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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un 15. 2016

돌이와 코끼리, 운동장 위의 시간


자각하지 못할 뿐 우리들의 가장 내밀하고 연약한 감정은 어린 시절에 스쳐간다.

우연히 마주한 대기나 공간은 시간 속에 깊이 잠겨있던 기억들을 소환한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들을 복기하거나 여전히 생생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결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떠나버린 누군가의 기억 없이도 ‘방과 후 운동장’이란 언제나 조금 쓸쓸하고 다른 시간대로 들어선 감상을 준다. <돌이와 코끼리>는 이 시간대에 관한 짧고 귀여운 창작동화이다. 이 작품이 수록된 아동 일러스트 잡지 <월간 꿈나라>는 국내 창작동화의 고정 지면을 운영했다. 김천정, 이우경, 방영신, 김복태 등 몇 명의 작가가 돌아가며 작품을 실었다. 8페이지 내외의 짧은 지면이지만 요약된 일부만 실리던 외국 동화와 달리 온전한 기승전결의 창작물이 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달의 편집, 월간 꿈나라 https://brunch.co.kr/@flatb201/13


그중에서도 이우경 작가는 꽤 오랜 기간 국내 신문과 성인용 삽화를 독점하다시피 한 작가 중 하나였다. 모딜리아니 풍의 기름한 얼굴, 거친 스케치 풍의 인물과 그리다 만 듯 함축적인 배경들. 이우경의 독특한 화풍을 의식하게 된 건 계몽사 문고의 삽화 때문이었다. 루이제 린저의 데뷔작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 때 Die Glasernen Ringe, Luise Rinser, 1940>을 처음 읽은 것은 <유리 반지>라는 초월 제목으로 바뀐 <계몽사 문고 120> 수록분이었다. 린저의 이 아름다운 데뷔작을 너무나 좋아했던 나는 내내 이우경 작가의 일러스트로 이 작품을 기억해왔다. 계몽사 문고 120 전집은 표지 외엔 컬러 페이지가 없었기에 기억 속 이우경의 작품은 언제나 스케치 같은 흑백 삽화들이었다. 때문에 풀 컬러로 그려진 창작동화에서 이우경의 이름을 확인하곤 탁월한 컬러링에 깜짝 놀랐었다.

계몽사 문고 120, <유리 반지>




비가 올 것처럼 잔뜩 흐려선지 아무도 없는 놀이터의 운동장, 돌이는 텅 빈 운동장 가득 코끼리 하나를 그린다. 정글짐에서 내려다보는 코끼리는 잘생겼다.

돌이가 그린 코끼리는 어느새 생생히 일어나 같이 놀자고 한다. 그러나 집에 가야 할 시간.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코끼리 이야기를 듣고 엄마는 깔깔대며 말한다. 코끼리도 돌이와 같은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돌이와 코끼리>는 파스텔톤의 담담한 컬러링으로 따뜻하면서도 쓸쓸한 정서를 묘사한다. 돌이의 코끼리는 투명한 무지갯빛으로 상상의 윤기를 더한다. 부감을 이용한 구도는 탁 트인 공간감을 입히며 전체를 조망하는 돌이의 시선을 따라가게 한다.


소란함이 가신 해 질 녘 적막함, 운동장 가득 뻘하게 그려보는 그림, 정글짐에서 내려다볼 때의 호쾌함. 이 작품에는 ‘국민학교’ 시절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요즘 초등학교를 가본 적이 없어서 어떤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방과 후 운동장의 정서만은 지금도 비슷하지 않을까?

해 지는 운동장을 지나칠 때면 문득 떠오르는 귀여운 동화이다.





@출처/ 돌이와 코끼리, 이우경

월간 꿈나라, 돌이와 코끼리 (육영재단, 197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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