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The Songs 연작
현재 김진 작가의 대표작은 아무래도 <바람의 나라> 일 것이다. 이 작품 속에 교차하는 상실과 그리움, 회한의 바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불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김진의 대표작들은 시기상의 대표작일 뿐 시간을 거듭하며 갱신되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외피를 쓰고 관통하는 일관적인 정서가 ‘바람’이란 시그니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림자 연대기 https://brunch.co.kr/@flatb201/14
#1815, 권별 요약 https://brunch.co.kr/@flatb201/104
#1815,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https://brunch.co.kr/@flatb201/105
#바람 숲의 헤리에타, 그때 바람이 속삭여주었다 https://brunch.co.kr/@flatb201/111
그 최초의 바람은 <바람의 나라>가 아닌 <The Songs> 시리즈를 꼽아야 할 것이다. 발표된 지 거진 삼십여 년이 되어감에도 조밀한 구성이 주는 감흥은 처음 읽을 때와 많이 다르지 않다. 작가가 열일곱 살 때 처음 구상했다는 이 연작에는 김진 작가 특유의 장기를 확인할 수 있다.
시리즈의 기원이 될 <1815>는 전쟁을 통해 붕괴되어버린 가정과 개인의 상실을 집요하게 관찰한다. 이런 시도는 해피엔딩이 약속된 연인들의 서사가 압도적이던 순정만화의 세계에서 신선을 넘어 생소한 것이었다.
주인공들의 내면을 따라 밀도 있게 쌓이는 서사는 더욱 큰 폭발력을 보인다. 또 주변인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조차 페이지를 부여받아 자신의 이야기를 펼침으로써 주인공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화풍에 있어서도 첫 번째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는데 이 작품 이전 김진의 작화는 다소 과도기 상태였다. <1815>에 이르러 고착된 개성 넘치는 화풍은 현재의 화풍으로 발전될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프린스에서 발행된 열네 권짜리 초판의 아련한 회화 풍 표지는 지금 보아도 무척 아름답다. 특히 1권과 마지막 권은 서사상으로도 댓구를 이루는데 사빈의 보호 아래 있던 지그문트가 그 자리를 이어나갈 것으로 완결된다.
#프린스판 표지는 권별 요약 참고 https://brunch.co.kr/@flatb201/104
1990년대 중반에 재발간 된 대화판 표지들은 월간지 등에 발표한 일러스트를 모아 표지로 활용했다. 의미면에서 항상 프린스판에 마음 가지만 대화판도 일러스트가 무척 아름답다. 김진의 화풍이 절정에 오른 1990년대 중반에 재발간 되었기에 당시 작가의 관심사였던 아르누보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작품의 제목은 ‘1815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복권한 나폴레옹에 의해 전쟁이 재개된 해이다. 극복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되풀이되는 절망을 메타포화 한 제목이다.
대혁명 이후 어느 때보다 공고한 권력을 과시한 프랑스였지만 프로이센의 육군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극 중 ‘라인하르트 가’는 프로이센 명문가 중에서도 군벌 귀족 가문으로 설정되어 있다. 탈영으로 사살당한 루드비히의 죽음이 개인적인 상처를 넘어 가족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이유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사살당한 루드비히는 내내 플래시백으로 등장해 질문 던진다. 대의는 언제나 개인의 희생보다 우선하는가, 불안정한 명제 앞에 생존 외의 일상은 당위성을 얻지 못하는가, 남겨진 이들이 어떤 상처 속에 무릎 꺾이고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를.
작품이 시작되는 1813년, 나폴레옹은 두 번째로 시도한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다. 프랑스군의 위세가 꺾이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주변국들은 대프랑스 동맹군을 결성한다. 삼일 간의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첫날 나폴레옹은 건재해 보인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부터 열세에 밀려 패착하고 엘바 섬에 유배된다. 극 중 루드비히가 탈주하다 사살당한 전투가 이 라이프치히 전투의 첫 번째 날이다.
지칠 줄 모르는 근성과 아집의 나폴레옹은 1814년 엘바 섬을 탈출해 다시 정권을 잡는다. 사빈은 이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워털루 전투에서 전사한다.
나폴레옹의 복권은 길지 않았고 패전 후 유배된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생을 다한다. 전쟁이란 언제나 무의미하지만 작가는 제국 간 패권다툼 속 허무한 죽음을 바라본다. 스스로의 품위와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 이들을 복기한다.
라히프치히 전투의 루드비히의 죽음이 가족에게 상실을 안겼다면 워털루 전투의 사빈은 죽음으로써 이 상실을 상쇄하려 한다. 그러나 오욕을 남긴 루드비히도, 명예를 남긴 사빈도 남은 이들에게는 똑같이 두고두고 시린 아픔일 뿐이다.
작품 속 부제와 함께 표기되었던 ‘가계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The Songs> 시리즈는 연작으로 구성되었다. 집필순으로는 전체 연작 중 6부에 해당되는 <가브리엘의 숲>이 가장 먼저 발표되었지만 연대순으로 따지면 이 작품의 서사는 <1815>로부터 시작된다. 작가가 당초 구상한 연대별 부제는 아래와 같다
The Songs 1813-1994
1. 1815
2. 운디네
3. 아일랜드인의 기도 (아마도 아르미난테와 대니, 돈 멜든의 서사가 아닐까?)
4. 레이베트의 연인들 (아마도 아렐리오와 피오리나의 서사가 아닐까?)
5. 리히테르펠데..그 청춘의 성 (아마도 지그문트의 서사가 아닐까?)
6. 가브리엘의 숲 I. II (II는 전작을 이어 아그네사와 매튜의 후손들 서사가 아닐까?)
7. 베를린 1944
8. 샤롬... 샤롬...
9. 엔나의 뜨락
<가브리엘의 숲> 완간 후 김진 작가는 이 시리즈를 중단한다. 십여 년이 지나 <월간 르네상스>에 <바람 숲의 헤리에타>가 발표되긴 했다. 그러나 지그문트의 첫사랑에 관한 이 아련한 외전은 팬서비스성 단편일 뿐 시리즈를 재개한 것은 아니었다.
<The Songs> 연작이 중단된 이유는 당시 장르별로 왕성하게 뻗어나간 작가의 창작활동과 시대성 때문이다. 작가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당초 불특정 국가를 상대로 한 구상들이 애초의 의도와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씨네21 인터뷰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5225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실제 역사의 유기성을 고려하면 타당한 결정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실려있는 부제들은 볼 때마다 아쉽고 아쉽다. 절판도 아닌 작가의 머릿속에서 소멸되었기에 막연한 상상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출처/
…1815, 김진
…1815, The Songs (프린스, 1988)
…1815, The Songs (대화, 1995)
그녀에게 말하다, 김혜리 (씨네21,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