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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Nov 24. 2015

김진, 그림자 연대기


김진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그 시작이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이케다 리요코 풍의 화사한 작품들 사이에서 무심히 뽑아 든 후 다른 작품들을 찾아 헤매던 시간. 새벽시간에 편성된 드라마처럼 한적한 내러티브. 느린 호흡의 전개에 당혹해하다 불시에 무릎이 꺾이며 맞이하게 되는 먹먹함. 무엇보다 이런 선호도라면 다음 권이 대여소에 안 들어오겠는데.. 하는 조바심. (휴우..)

폐간과 미완 사이를 부유하던 김진 작가의 대본소 시절 작품은 발매 당시에도 찾아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때문에 성인이 된 후 이 작가의 팬덤이 이렇게 컸나.. 약간 어리둥절했더랬다.


스크루볼 로맨스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에서 김진은 언제나 개인이 안고 있는 그림자를 응시해왔다. 

냉소하고 회의하지만 스스로의 품위를 저버리지 않으려 애쓰고, 절망하지만 작은 상냥함을 잃지 않으려 하는 인물들. 주인공 또한 모든 상황이 이해받는 히로인이라기보다는 종종 각각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찰자로 세워진다. 그래서 더욱 쓸쓸한 서사는 우리의 한 시기를 내내 흔들었다.

흐릿해 보이는 인물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구원해 줄 수는 없어도 내가 이해한다’고, ‘너의 그 순간을 증언한다’고 우직하게 말한다.

전체주의의 피로 속에 매몰된 우리가 무력하지만 순도 높은 이 위로 앞에서 어떻게 태연할 수 있을까.


워털루전을 통해 비극적 가족사를 그린 <1815>
고구려사 재해석에 가족주의로 인한 폭력을 중첩시킨 <바람의 나라>


열렬한 추천으로 김진의 작품을 본 사람들 중엔 과거작들이 과대평가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대의 참신한 시도나 질문이 오랜 시간이 지나 클리셰가 되고 마는 시대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져온 일련의 작가들 중에서도 김진이 높은 완성도로 국내 만화의 스펙트럼 넓히는데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줄어든 장르 시도, 연재작의 지난한 전개, 종종 망가지는 데생은 팬심으로도 울적해질 때가 있긴 하다. 그렇지만 이런 항목 또한 작가의 작품 외 상황을 모르는 독자 입장에선 섣불리 재단할 수 없다. 동어반복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집요한 사색은 얄팍한 감상만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815>, <바람의 나라>, <레모네이드처럼> 등 몇 개의 그룹이 있지만 나는 이 모든 작품이 시기상의 대표작일 뿐 김진의 대표작은 계속 갱신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뒤늦은 시기가 아닌 이 작가의 작품과 함께 나이 먹을 수 있던 작은 행운에 감사한다.





@출처/ ..1815, 바람의 나라, 김진

..1815 (프린스, 1988)

바람의 나라 (육영재단,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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