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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Nov 23. 2016

메르헨, 에이브, 에이스88, 동서문화사의 삼총사


모처럼 간 서점 구석에 버섯처럼 동글동글한 머리가 모여있었다. 자신의 책에 몰두한 어린이들을 오랜만에 봐선지 서로를 조용히 시키는 (그게 더 시끄럽거든ㅋㅋ) 귀여운 그룹에 자꾸 시선이 갔다.

지금의 어린이들이 나만큼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들에겐 어떤 작품이 ‘인생의 책’일까? 그들 세대의 마스터피스는 알 수 없지만 197, 80년대 전집을 읽고 자란 세대라면 <메르헨 Märchen>과 <에이브 ABE> 전집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두 전집을 발간한 ‘동서문화사’는 당시에도 개성적인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엉망진창 일서 중역으로 악명 높지만 <러브 크래프트 전집>, <빨간 머리 앤 전집> 같은 취향을 건드리는 야심 찬 기획물을 내놓았다. 천 권을 목표로 발간 중이라는 <동서 미스터리 북스> 역시 마니아 그룹이 조성되어 있다.

<메르헨>과 <에이브>는 이런 취향이 반영된 아동 대상 전집이다. 재정상의 문제로 ‘학원출판공사’, ‘학원출판사’로 발행처를 바꾸면서도 꾸준했던 스테디셀러이다. 가지고 있었든 빌려 읽었든 이 두 전집은 시간을 더할수록 기억 속에서 윤색을 거듭하며 사랑받고 있다. 두 전집의 명성이 지금도 공고한 것은 현재 기준으로 보아도 다양하고 독특한 작품 선별 때문이다.

과거 상당수의 아동문학전집은 저작권 협의와 비용절감을 이유로 20세기 전후의 작품들이나 기원이 불분명한 민화, 신화 위주로 구성되었다. 물론 오래된 고전들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온전히 어린이를 위한 판타지일 수는 없었다. 해적 출판물이긴 해도 <메르헨>과 <에이브>는 기존 전집과 중복되지 않는 다양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고색창연한 전집 스타일에서 벗어나 현대적 느낌의 브랜드를 구축했다.
그렇다고 한국형 타이틀을 완전히 포기하진 못했다. 편집자의 내적 갈등이 느껴지는 캐치프레이즈;;;


180페이지 전후 때론 300페이지에 가까운 단행본이었음에도 지역별, 장르별로 다양한 구성에 지루함 없이 후루룩 읽었다. 중역한 일서의 일본어 번역 자체가 높은 수준이었던 덕도 보았을 것이다. 전란 이후 민간 경제가 성장하자 양질의 양서에 대한 수요와 과시용 출판물에 대한 사회적 관심 또한 높았다.

동서문화사의 기획 전집들은 이런 우연이 맞아떨어진 가운데 차별화된 콘텐츠로 인기를 구가했다.


외관도 인기의 한 요인이었는데 세리프체가 난무하는 클래식한 전집 디자인에서 벗어나 (가난미가 사라진) 현대적인 느낌을 내는데 주력했다. 브랜드 디자인을 비교해보면 좀 더 확실하게 느껴질 것이다.

전집 로고의 경우 <메르헨>은 소프트하고 감성적인, <에이브>는 볼드하고 박진감 넘치는, <에이스88>은 샤프한 스타일을 채택했다. 기본적으로 알록달록한 컬러가 채택되는 아동전집의 관행을 깨고 지금 보아도 시크해 보이는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제목이 쓰여 있다. 볼드한 스타일의 제목은 2000년대가 되어서야 유행한 고딕 정체 스타일이다.

전집별 커버와 작품해설 페이지 (메르헨-에이브-에이스88순)




메르헨 전집

<메르헨> 전집은 명칭대로 몰캉몰캉하고 개성적인 아동 대상 판타지가 가득했다.

일서 전집 <새로운 세계의 동화 新しい世界の童話, 学習研究社>를 바탕으로 인기 단행본들을 선별 수집했기에 <중앙문화사 세계수상문학 전집>과도 여러 작품이 중복된다. 중앙문화사 전집이 원전의 작품 선별을 취했다면 메르헨 전집은 전반적인 북 디자인을 함께 차용했다.

#중앙문화사 소년소녀 세계수상문학전집 https://brunch.co.kr/@flatb201/51


하드커버를 넘기면 회전목마가 그려진 컬러 표제지가 등장한다. 빼어난 일러스트는 힘 있는 제목과 함께 두근두근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키우곤 했다.

원전의 일러스트를 그대로 수록하긴 했어도 커버와 표제지 외에 전면 컬러 도판은 없다. 하지만 전면 컬러를 선택할 수 있는 2도 분판 방식을 사용해 기존 흑백 본문들을 단색 컬러 본문으로 구현했다. 과거 출판물에 통상적으로 쓰이던 비용 절감 방식이지만 작은 디테일로 화사한 분위기를 돋우었다.


골고루 인기가 높았지만 아무래도 <초콜릿 공장의 비밀>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 <메르헨>을 통해 ‘로알드 달’을 처음 접한 이들 꽤 많을 것이다. <나는 임금님>, <아기곰 패딩튼>, <넨디의 크리스마스>, 호호 아줌마로 알려진 <작은 티스푼 아주머니>, 스테디셀러 <호첸플로츠 시리즈> 등은 어떤 어린이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서사와 일러스트가 가득해 되풀이해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압도적으로 좋아한 전집이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안이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온전히 어린 시절을 위한 최고의 전집이 아닐까 한다.




에이브 전집

<메르헨> 전집을 기대하고 집어 든 <에이브>는 어둡고 현실적인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에서도 여전히 인기 높은 <이와나미 소년문고 岩波少年文庫, 岩波書店>의 수록분을 기준으로 역시 출판사별 인기 단행본들이 선별 수집된 전집이다.

모든 아동 전집이 <메르헨>처럼 소프트할 필요는 없지만 <에이브> 전집에 선별된 작품들은 진지하다 못해 암울하다. 영미권 밖의 철학, 사상, 노동운동, 종교, 제3세계에 관한 작품들이 고르게 실려있다. 아동용으로 각색했다고는 하나 냉전시대임에도 공산권 작품들이 버젓이 실렸다. 이런 특징은 <에이브>의 편집진 대다수가 ‘운동권 출신’인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명칭조차 생경한 운동권은 정치상황과 대치한 금서들의 발원지였다. 당시 뜻있는 이들이 모여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문제작들을 고심 끝에 선별 후 번역했다고 한다. 때문에 <에이브>의 역자명은 상당수 가명이라고 한다. 선택된 원전의 판본들도 일본의 理論社, 福音館書店 같은 정통 출판사 판본이 다수이다.


한 종류의 기존 전집을 통째로 베낀 것이 아니었기에 <에이브>는 사회 의식면에서 일관적이면서도 독자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조금 더 나이가 들고서야 즐겨 읽은 현실이 반영된 문학의 개념을 알려준 전집이다.

여전히 좋아하는 <룰루와 끼끼>, <홀로 황야를 가다>, <큰 숲 작은 집>, <집 나간 아이>, <아이들만의 도시>, <작은 바이킹>, <북극의 개>, <막다른 집 1번지>, <조각배 송사리호>,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태양의 전사> 등, 오역과 각색에도 지금도 종종 되풀이해 읽어보게 된다.




에이스88 전집

<에이스88 ACE88> 전집은 이름부터 <에이브>의 후광을 이어가겠단 야심이 스며있다.

브랜드 디자인도 <에이브> 쪽에 더 가깝고 작품 선별 역시 진지하고 문학적인 작품들이 많다. <에이브>의 후광을 이어가려던 야심은 좌절되는데 이 역시 작품 선별 때문 아닐까 한다. 음울하게 정색하는 작품들이 다수 포진되었음에도 <에이브> 전집은 전체 구성에 있어 균형감 있는 선별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에이스88>은 특정 시리즈에 집중한다. <에이브> 전집처럼 <이와나미 소년문고 岩波少年文庫, 岩波書店>가 기준이긴 해도 훨씬 다양한 출판사 판본을 바탕으로 한다.

전체 오십 권 중 톨킨의 <반지원정대 (그렇다. 반지의 제왕)>가 여섯 권, 진 아우얼의 문화사 연작인 <에이라 시리즈 (대지의 아이들 연작)>가 여섯 권, 일린의 문화사 연작 <사람은 어떻게.. 시리즈 (인간의 역사 연작)>가 세 권이나 된다.

이 역시 인상적인 선별이긴 했지만 앞선 두 전집의 다양성을 기대하던 독자들의 취향에는 어필되지 못했던 것 같다. <에이스88>의 구성은 오히려 현재 더 주목을 받는다. 일서 중역에 아동 대상 모호한 각색의 압박에도 당시로선 흔치 않게 특정 취향을 목표로 한 연작 전체가 실려있기 때문이다. 판타지, 문화사 등 장르적 성격이 강했기에 좀 더 마니아적 인기를 구가한 전집이다.


때문에 <에이스 88> 전집의 단권 수록 작품들은 보통 인기 시리즈의 첫 번째 편이거나 축약분인 경우가 많았다. 초월 번역이긴 해도 멋진 타이틀인 <톰 깊은 밤 13시>, 미하엘 엔데의 <짐 크노프>와 <모모>, 모호한 각색과 초월 번역에도 공전의 히트를 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역시 인기 전집으로 재발간 된 <꼬마 니콜라>, <신부님 우리 신부님> 등이 손을 많이 탔던 것으로 기억한다.

<에이스88>의 88은 1988년도에 발행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참으로 직접적인 네이밍 센스.. 휴우..)




성인이 되어 취향이 고착된 후 과거의 책들에서 같은 농도의 감흥을 느낄 리 없다. 다시 펼쳐본 책들은 <메르헨> 보다 <에이브>의 작품들이 더 와닿는 나이가 되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저작권 도용과 초월 번역, 불분명한 편집진 등의 문제는 복간이 불가능한 실질적인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취향 자체가 없던 천편일률적인 과거의 양서 시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다양성을 자각하게 해 준 점이 이 전집들의 진짜 공로일 것이다.

그 최초의 선택을 기억하기에 모두들 전설의 절대반지를 이야기하듯 이 전집들을 그리워하는 것 아닐까?





@출처/

메르헨 전집, 총 55권 (동서문화사, 1982)

에이브 전집, 총 88권 (동서문화사, 1982)

에이스88 전집, 총 50권 (동서문화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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