자를 참여시켜 구조 자체는 열어둔다. 엉뚱하게 끝나는 열린 구조는 꼬리를 무는 상상이 이야기 밖에서 순환되게 한다. 귀여운 분위기 아래 촘촘하게 엮은 구조가 읽어볼수록 즐거운 작품이다.

독일어 원문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환상으로 투영되는 밤과 새벽의 정경, 시간과 자연의 유기성을 아름다움으로 체화시킨 문장이 이 작품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한다. 원문의 아름다움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꼬마 헤베르만>은 딱히 어떤 교훈 없이도 문장만큼 예쁜 분위기의 동화이다.

물론 잠자리에 빨리 드는 어린이야말로 더없이 예쁘지만.





@출처 및 인용/ 어린 해벨만, 테오도르 슈토름 (Der kleine Häwelmann, Theodor Storm, 1849)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26권 독일 편, 시토름 단편, 꼬마 헤베르만 (금성출판사, 1979, 번역 송혁, 일러스트 우에다 다케지 上田武二)

Little Hobbin (North-South Books, 1995, 번역 Anthea Bell, 일러스트 Lisbeth Zwerger)

Der kleine Häwelmann (Nürnberger Bilderbücher Verlag, 1930, 일러스트 Else Wenz Viëtor)


이 글의 제목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夜は短し步けよ乙女, 2008, 숲見登美彦>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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