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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r 17. 2017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조우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고향은 프랑스 남부, 그것도 스페인 국경과 인접한 아름다운 곳이다. 이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스페인풍의 실험작을 다수 발표했다. 라벨은 부인했지만 무곡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Pavane pour une Infantedéfunte, Joseph Maurice Ravel, 1899>는 제목부터 벨라스케스의 그림이 연상된다. 애조 띤 로맨틱함을 상상하며 이 곡을 찾아들었다면 얄팍한 기대가 금세 사그라들 것이다. 공작새가 뽐내듯 우아하게 춘다는 장중한 궁정 무도곡은 신고전주의의 영향 아래 한없이 느리고 느리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치렁치렁한 코스튬과 더불어 왕실의 위엄은 넘쳤을지 몰라도 뽐내는 공작새라니.. 어쩐지 웃길 것 같지만 실제로 보고 싶어 진다.


동명의 만화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는 <월간 르네상스>에 연재된 오경아 작가의 중편이다.

단행본 서문에 의하면 이 작품은 미스터리 스릴러를 의뢰받아 시작했다고 하는데 완결된 이야기는 고딕 로맨스에 가깝다. 제목에 한정해 라벨의 무곡이 털어버린 센티멘털한 기대가 제목만 차용한 오경아의 만화에서 충족된다. 그러나 문학적 소재에 관심 높던 작가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준 작품은 로버트 네이선의 환상 소설 <제니의 초상>이다.

#이 계절 지나, 여름의 문 https://brunch.co.kr/@flatb201/68

로버트 네이선은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에 절대 미학으로써의 예술을 중첩시키고 있다.


193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이 미국 작가는 전후의 열패감, 쓸쓸하고 불안한 기운에서의 도피를 몽롱하고 시적인 문장들로 구사했다.

<제니의 초상>은 가난한 화가 이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 제니와의 만남에서 영감 받아 완성한 걸작의 짧은 연대기이다. 어린 소녀로 처음 만난, 아마도 다른 차원의 존재일 제니는 이벤의 영감처럼 쑥쑥 성장해 소멸되고 만다. 몽롱하고 아름답게만 추억되는 사랑의 시간, 짧지만 완벽했던 일치의 시간은 그림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시대적 혹은 작가의 개인적 한계인지 제니 또한 뮤즈로 포장되며 대상화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로버트 네이선은 모호하고 몽롱한 사랑의 연대기에 미학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중첩시킨다.

한 시기를 풍미한 이런 환상 로맨스들은 애조 띤 분위기로 인해 다수가 영화화되었다. <제니의 초상 Portrait of Jennie, William Dieterle, 1948> 외에도 비슷한 분위기의 <나의 청춘 마리안느 Marianne De Ma Jeunesse, Julien Duvivier, 1954> 등 모호한 로맨스가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수순처럼 오경아 작가가 그린 만화, 로버트 네이선의 소설, 1948년에 제작된 영화 순으로 찾아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만화와 소설에 비해 영화는 감흥이 좀 떨어졌다.)

나의 청춘 마리안느, 1954 (좌) 제니의 초상, 1948 (우)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의 설정은 상당 부분 <제니의 초상>에서 따왔다. 주인공 유훼미아와 이밀이 처음 만나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은  <제니의 초상> 속 제니와 이벤이 만나는 과정과 거의 유사하다. 운명적 사랑에 빠진 다른 차원의 연인, 비극이 예감되어도 예술적 영감으로 발현되는 사랑 역시 주요 모티브로 차용된다.

그러나 <제니의 초상>이 모호한 분위기로 예술가의 내밀한 고뇌와 집착을 묘사했다면 만화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는 시간 속에 박제되어 불멸을 얻게 되는 사랑을 우수 어리게 그리고 있다.





슬럼프에 빠진 젊은 화가 ‘이밀’은 공원에서 우연히 한 소녀를 알게 된다. 발랄하고 아름다운 ‘유훼미아’는 어딘가 좀 이상하다. 열댓 살의 어린 소녀로 처음 만난 이후 몇 달 뒤인 현재, 그녀는 사춘기 소녀이다. 입고 있는 옷도 나이에 맞춰 변하지만 모두 십수 년 전 의상이다. 언제나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달리듯 성장한다. 

습작으로 그려본 유훼미아의 초상으로 인해 이밀은 창작에 대한 열의를 회복해간다. 아니 창작열이라기 보단 잊고 있던 그리운 것에 다가가는 느낌이 든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유훼미아가 분명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존재임을, 그녀와 자신이 어떤 인연으로 묶여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유훼미아를 그린 스케치로 인해 이밀은 지역 유지 ‘케빈 캠블’에게 작품을 의뢰받는다. 캠블은 그림 속 소녀가 성인이 된 모습을 그려달라는 묘한 주문을 한다. 기이하고 찜찜하지만 이밀은 의뢰를 받아들인다. 자신이 그림의 모델이란 사실에 유훼미아는 마냥 즐거워한다.

이밀에게만 보이는 환상의 소녀 유훼미아.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부쩍 성장해있다.


얼마 후 그림에 관한 의논으로 캠블의 저택을 찾은 이밀은 역시 갑작스레 나타난 창백한 미소년에게 채찍질당한다. 유훼미아에게서 떨어지라며 독설을 내뱉는 그는 쌍둥이 오빠 ‘제롬’이다. 제롬 역시 유훼미아처럼 이밀에게만 나타나는 환상의 소년이다. 이 날 이후 이밀에게는 저택에 대한 기시감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르려 한다. 제롬이 나타난 이후 유훼미아는 이제 완전한 숙녀의 모습에 머무른다. 이밀과 유훼미아는 기억나지 않는 시간을 넘어 만나고자 했을 정도로 서로 깊이 사랑함을 깨닫는다.

이 사랑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해 이밀은 유훼미아에 대한 기록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완성된 그림을 받은 캠블은 이밀이 그린 초상이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촌 유훼미아임을 확신하고 괴로워한다. 젊은 시절 캠블이 사랑한 사촌 유훼미아는 근본모를 사생아 이밀과 사랑에 빠졌다. 고아인 줄 알았던 이밀이 유훼미아의 배다른 오빠임이 밝혀지자 캠블은 누명을 씌워 그를 쫓아낸다. 그러나 병약함에도 집착적으로 동생을 지키는 제롬에 의해 캠블은 끝내 유훼미아를 얻지 못한다. 다툼 끝에 캠블은 저택에 불을 내게 되고 이 사고로 유훼미아 남매가 사망한다.

캠블이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이밀을 살해하려 할 때 홀연히 나타난 유훼미아가 이밀을 대신해 총을 맞는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이 역할을 위해 존재했다는 듯, 이렇게나마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듯 유훼미아는 이밀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다시 한번 헤어지는 연인들 뒤로 제롬의 환영 또한 공허한 표정을 지은 채 사라진다.

알 수 없는 방화로 저택이 불타고 집주인 캠블이 사망한 사고로 도시가 시끄럽다.

전생의 연인 유훼미아를 기억해낸 이밀은 그 사랑을 품고 도시를 떠난다.





몇 년 뒤 발표된 단편 <비망의 겨울>은 이 작품의 프리퀄이다. 시간적 배경은 유훼미아와 사랑에 빠졌던 이밀의 전생, 1920년대로 유추된다. 자기 파괴적인 제롬의 집착과 그로 인한 외로움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밀과 강제로 헤어진 상태인 유훼미아는 본작 보다 날 서있고 냉랭하다.

과거의 순정만화사를 언급할 때 오경아 작가는 종종 마이너 한 작가군으로 묶이곤 한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데 매머드급 팬덤이 드러난 것은 아니라도 오경아 작가는 문학적 감수성과 독창적 작화로 지속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그럼에도 오경아의 작품이 마이너 하게 느껴진 이유 중 하나는 남자 주인공의 존재감이 흐릿해서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로맨스물은 남자 주인공의 매력을 간과하기 힘들다. 오경아 작가의 남자 주인공들은 여자 주인공들에 비해 존재감이 약하다. 이밀도 다소 기능적으로 쓰여선지 유훼미아의 감정에 잘 몰입되지 않는다. 때문에 오히려 제롬의 집착 쪽이 좀 더 개연성 있게 느껴진다.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상), 비망의 겨울 (하)


사랑에 빠진 우리는 영원을 꿈꾼다. 마지막 상대로 서있는 서로를 그려본다.

그러나 완벽에 가까운 맹세의 순간들은 너무도 짧고 대부분 그저 그런 이야기들로 마무리 짓게 된다. 유일함이 절대적이진 않다는 것을 씁쓸히 인정해야 한다.

사랑은 시간 속에 박제될 때 불멸을 얻는다.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또한 사랑의 영속성은 시간과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찰나의 조우로도 영원으로 간직될 사랑이 분명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의 순례 속 그 모습이 달처럼 차고 이지러진다 해도 끝내 서로를 찾아내고야 마는 단 한 번의 사랑이.

이 막연한 희망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로맨틱한 부분 아닐까?





@출처/

월간 르네상스,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오경아(서화, 1989.2-9)

청춘의 시간 1권, 비망의 겨울, 오경아 (대화, 1995)


제니의 초상, 로버트 네이선 (Portraitof Jennie, Robert Nathan, 1933)

제니의 초상 (문예출판사, 2004, 번역 이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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