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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un 22. 2016

비 공주,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출근길이나 고대하던 여행지에서 내리는 비가 반갑지는 않다. 그럼에도 비 오는 날엔 매번 감상적이게 된다. 술렁대는 구름의 예고편을 지나 뿌려지는 빗소리에는 언제나 마음이 먼저 공명한다.

연초록 나뭇잎 사이로 레이스 커튼처럼 날리는 빗자락에 슈토름의 동화 <비 공주>가 떠오른다.


<호수 Immensee, 1849>로 유명한 테오도르 슈토름은 낭만적 정서의 사실주의 작가이다. 그가 집필한 다수의 동화도 민속 소재를 바탕으로 한 환상과 애수를 그리고 있다. 슈토름에 대한 일본 문학 시장의 선호도는 아동문학 전집에도 반영되었고 중역이 큰 부분을 차지하던 197, 80년대 국내 아동문학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 고전 민화를 재구성 한 <비 공주>를 처음 읽은 것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잡지에 실렸던 편집본이었다. 이 동화를 기억한다면 대부분 금성출판사에서 발행된 <칼라 텔레비젼 세계교육동화전집>을 떠올릴 것이다. 원전 <올 컬러판 세계의 동화 オールカラー版 世界の童話, 小学館> 일러스트가 그대로 실린 화려한 판본이다. 아동용으로 각색되었음에도 리듬감 넘치는 문장 또한 비교적 충실히 옮겨져 있다.


소학관 원전의 일러스트를 그린 안노 미쓰마사는 동화적 분위기로 인기 높은 일본 대표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중부 유럽의 풍광을 섬세한 선묘와 담백한 수채화로 조밀하게 구현한 <여행 그림책> 시리즈는 일본의 유구한 유럽 동경과 맞물려 큰 반향을 얻었고 유사작이 유행했다. <비 공주>는 커리어 중반기에 작업한 메르헨 계열의 작품으로 전작에서 보여준 유려한 풍광과 빈티지한 색감이 슈토름 작품의 환상성을 고조시킨다.

小学館, 1967 / 금성 칼라 텔레비젼, 1978 / 금성 원색 텔레비젼, 1987


안노 미쓰마사의 화려한 일러스트는 금성 전집의 1978년 판본까지 유지되다 개정을 거치며 국내 작가들의 일러스트로 대체된다. 여덟 권으로 시작된 <칼라 텔레비젼 세계교육동화전집>은 인기에 따라 개정을 거듭하며 열여섯 권으로 재편집되었다. 들쑥날쑥 선별되던 수록작은 문고판 동화들과 함께 묶여 1980년대 개정판 <금성 원색 텔레비전 세계 교육동화 전집>이 발간된다. 일러스트 또한 국내 작가들이 새로 그렸는데 원전의 분위기를 의식해선지 구도까지 그대로 모사했다. 산뜻한 컬러와 아기자기하고 경쾌한 분위기의 판본이지만 원전의 화려함을 기억한다면 아무래도 아쉽다.

1978년 판 수록분, 안노 미쓰마사 / 1987년 판 수록분, 이규경




오랜 가뭄으로 물이 귀해지고 온 마을과 목초지가 타들어 간다.

슈티네 부인은 이웃의 부자 농부에게 ‘비 공주’가 잠들어 가뭄이 계속된다고 한탄 중이다. 허무맹랑한 전설이라 일축한 농부는 비를 내려줄 요정이 정말 있다면 자신의 딸과 부인의 아들 ‘안드레아스’를 결혼시키겠다고 한다. 안드레아스와 연인이던 농부의 딸 ‘마렌’은 그 약속을 다짐받고 여정을 준비한다.


마침 그날 아침 안드레아스는 ‘불 난쟁이’가 주문을 외우며 춤추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했었다.

비 공주가 잠든 사이 교활하고 포악한 불 난쟁이는 신명 나게 벌판을 불태우며 가뭄을 뿌려대고 있었다. 기지를 발휘해 비 공주가 잠든 곳을 알아낸 안드레아스는 마렌과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

연인은 신비한 꿀술로 목을 축이며 불덩이 같은 땅, 버드나무 속 길고 긴 계단, 위태롭게 허물어진 제방을 지나 지하로 지하로 끝없이 내려간다. 그러나 심연과 같은 마지막 관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마렌뿐이다. 순수한 처녀만이 비 공주를 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인간들의 정성이 쌓인 축원에 비 공주는 축복 같은 비를 내리곤 했다. 그러나 풍요 속에 나태해진 인간들이 비 또한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축원도 중지됐다. 지루해진 비 공주는 깊이 잠들었던 것이다.

두려움을 딛고 마렌은 비 공주를 깨우는 데 성공한다. 깨어난 비 공주는 마렌과 함께 아름다운 비구름을 만든다. 연인은 비 공주의 배웅을 받으며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마렌과 안드레아스의 결혼식 날, 아름다운 비구름 한 조각이 그들을 따라온다.

안드레아스가 마렌에게 속삭였다.


“나의 아름다운 비 공주님, 마렌.”




슈토름의 동화집 <세 편의 동화>에는 <비 공주>의 원전인 <레겐투르데>, 의미도 자비도 없이 연명에 급급한 삶을 괴담의 형식으로 공포스럽게 묘사한 <불레만의 집>, 환상을 통해 발현되는 원초적 모성애를 그린 <키프리아누스의 거울>이 함께 실려있다.

앞서 말했듯 슈토름은 동화의 형식을 차용한 상징에 관심 많았다. <세 편의 동화>에 따르면 <비 공주>는 등장인물의 명칭부터 각자의 역할이 부여된다. 우선 ‘비 공주 Regentrude’는 명칭대로 비의 정령으로 생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포이어만 Feuermann’은 불의 남자란 뜻으로 대척점에 있다.

공물 교류가 끊어진 후 잠든 비 공주는 물질주의에 무너진 자연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가뭄을 극복해 내는 힘도 인간 내부의 원초적 선의에 있음이 그려진다. 다소 안이하지만 <키프리아누스의 거울> 속 늙은 유모의 말처럼 ‘자연의 힘은 바른 사람들에게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정서가 일관되게 묘사된다.


슈토름은 마렌과 비 공주의 관계를 잉태의 생물학적 주체인 원초적 여성성에 두었다. 그런데 이런 신화적 모성에 관한 상징들은 슈토름의 의도와 달리 뜻밖에 여성주의를 비친다.

비 공주를 깨울 수 있는 이가 오직 ‘여성’이라는 것,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한 일이 다른 세계-다음 세대의 여성과 갖가지 아름다운 비구름을 만드는 점이 특히 그렇다. 연대로 인해 각성한 다음 세대의 여성은 고난을 타개하는 것을 넘어 새롭고 아름다운 갖가지 비구름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연대로 인해 각성한 다음 세대의 여성은 새롭고 아름다운 갖가지 비구름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슈토름이 의도한 대자연 어머니-이성애에 기반한 모성을 완결 짓는 존재는 당연히 남성이다. 때문에 이 동화도 결국 로맨틱함으로 포장된 결혼으로 귀결된다. 특히 금성 칼라 텔레비젼 전집의 경우 원작의 주체가 뒤바뀐다. 낭만적으로 기억되는 안드레아스의 속삭임은 원작에선 마렌의 대사다. 아동용으로 각색되면서 오역된 것인가 싶던 이 마지막 대사는 소학관 판본에서도 마렌이 주체였다.

안드레아스가 비구름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건 모험의 대등한 조력자였기 때문이다. 모험의 주체가 당연히 소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여성에게 완결된 행복은 결혼이라 주입하려던 건지 전사에도 불구하고 국내 판본에선 안드레아스가 이야기를 완결시킨다.

1978년 판 <칼라 텔레비젼 세계교육동화> 수록분 초월 번역


가부장제 빵빵한 초월 번역에도 불구하고 비구름의 축복과 연대는 방향이 또렷하다. 불확실성에도 모험을 시도하고 두려움을 안은 채 어둠 속을 홀로 또박또박 걸어간 마렌의 용기가 비구름을 완성시켰다. 마렌의 조력으로 회생하게 된 비구름은 내내 그녀의 앞날을 축복하고 지지한다.

비구름을 만들어 본 기억은 또 다른 마렌에게 전해지며 아름다운 시도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녀들의 연대와 비밀로 만들어낸 비구름은 어느 때보다 달디 단 빗줄기를 내릴 것이다.





@출처/ 레겐투르데, 테오도르 슈토름 (Die Regentrude, Theodor Storm, 1863)

オールカラー版 世界の童話 49 ドイツのお話, あめひめさま (小学館, 1967, 번역 쿠보무라 메구미 久保村恵, 일러스트 안노 미쓰마사 安野光雅)

금성 어린이 교육 칼라 텔레비젼 세계교육동화 12 독일 동화, 비 공주 (금성출판사, 1978, 번역 쿠보무라 메구미 久保村恵, 일러스트 안노 미쓰마사 安野光雅)

금성 원색 텔레비전 세계교육동화 27, 비 공주 (금성출판사, 1987, 번역 송혁, 일러스트 이규경)

세 편의 동화, 레겐투르데 (부북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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