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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un 23. 2016

여름의 문, 이 계절 지나


웹툰들이 적극적으로 교차 혼용되는 것처럼 이전에도 다른 장르를 바탕으로 한 만화는 당연히 있었다. 다만 플랫폼 자체가 현재보다 협소했기에 그 대상이 한정적으로 느껴졌을 뿐이다.

단정할 수 없지만 전혜경, 권숙 작가처럼 대중성이 검증된 통속 드라마가 차용되던 분위기 속에 오경아 작가는 서정적 분위기의 순문학 쪽을 선호했던 것 같다. 슈토름의 자전적 단편 <호수 Immensee, Theodor Storm, 1849>를 바탕으로 하는 데뷔작 <호수>, 전후 환상문학 <제니의 초상 Portrait of Jennie, Robert Nathan, 1933>을 차용한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처럼 기존 구조를 빌려와 재해석한 작품을 발표했다. 이후 단편 <밥상 앞에서>, <무용 같은 사랑> 등 종종 시와 같은 서정성을 모티브 삼는다.

물론 문학 작품을 차용한다고 해서 문학적 상상력이 당연하게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기존 내러티브에서 어떤 시선을 찾아내는가가 재해석의 범위를 결정지을 것이다.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슈토름의 소설은 유독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들었다. 버라이어티 한 사건 없이 애수 어린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면이 일련의 일본 소설과 닮았다는 느낌도 든다. 이런 특징은 오경아 작품의 주된 정서이기도 하다.

소니아는 그림 속 대역 학우 소년에게 관습에 희생된 존재를 중첩시키며 감정 이입한다.


<댕기>에 연재한 <여름의 문> 역시 슈토름의 <성관을 둘러싸고>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슈토름의 원작이 건조한 분위기로 삶의 내밀한 우수를 그렸다면 <여름의 문>은 비슷한 종류의 결핍을 공유하고 극복해나가는 이들을 그린다. 변화의 에너지가 넘치는 시대를 배경으로 관습을 거부하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 인고의 시간을 거친 재회가 관조적으로 그려진다. 오경아의 다른 작품 <장미정원>이 감정적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랑으로 인한 인생유전을 그렸다면 <여름의 문>은 지나쳐가는 시기 그 자체를 그리고 있다. 원작에 실린 민속요는 주인공들의 테마로 변주되어 감정선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아름답지만 낡고 고적한 성관 라이어 가르텐. ‘소니아’와 ‘유벨’ 남매는 은퇴한 아버지, 대부 격인 학자 ‘아아놀트’ 아저씨 등과 조용히 살고 있다. 사촌 ‘빌헬름’은 아름다운 소니아에게 이성의 감정을 품지만 그녀의 마음은 가정교사로 임시 체류 중인 ‘아힘’에게 향해있다. 처음 품은 사랑은 소니아에게 성숙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그런 변화가 빌헬름은 씁쓸하다. 방학이 끝나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 그는 몇 년 후 소니아의 연락을 받고 성관으로 향한다.


차분함으로 감추고 있지만 아힘의 진보적 사상과 묘하게 반항적인 태도는 소니아의 관심을 끈다. 화랑에 전시된 그림 속 대역 학우 소년을 보며 두 사람은 계급과 관습의 부조리함에 대해 토로한다.

먼지 속에 모든 것이 시들어 가던 성관에서 소니아와 아힘은 서로에게 활기를 더한다. 그러나 좁은 지역 사회에서 아힘의 도드라진 존재감은 구설에 오르내리고 소니아의 아버지 또한 아힘에 대한 딸의 관심을 파악한다. 몸이 약한 유벨이 죽자 소니아의 아버지는 아힘에게 떠나 달라고 한다. 동생의 죽음과 아힘의 뒷모습에 통곡하는 소니아에게 아아놀트 아저씨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위로한다.


몇 년 후 소니아는 병약한 귀족 펠릭스와 정략결혼한다. 이주한 베를린의 사교계에서 소니아는 하인리히 교수로 불리는 아힘과 재회한다. 소니아는 서먹했던 펠릭스와의 관계가 임신으로 인해 호전되자 여자로서의 삶에 새로운 기대를 품는다. 아힘은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생기 넘치는 모습이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마음 깊은 곳 여전한 애정만큼 서로의 행복을 빌기에 둘은 친구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거듭된 만남에 둘의 관계는 다시 구설에 휩싸인다. 소심한 펠릭스는 소니아가 결백함을 알면서도 괴로워하고 부부 사이는 악화된다. 소니아를 루머에서 구하고자 아힘은 다시 떠나버린다.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이번에는 내색도 할 수 없이 둘은 또다시 이별한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유일한 끈이던 아이가 유산되자 소니아는 홀로 성관에 돌아온다. 지병이 있던 펠릭스마저 죽고 미망인이 된 그녀는 변호사인 빌헴름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연락했던 것이다.

특별한 잘못 없이도 삶의 기대가 무참히 부서지자 낡은 성관처럼 침잠하는 소니아. 빌헬름은 어린 시절 그녀의 생기 넘치던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삶의 허무 속에 스스로를 묻어버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몇 달 뒤 빌헬름은 소니아에게서 새로운 편지를 받는다. 소니아의 홀로서기를 돕기 위해 성관에 돌아온 아아놀트 아저씨. 그 뒤에는 그토록 그리워했지만 다가설 수 없던 그, 아힘이 서있다.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진짜 행복은 서로뿐임을 인정하게 된 소니아와 아힘. 더 이상 누구의 시선도 아닌 서로만을 바라볼 것이다.

먼지 같은 과거의 시간은 그림 속에 남겨둔 채 그들은 함께 새로운 계절로 들어선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오경아 작가는 아름다우면서도 개성적인 화풍을 바탕으로 꽤 많은 중, 단편을 발표해왔다. 오경아 작가의 장기는 밀도 있는 감정 묘사이다. 초기작 <호수>, <청회색 파리>를 시작으로 그녀의 작품은 내밀한 감정의 결을 조용히 포착한다.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조우 https://brunch.co.kr/@flatb201/147


<여름의 문>의 모티브가 된 슈토름의 중편 <성관을 둘러싸고>를 처음 읽은 것은 금성출판사에서 발행된 <쥬니어 세계문학> 전집을 통해서였다. 명칭처럼 청소년 대상의 60여 권짜리 문고판 전집이다. 일러스트도 딱딱한 편이고 구성도 일반적인 수준이었기에 정작 이 전집을 읽을 나이가 되어선 심드렁했었다. 하지만 <호반> 속 스스로 흘려버린 청춘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듯 인생의 여러 시기를 돌아 조우한 <성관을 둘러싸고>로 마무리되는 해당 권은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제목부터 시대감 넘치는 <호반>에는 슈토름의 대표작 <호반> 외에 <한 닢의 푸른 잎>, <앙겔리카> 등 별도 발간된 적 없는 슈토름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사랑이 무언지도 모르는 나이에 지켜봤던 연인들이 있다.


순환되는 인생의 고저 속에서 모든 것은 스쳐 지날 뿐이다. 반복된 상실도 시간 속에 무심히 퇴적되고 만다.

또한 아무 날도 아닌 어떤 날, 이미 잃었다 생각한 것과 조우하게도 된다.

지나버린 계절에 자신을 묻지 않고 새로운 계절을 찾아 부단히 문 두드린 소니아. 이 사랑으로 성관에는 예전의 아름다움과 생기가 이어질 것이다. 오래전 사랑했던 소녀의 시간처럼 청량한.





@출처/

여름의 문, 오경아

댕기, 여름의 문 (1993.4-8)

여름의 문 (대화, 1994)


성관을 둘러싸고, 테오도르 슈토름 (Auf dem Staatshof, Theodor Storm, 1859)

쥬니어 세계문학 44, 성관을 둘러싸고 (금성출판사, 1985, 번역 이종대, 일러스트 권오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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