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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pr 05. 2017

주문이 많은 요리점, 허영의 시장


그림 하나 없는 깨알 같은 글씨와 한글임에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 어릴 적 훔쳐본 어른의 책장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197, 80년대 전집을 읽고 자란 세대라면 한 가지 이미지가 더해지는데 바로 ‘세로쓰기’이다. 한문권 국가에서 일제 잔재로 주장하긴 좀 애매한 세로쓰기는 광복 이후에도 한참 유지되다 사라졌다. 비교적 늦게 세로쓰기가 사라진 매체는 가장 대중적인 출판물인 신문이다.

이전에 가로쓰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 배대판 시스템에 의존하던 국내 신문들은 대부분 세로쓰기로 발행되었다. 국내 신문의 가로쓰기를 공고히 한 것은 아무래도 1980년대 후반 한겨레 신문이다. 그러나 DTP 발전으로 인한 조판 시스템의 진화, 반짝 호황이긴 해도 IT 벤처 붐에 따라 웹사이트가 주도적 매체로 떠오르고 새로운 플랫폼들이 공격적으로 등장하자 결국 대부분의 신문이 가로쓰기를 수용하게 되었다.


국민 작가임에도 막연한 인상이던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는 몇 년 전부터 다양한 분야에서 재조명되었다.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 2012>, 영화 <동주, 2015> 성공은 초판 형태의 유고 시집 발행으로 이어지며 큰 인기를 끌었다. 소와 다리 출판사의 초판본 시리즈는 발간 당시 원전을 복원하는데 중점 두었다. 편집의 외형도 당대의 표기법에 맞춘 세로쓰기가 적용되어 있다. 친숙한 작품의 생경한 북 디자인은 어렴풋하게나마 초월적 공감각이 느껴진다.

이 초판본 시리즈 중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은 가난하고 외로운 소년이 은하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코스모 로드 무비 같은 소설이다. 알려졌다시피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ぎんがてつどう スリーナイン, 松本零士, 1978-1981>의 모티브로 한층 유명세를 얻었다. <은하철도의 밤>은 미야자와 겐지의 미완작으로 작가 사후 발견한 다수의 수정본을 조합해 출판했다. 때문에 이 복간본에서는 내용이 유실되었거나 필체를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은 빈 페이지로 두었다.



수록분 중 가장 반가운 작품은 <주문이 많은 요리점>이다. 이 단편을 처음 읽은 것은 계몽사 주황색 전집의 일본 동화 편을 통해서다. 기원이 불분명한 민담 사이에서 <첼리스트 고오슈>, <요구가 많은 요리점>이란 제목으로 실린 겐지의 동화 두 편은 어린 마음에도 무척 현대적으로 느껴졌다.

복간본 자체는 아름답지만 사실 세로쓰기 읽기는 급격한 피로를 불렀다. 그럼에도 복고적인 향수가 주는 도취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한껏 돋아준다.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은 단락들은 전적으로 세로쓰기의 영향일 것이다. 두 주인공이 홀리듯 음식점의 요구를 따르는 것처럼 신비한 방문을 하나씩 열어가는 기분으로 시선이 흐른다.

윤동주처럼 미야자와 겐지도 사후에야 국민 작가 반열에 올랐다. 윤동주는 시대적 아픔과 개인적 삶의 충돌을, 미야자와 겐지는 제국주의와 함께 심화되는 빈부 차이를 문학적으로 고민했다. 비슷한 시기 적대국의 두 작가는 고립된 세계 속에서도 본질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단정한 진지함이 지금도 숙연한 감동을 준다.

계몽사 주황색 전집, 요구가 많은 요리점
注文の多い料理店, 이케다 히로아키.. 이런 캐릭터까지 잘 그리다니.. 털썩...


앞서 말했듯 국내 신문에 가로쓰기가 안착된 것은 1990년대 중, 후반으로 이십여 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한문을 거둬낸 가로쓰기는 당시 중앙지들로부터 비웃음과 우려를 샀다. 한글 가로쓰기가 신문의 지적 가치를 끌어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현학적 칼럼들과 속물스런 비평들이 야단법석 쏟아졌다. 이런 소동이 당시에도 지금도 한결같이 비웃기는 것은 언론의 정색이 엉뚱한 곳에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언론의 가치는 본질 규명의 의지와 탐색에 있다고 주입받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언론은 여전히 모두가 몸을 낮출 때 더 몸을 낮추고 사익을 위해서만 목소리를 높인다. 어뷰징에나 급급한 지금의 매체들을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형태가 본질을 구현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본질을 왜곡하는 형태는 공허하다. 이 공허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갖은 수사가 붙여지고 변명이나 다름없는 문장들이 소비된다.

디자인은 거들뿐, 결국 문장의 울림은 가로쓰기나 세로쓰기와는 무관한데 말이다.





@출처/ 

주문이 많은 요리점, 미야자와 겐지 (銀河鉄道の夜 - 注文の多い料理店, 宮沢賢治, 1934)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 전집 45 일본 동화집, 요구가 많은 요리점 (계몽사, 1973, 번역 김영일, 일러스트 송훈)

注文の多い料理店 (講談社, 1985, 일러스트 이케다 히로아키 池田浩彰)

은하철도의 밤 - 주문이 많은 요리점 (소와다리, 2015, 번역 김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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