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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r 23. 2017

파름문고, 로맨스의 50가지 그림자


나이를 먹을수록 삶이나 로맨스에 품는 기대는 낮아진다. 수많은 오답들을 지나쳐 오며 체력만큼 기대치도 떨어진다. 관념적인 가치에 진지하고 구체적이며 낙관적이기까지 한 기대를 품는 나이는 십 대일 것이다.



불온한 즐거움, 미혹의 할리퀸

코믹스 이전 고전적 의미의 할리퀸 Harlequin은 다이아몬드 무늬 코스튬의 어릿광대이다. ‘악마스러운’이란 뜻과 동일시되었던 것처럼 비법이든 방해든 치명적인 제안을 할 것 같다.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 할리퀸은 ‘문고판 통속 로맨스’를 뜻했다. 이 시리즈의 자극적인 성애 묘사는 영미권 성인 대중소설들을 무차별 번안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도 영미권부터 아랍권까지 다양했는데 분야는 다르지만 ‘어쨌건 재벌이거나 피지컬 넘치는 스페셜리스트 미남이, 역시 분야는 다르지만 어쨌거나 매력 넘치고 스페셜리스트인 미녀와’ 사랑에 빠지곤 했다. 그림자를 50개씩 가진 미스터 그레이 이전부터 이들은 스크루볼 밀당 끝에 자극적인 애정행각을 벌이곤 했다.


동명의 할리퀸 소설을 만화화 한 <사랑의 아테네> (http://subculture.co.kr/comic/2973)

신일숙 작가의 데뷔작 <라이언의 왕녀>는 시대를 고려하면 페미니즘 함의가 다분한 놀라운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 <아르미안의 네 딸들>로 계승되며 파급력 높은 인기를 구축했다. 두 작품 사이에는 시간적 간극이 있는데 <아르미안의 네딸들>의 연재 기반이 될 인지도를 선사한 작품은 동명의 할리퀸 로맨스를 만화로 그린 <사랑의 아테네>였다.

자극적인 매력으로 폭풍 인기를 얻은 V. C. 앤드류스의 고딕풍 막장 로맨스 <다락방의 꽃들>, <오드리나> 같은 대중 장편들이 미스터리를 이용해 긴장된 서사를 추구했다면 할리퀸 시리즈는 언제나 로맨스의 팽팽함이 우선인 세계였다.

할리퀸 시리즈의 성공으로 유사 장르들이 과열 경쟁에 접어든 가운데 ‘동광출판사’는 약간은 다른 노선을 찾아낸다. 바로 해적판 만화를 소설화하거나 인기작의 속편을 멋대로 만들어낸 <파름문고> 시리즈다.




파름문고와 틴에이지 노벨

1980년대의 무수한 전집 중 파름문고는 외양만으로도 또렷하게 구분된다. 발행된 모든 권의 표지 일러스트는 박래후 화가의 작품이다. 박래후 화가의 시그니처인 모딜리니아풍 일러스트처럼 파름문고는 문고판이긴 해도 새하얀 바탕에 기름한 표지가 무척 세련되었다. 이런 일관된 브랜드 디자인 또한 저비용 고효율에 기준 두었던 것 아닐까 추측해 본다. 본문 일러스트는 내용과 무관하게 일본 순정만화 이미지가 무단 도용되었다.


‘로맨스’라는 키워드 아래 베스트셀러를 무차별 선별하다 보니 순문학과 대중문학, 영화와 만화, 성인물과 청소년 물 등 장르가 뒤죽박죽이다. 그래도 대충 나눠보면 큰 분류는 아래와 같다.


소설화된 일본 만화 :

    유리의 성, 나일강의 소녀, 내 사랑 마리벨, 사랑의 아랑훼스, 파라오의 무덤, 나일강의 소녀, 

     올훼스의 창, 베르사이유의 장미, 롯데롯데, 말괄량이 캔디 등

소설화된 인기 영화, 기존 소설 축약 :

    내 청춘 마리안느, 선생님께 사랑을, 폴과 비르니지, 부베의 연인, 천국의 열쇠, 안젤리크, 

    녹색의 장원, 양지바른 언덕의 소녀, 헤어질 때와 만날 때, 제제의 회상, 신부님에게 꽃다발을 등

기존 틴에지 로맨스 축약 :

    햇빛 찬란한 약속, 브라이튼 고교, 킹스턴 고교, 남녀공학, 하버드, 말괄량이 시리즈 등


상, 중, 하권으로 나뉜 작품도 제법 되었지만 원전을 온전히 싣기보다는 다이제스트 형식의 축약분이 많았다.

#카프리티나 님의 파름문고 개략 http://blog.daum.net/capritina/16




유령 작가들

일본문화개방 전 무차별 저작권 도용은 가상의 유령작가를 양산했다. <에이브 문고>처럼 사상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수록되거나 원전의 작가를 알 수 없는 경우에도 이들이 편리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무단 첨삭과 유령작가를 가장 애용한 기획전집은 파름문고일 것이다.

잘 알려진 것은 역시 <베르사이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의 원작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가 ‘마리 스테판드바이드’라는 정체불명의 필명으로 수록된 것이다. <어제의 세계>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를 대충 변형한 듯하다.

내용 역시 국내 정서에 맞춰 첨삭, 변형하다 보니 종종 종잡을 수 없는 전개가 펼쳐졌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아닌데 사망한 작가들의 속편이 나오거나 미완작의 완결판이 파름문고를 통해 다수 쏟아져 나왔다.

2차 창작이라 보기엔 표절이나 다름없는, 이를테면 출판사가 주도한 해적판의 해적판인 셈이다.

‘오늘의 세계 쥬니어 문제작 시리즈’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지금 보면 정말 문제 많은 기획 전집이다.

#197, 80년대 전집의 유령 작가들 https://brunch.co.kr/@flatb201/107

#에이브 문고의 번역자 필명 https://brunch.co.kr/@flatb201/103


그러나  V. C. 앤드류스의 소설이 소녀들의 길티 플레져였던 것처럼 파름문고에는 2차 창작물 특유의 쾌감으로 존재감을 다졌다. 순문학에 비해 짧은 분량, 집중적으로 묘사되는 로맨스, 할리퀸 시리즈보다는 낮은 수위지만 청소년 물로 보기엔 부적절한 성애 묘사 같은 불온한 즐거움이다. 촌스럽게도 국가적으로 금하던 청소년 이성교제에 대한 대리만족도 있었을 것이다. 또 내용과 상관없이 챕터마다 삽입된 일본 순정만화 컷들은 일단 눈이 즐거웠고 어쩐지 문학적으로 변주된 만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어떤 장르, 어떤 서사이건 소녀들이 로맨스를 싫어하기는 쉽지 않다. 허황한 소망조차 구체적으로 품는 때이니까. 그런 기대가 허락된 나이니까.

무수한 낙관과 희망을 꿈꾸어도 되는 소녀들에게 로맨스가 예외일리 없지 않은가?





@출처/ 파름문고, 오늘의 세계 쥬니어 문제작 시리즈 (동광출판사, 1981-1988, 커버 일러스트 박래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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