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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r 22. 2017

왕녀를 위한 진혼곡, 자화상


때때로 성장한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똑같은 시기를 부여받지만 누구나 적절한 답을 제때 써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낙관과 불안함이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십 대에는 사소한 경험도 긴 잔상을 남긴다.



십 대들의 고딕 로맨스

영국 작가 루스 메이블 아더는 현실적 고민에 빠진 청소년이 일련의 환상 체험을 통해 성장하는 고딕 로맨스 풍 이야기들을 주로 발표했다. 그녀의 초기작 <브라우니 시리즈>는 아동 대상의 소프트한 동화들이지만 대상 연령대를 좀 더 높인 <A Candle in Her Room, 1966>의 히트 이후 이런 스타일이 굳어졌다.

작가는 그 자신이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성장하며 느꼈던 경외감이나 신비함을 이제 막 깨어나려는 예민한 자의식에 중첩시킨다. 언제나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되는 소설의 화자는 일련의 환상을 함께 체험하는 몰입감을 준다. 그녀의 주인공들이 모두 섬세한 ‘사춘기 소녀들’인 것은 필연일 것이다. 주요작의 주인공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저리 질 Margery Jean Gill이 일러스트를 그린 단행본들, 1966-1977


A Candle in Her Room, 1966

    오래되고 기괴한 인형으로 인해 오컬트적 모험을 겪은 후 가족애와 관용을 깨우쳐 가는 소녀 멜리사

Requiem for a Princess, 1967

    수 세기 전 고립된 에스파냐 왕녀에 관한 환상을 통해 양부모를 이해하고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소녀 윌로

Portrait of Margarita, 1968

    비행기 사고로 부모를 잃은 후 신비한 사건들을 통해 성장하는 소녀 마르가리타

The Whistiling Boy, 1969

    부모의 재혼으로 남매가 된 후 갈등 끝에 가족으로 성장하는 소녀 커스티와 소년 루이스

The Saracen Lamp, 1970

    14세기 프랑스 소녀 멜리산드의 결혼선물로 시작된, 사라센 램프를 통해  조망한 소녀들의 삶

The Little Dark Thorn, 1971

    싱글맘 밑에서 자라 친부모와 양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소녀 메리

The Autumn People, 1973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섬에서 유령과 사랑에 빠지는 소녀 로밀리

Candlemas Mystery, 1974 / After Candlemas, 1974

    아름답고 고적한 도싯 해안에서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소녀 해리엇과 브리트니

An Old Magic, 1977

    우연히 집시의 의식에 참석하게 된 소녀 한나의 성장기


밀른과 셰퍼드, 프로이슬러와 트립처럼 루스 메이블 아더 역시 일러스트레이터 마저리 진 질과 페어를 이뤘다. 1960년대 영국을 휩쓴 키친 싱크 리얼리즘에서 영향받은 마저리 질은 십 대를 나약하거나 무조건적인 보호 아래 둘 대상이 아닌, 스스로의 삶을 직시하는 독립적인 객체로 보는데 동의했다.




파름문고, 로맨스여 영원하라

루스 메이블 아더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인기가 높은 <왕녀를 위한 진혼곡>는 파름문고를 통해 처음 읽었다.

동광출판사의 파름문고는 당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던 ‘할리퀸 시리즈’를 벤치마킹 한 기획전집이다. 미국의 옐로 북을 위시한 유사 성인소설이 경쟁적으로 번안되는 가운데 파름문고는 대상 연령대를 청소년, 그중에서도 십 대 여학생으로 낮췄다. 그리고 철저히 로맨스와 베스트셀러라는 기준에 입각해 기존 작품을 번안하고 만화, 영화 가리지 않고 소설화했다. 마치 인기작들의 원전을 발굴한 것처럼, 해적판의 해적판을 양산해낸 것이다.

그럼에도 순문학처럼 정색하지 않는 말랑말랑한 로맨스들과 뜬금없긴 해도 예쁜 일본 순정만화 컷들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무엇보다 로맨스 그 자체에 집중한 점이 독자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었을 것이다.

이케다 리요코를 비롯한 일본 순정만화 이미지들이 내용과 무관하게 쓰였다.





피아니스트를 희망하는 소녀 ‘윌로’에겐 요즘 고민이 있다. 외동딸인 자신의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존중해주던 부모님이 어쩐지 그녀가 희망하는 진로를 탐탁지 않아하기 때문이다. 레벨업을 위한 새로운 실습곡 라벨의 파반느도 생각보다 손에 붙질 않는다. 설상가상 윌로는 클래스의 라이벌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암시받는다. 윌로가 입양된 아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윌로는 그간 미심쩍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입양된 것이 사실이라면 출신도 모를 자신을 이제까지 키워준 부모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피아노를 포기하고 싶진 않은데.. 혼자만의 고민에 시달리던 윌로는 스트레스성 심신 미약 상태가 되고 만다.


쇠약해진 윌로는 콘월의 고적한 호텔 펜리스로 요양을 떠난다. 바닷가를 낀 풍광만큼 아름다운 이 호텔은 수 세기 전 어느 영국 귀족의 저택을 개조한 곳이다. 저택에서 윌로는 한 소녀의 초상화에 사로잡힌다. 회청색 성장을 차려입은 이국적인 검은 머리 소녀는 아름답고 고귀해 보인다. 특히 윌로의 시선을 끈 것은 화려한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조잡한 목걸이다. 아마도 주석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목걸이는 백합을 문 돌고래가 부조되어 있다. 그림 속의 소녀는 그 어색한 장신구를 뽐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날 밤부터 윌로는 신비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영화처럼 교차편집되는 이자벨과 윌로의 고민은 사연은 다르지만 같은 깊이를 가진다.


꿈속에서 그녀는 ‘이자벨 데 칼벨라도스’라는 에스파냐의 왕녀이다. 전쟁 중 포로가 되지만 선량한 영국 귀족 트레실리안 가의 양녀로 입양되어 지극히 사랑받으며 성장한다. 그러나 타국, 그것도 국가 감정이 나쁜 에스파냐인이라는 사실과 여성이라는 제한적 삶에 이자벨은 고립감을 느낀다. 바닷가 주위를 산책하던 이자벨은 우연히 만난 사랑스러운 돌고래와 친구가 된다. 돌고래와의 잦은 교류에서 그녀는 해방감을 느낀다.

어느 날 양아버지를 따라 근처의 주석 작업장에 간 이자벨은 영국인 ‘리처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양녀이긴 해도 귀족가의 영애인 이자벨이 선택하기엔 터무니없는 하층 계급의 청년이다. 그러나 리처드는 이자벨의 외로움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유일한 이다. 성년이 되어 초상화를 그리게 된 이자벨은 애정의 징표로 그가 직접 조각한 주석 목걸이를 걸고 캔버스 앞에 선다.

내내 좋지 않던 영국과 에스파냐의 국가 감정은 다시 한번 전쟁으로 치닫고 이자벨을 향한 영국인들의 시선도 날로 험악해진다. 심지어 따르던 돌고래로 인해 이자벨은 마녀로 몰린다. 돌고래를 피신시키고 리처드와 도피하려던 이자벨은 거친 폭풍에 휘말려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이자벨의 행방이 묘연해진 후 윌로도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된다. 윌로는 꿈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었을 거란 확신과 더불어 이자벨의 후일담이 궁금해진다.

고립된 처지에 낙망하지 않고 소원하는 삶에 스스로를 던진 이자벨로 인해 윌로는 용기를 얻는다. 혈연을 떠나 애정을 확인한 윌로는 주체적인 삶을 위한 첫걸음으로 부모를 설득한다. 손에 붙지 않던 라벨의 무곡도 신기할 만큼 풍성한 감정이 담기게 된다.

누군가를 애도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담당 교사의 칭찬에 윌로는 조용히 읊조린다.


“네, 그래요. 그 왕녀님에 대한 진혼곡이에요.”






왕녀들

벨라스케스의 이미지를 차용하긴 했지만 윌로의 환상 속 이자벨은 무적함대 시기의 에스파냐 왕족으로 추정된다. 강대국으로서의 기틀을 공고히 하던 에스파냐 재해권을 넘어 영국 정복을 꾀했다. 이 정복전쟁은 필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기도 했다. 에스파냐의 야심은 해전에 능숙한 영국 해군에 의해 좌절되고 양국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루스 메이블 아더의 <왕녀를 위한 진혼곡, 1967>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 영국식 계급의식을 덧씌워 이자벨의 사랑을 불가항력적인 운명으로 만든다.

레퀴엠은 명칭대로 진혼곡이고 파반느는 느린 무곡이다. 작가는 파반느에 레퀴엠의 이미지를 중첩시켜 윌로와 이자벨의 시공을 초월한 연대를 은유한다. 꿈속에서 윌로는 관찰자가 아닌 이자벨 자신이다. 윌로는 이자벨의 고립감에서 자신을 보며 동화된다. 이자벨의 초상은 그녀 자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자벨과 윌로는 둘 다 나르시시스트적인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윌로는 혼란의 시간을 애도하고 의지가 되어준 환상을 배웅한다. 그리고 발돋움을 위한 준비를 다시 시작한다. 정말 씩씩한 소녀들이다.


제목에 내포된 애수 어린 정서 때문일까? 국내 작품 중에도 유사한 제목이 제법 있다.

유홍종의 단편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1985> 역시 판타지 로맨스의 외피를 쓴 환상소설이다. 관습으로 규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죽음도 불사하는 예술적 자의식이 몽롱하게 묘사된다.

재능 있는 작가 장이진은 우연히 가족이 부재한 어린 소녀 여란과 살게 된다. 자신은 황제를 찾아온 황녀이며 장이진이 황제일 것이라 주장하는 여란은 밤마다 플루트를 분다. (벌써 웃으면 안돼여..) 성장해 가던 여란이 유혹적인 뉘앙스를 비치지만 순수한 나 장이진은 끝내 참아낸다.(어휴) 몇 년 뒤 우연히 나타난 어머니를 따라 독일로 떠난 여란은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장이진을 찾아온다. 그녀와 함께 하는 일치에 가까운 몽롱한 하룻밤, 여란의 플루트 연주 속에 (잠깐만요! 아직 웃지마세여..!!) 장이진은 정신을 잃는다.

깨어난 장이진은 천재 작가의 자살기도..라는 기사를 통해 자신이 벨라돈나라는 이국의 독약으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졌음을 알게 된다. 최근까지 편지를 보내오던 여란은 희귀병으로 독일에 간 직후 죽었으며 자신과 밤을 보낸 여성은 여란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클라라 김이었다. 충격으로 사 년간 칩거하던 장이진은 이 일을 희곡으로 써 화려한 재기를 준비한다.

그런 그에게 편지가 한 통 도착한다. ‘선생님.. 저예요..’라고 시작되는. (..휴우 어쩌면 좋나요.)


대부분 먼저 떠올렸을 박민규의 장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2009>는 표지부터 벨라스케스의 이미지다.

<카스테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발간 당시 이 작품에 기대를 품었던 기억이 난다. 외모지상주의 세계 속 순수한 사랑을 의도했다.. 는 박민규의 소설은 끔찍하게 못생겼지만 엄청나게 지적이고 내면이 아름답단 단서가 붙은 여성과 무용함에도 구원으로 소멸된 남성이 주인공이다.


유홍종의 단편도, 박민규의 장편도 나름의 읽어 나가는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 모두 내게는 제목만 멋진 작품으로 남아있다. 두 편 다 도무지 서사에 몰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두 작품의 왕녀들이 ‘뮤즈’로 포장되었지만 철저히 남성의 시선에 맞춰 대상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표현에 있어 좀 더 우아한 로버트 네이선의 <제니의 초상> 속 제니처럼 말이다.

유홍종의 단편은 발표된 시기가 1980년대임을 고려하면 형식 자체는 신선한 편이다. 그러나 여란이 소비되는 방식이 소아성애가 포함된 유치한 대상화에 머무른다는 걸 축약만 읽어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홍종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박민규에 이르면.. 뭐 어쩌라는 건지 싶다.


루스 메이블 아더의 소설은 문학적으로는 시시한 틴에이지 로맨스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소녀들은 시대적 한계나 인습 속에서 있는 힘껏 발돋움한다. 때문에 비슷하게 아름다운 제목이지만 뮤즈의 명목으로 소비되어 실체가 사라진 그녀들 보다는 용기의 자화상이 되어준 이자벨이 먼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시한 사춘기 소녀적 감성이라 할지라도 단단하고 따뜻한 지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출처/

왕녀를 위한 진혼곡, 루스 메이블 아더 (Requiem for a Princess, Ruth Mabel Arthur, 1967, 일러스트 마저리 진 질 Margery Jean Gill)

파름문고 90, 왕녀를 위한 진혼곡 (동광출판사, 1985, 번역 문용수, 표지 일러스트 박래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예담, 2009)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유홍종, 1985

한국 소설의 얼굴 14,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푸른사상, 2006)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MBC, 1986)

http://blog.naver.com/a6pa3e3g/120138778539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199&cid=41708&categoryId=4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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