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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Nov 30. 2016

여보셔요, 니콜라!, 친구의 조건


이제는 밤 속에 천 개의 눈 같은 별들과 우아한 달빛이 있음을 알지만 누구나 밤의 어둠을 두려워한 어린 시절이 있을 것이다. 각자의 상상이 만들어낸 모호함은 주로 공포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프랑스 창작동화 <여보셔요, 니콜라!>는 어린아이다운 두려움으로 인연이 닿은 특별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앙일보 세계아동문학상 수상작 전집>은 전체 구성이 열 권뿐이지만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창작동화로만 선별되어 있었다. <아카네 세계의 아동문학 あかね世界の児童文学, あかね書房> 전집 수록분을 기준으로 당시의 창작동화들을 선별한 이 전집은 열 권 이후 추가 발행이 불분명하다.

우연히 얻은 미니어처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활주 하는 생쥐의 모험담 <빨간 오토바이의 랄프 The Mouse and The Motorcycle, 1965>, 행복을 찾는 떠돌이 개 제이슨의 모험담 <주인 없는 개 Jason Nobody's Dog, 1970>, 어느 날 거인이 된 소년 <거인 앨릭스의 모험 The Giant Alexander, 1964>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이 전집에서 가장 좋아한 작품은 아무래도 <여보셔요, 니콜라! Allo! Allo! Nicolas!, 1971>이다. 현란한 모험은 없지만 그 자리에는 친숙하게 자라나는 일상의 순간들이 녹아 있다.


<여보셔요, 니콜라!>의 원전은 프랑스 아동문학 전집 <Rouge et Or Dauphine> 시리즈 수록분인 <Allo! Allo! Nicolas!, 1971>이다. 중앙일보 판본은 프랑스 원전을 바탕으로 한 아카네 전집의 <もしもし ニコラ!, あかね書房, 1975>를 중역했다.

중앙일보 판본의 번역가는 아동문학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 철학자 민병산이다. 서예가로 더 유명한 그는 만석꾼 집안의 장손이었지만 집안의 친일행각을 수치스러워해 가출 후 평생을 독신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신념이 그에게 준 것은 동료 문인들의 도움으로 일서 중역을 받아 곤궁함을 이어나가는 아이러니한 노년이었지만 그는 끝내 궁핍한 죽음을 고수한다.


‘여보셔요’는 현재 맞춤법에 따르면 ‘여보세요’가 맞다. 중앙일보 판본 절판 후 이 작품은 딱 한번 재발간 된다. 아마도 많이들 익숙할 금성출판사의 <신세계 창작동화 은하수 시리즈> 수록분이다. 이 판본 역시 초판본에는 ‘여보셔요’로 표기된 제목이 재판을 거치며 개정된 맞춤법에 따라 ‘여보세요’로 바뀌어 수집가들이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 작품의 절판본을 찾다 가장 빈번히 만난 것도 신세계 판본이었는데 이후 완역본은 없는 것으로 안다.

원전 1971, 중앙일보 1979, 금성출판사 1986


처음 이 작품을 읽은 판본이기도 하지만 굳이 중앙일보 판본을 찾아 헤맨 건 일러스트 때문이다. 표지 외에는 별도의 컬러링 없이 라인 드로잉으로만 그려진 이 판본은 지금 보아도 그래피티하고 미니멀하다. 감각적인 화풍에 당연히 외국 원전을 무단 게재했을 것이라 추측했는데 실물 책을 구하고 보니 ‘이면희’라는 국내 작가명이 표기되어 있었다. 당대에 이렇게 현대적 감각의 국내 창작자가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무척 궁금했다. 이유는 이 작가가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저작권 관리가 엉망이던 과거 출판시장에선 무단 게재하거나 원작자가 불분명할 경우 역자나 삽화가에 가상의 인물명을 붙여 출판하는 일이 빈번했다. 동일한 전집의 다른 작품 <거인 앨릭스의 모험 The Giant Alexander, Frank Herrmann, 1964> 일러스트도 이면희 작가가 그린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작품의 원전을 그린 이는 조지 힘 George Him이다.

커버 あかね書房 개정판 2005(좌), 중앙일보 1979(우)
일서(좌)를 중역한 중앙일보 초판본의 일러스트(우)는 일서 못지않게 유니크한 스타일이다. 구도로 보면 한쪽은 모사가 분명한데 어느 쪽이 원전인지, 작가명도 알 수 없어 아쉽다.

중앙일보 판본의 일러스트가 일서와 프랑스 원전 중 어느 쪽을 모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중역분이니 일서 쪽을 모사했을 확률이 크긴 해도 아카네 전집의 상당수가 원전의 일러스트를 싣거나 일본 자국 작가들의 모사분을 싣고 있다. 앞서 말한 <거인 앨릭스의 모험>이나 동 전집의 <겁장이 타잔>이 대표적이다. 어느 쪽이든 국내 절판본을 찾는 독자들에겐 중앙일보 판본의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가 각인되어있다.

시간차를 두고 발간된 신세계 판본의 경우 저작권 때문에 이 모사작마저 배제한 것으로 보인다. 금성출판사의 다른 전집과 마찬가지로 원전의 기본 구도와 데생을 상이한 스타일로 모사했다. 나름 경쾌한 분위기의 파스텔톤 일러스트들이지만 중앙일보 판본의 감각적인 이미지들과 대조해보면 역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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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사는 소녀 ‘리즈’는 맞벌이하는 부모의 부재로 혼자 잠자리에 드는 일이 많다. 어느 날, 밤의 어둠이 주는 두려움을 떨치고자 무작위로 돌린 전화를 받은 이는 노르망디에 사는 소년 ‘니콜라’이다. 우연한 통화로 호감을 가지게 된 둘은 이후로도 정기적으로 전화를 주고받으며 친해진다. 리즈는 도시의 활달함을, 니콜라는 자연이 주는 생동감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 간다. 니콜라는 리즈에게 ‘생트루루*’라는 애칭까지 붙이며 통화하는 시간을 기다린다. (*La Chandeleur, 봄이 오는 것을 기뻐하는 축제. 생트루루는 샹들뢰흐의 당시 외래어 표기법이다.)

니콜라로 인해 한층 활기 있어진 리즈는 또 한 명의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 바로 리즈가 사는 건물 꼭대기 층의 ‘클라리스 할머니’이다. 가족도 없이 전기도 들지 않는 남루한 방에서 살면서도 명랑하고 다정한 할머니와 리즈는 친해진다.


상상 속의 친구는 필연적으로 현실의 만남을 기대하게 하는 법, 부활절 휴일이 다가오자 니콜라는 리즈를 노르망디로 초대한다. 만남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리즈는 여비를 모으기 시작한다. 리즈를 만나고픈 마음이 한층 강해진 니콜라는 기르던 토끼까지 팔아 여비에 보태려 한다.

그런데 원래도 건강치 못했던 클라리스 할머니가 노환으로 쓰러진다.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리즈는 니콜라네 빈 농가를 기억해낸다. 할머니의 가난한 사정을 알고 있는 리즈는 니콜라까지 설득해 자신이 모아 온 여비를 양보한다. 서운하지만 만남을 미루는 두 어린이 덕에 할머니는 무사히 노르망디로 떠난다.

기대했던 니콜라와의 만남도 무산되고 예년과 다름없을 줄 알았던 부활절 휴가에 리즈는 뜻밖의 선물을 받는다. 두 어린이의 따뜻한 마음을 흐뭇하게 여긴 리즈의 부모가 니콜라네 집에 보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긴 기차 여행 끝, 상상 속의 풍경들이 하나씩 컬러와 질감을 가질 때마다 리즈의 마음은 두근거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는 눈부신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보인다.





교사 출신의 작가 쟈닌 샤르도네는 주체로서의 어린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리즈는 독립적인 가족 구성원으로서 분주하다. 리즈의 아빠도 일상의 가사노동에 당연하게 동참한다. 각자의 환경 차이에서 오는 호기심, 지리적 거리가 주는 애틋함은 리즈와 니콜라의 감정을 밀도 있게 쌓아 몰입시킨다.

도시 소녀와 농촌 소년의 분홍분홍한 만남으로만 읽어나가기엔 진지한 사회의식도 다수 반영되어 있다.

당시 프랑스의 도시개발 정책에 따른 이농현상 (극 중 니콜라네 농가가 비게 된 이유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 확장에 따른 육아와 가사노동의 고충, 고령화 사회 진입으로 인한 독거노인 증가와 복지문제 등이 그려진다.

얼핏 딱딱한 사회적 현상들은 두 어린이가 만나는 동기로 활용된다. 물론 모든 등장인물이 선하기만 한 동화적 서사라는 약점이 있긴 하다.


또 이 작품에는 ‘직업의 평등함’이 또렷하다.

리즈의 아빠는 빌딩의 야간 경비원이고 엄마는 야간근무가 잦은 간호사이다. 리즈의 이웃 중 화이트 칼라의 직업군이 아닌 이들도 모두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 자동차 스티커조차 ‘미래의 판, 검사가 타고 있다’ 운운하고 전 세대의 소망이 된 공무원을 떠올려보면 이 작품 속 평범한 직업 소명의식은 되려 생경하다.


니콜라는 상상 속의 리즈에게 ‘생트루루’라는 애칭을 붙여준다. (이 역시 대상화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삐뚤어진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 축제가 생각나는 친구라니! 닉네임부터 기쁨이 넘친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만 해도 무작위 전화로 맺어진 우정은 ‘비행기 옆자리 미남’만큼 막연한 로망이었다. 미디어의 발달은 기적 같은 확률의 우정을 스치고 지나도 좋을 ‘랜선 우정’으로 발전시켰다.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에서 우리는 각자의 니콜라를 만나고 있다. SNS시대를 사는 우리는 실물 친구만이 진정성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오래된 친구만큼 좋은 것은 없다지만 이제 우정의 척도에 있어 시간의 너비와 지리적 친밀감은 절대적이지 않다. 세계는 넓고 우리는 더 많은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천 개의 눈 같은 별을 품고 있다 해도 소망을 보내는 것은 내 시선이 닿는 별이다. 서로의 좋은 날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그들을, 우리를 ‘친구’로 분류되게 하는 조건일 것이다.





@출처/ 

여보셔요 니콜라, 쟈닌 샤르도네 (Rouge et Or Dauphine 291/412; Allo! Allo! Nicolas!, Janine Chardonnet, 1971, 일러스트 Michèle Le Bas)

あかね 世界の児童文学 6, もしもし ニコラ! (あかね書房, 1975, 번역 미나미모토 치카 南本史, 일러스트 오토모토 사츠코 岡本颯子)

세계 아동문학상 수상작 전집 5, 여보셔요, 니콜라! (중앙일보•동양방송, 1979, 번역 민병산, 일러스트 이면희)

신세계 창작동화 은하수 시리즈 30, 여보셔요, 니콜라 (금성출판사, 1986, 번역 배기열, 일러스트 최병선)


밤은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프란시스 버딜론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Francis William Bourdillon,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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