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페에서 책 읽기 Apr 06. 2017

일요일의 손님, 아스라이


이정애 작가의 서사는 화풍만큼 독특한 이야기들이 많다. 로맨스이건 메르헨이건 어쩐지 약간 비틀려 보이는 인물들이 궁극을 추구한다. 그들의 관념에 타협이란 없기에 이런 결벽성은 아무래도 좌절되고 만다. 다른 차원과 시간 속에 갇힌 존재들, 외면당한 이들, 자의적으로 고립을 선택한 이들이 끝내 놓지 않는 한 가지는 그래서 더욱 쓸쓸한 공조를 남긴다.

<월간 르네상스>를 통해 처음 발표된 초기작 <일요일의 손님>도 이런 쓸쓸함으로 가물거린다.





이제 제법 봄이 다가오는 걸까? 유난히 햇빛 따스한 일요일 아침 초인종이 야단스레 울린다.

아무에게나 문 열어주지 말라던 지인들의 충고가 떠올라 잠깐 망설이던  ‘에이브’는 깜짝 놀란다. 괴상한 차림새지만 아내 패비아와 너무도 닮은 청년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따스한 일요일에 건강해져 돌아오겠단 약속을 남기고 떠난, 지극히 사랑하는 그녀 ‘패비아’.

그리움 때문인지 에이브는 출판사 추천으로 온 새 비서 ‘티미’를 집안에 들인다.

티미는 정말 이상한 청년이었다. 본 조비니, 헤비메탈이니, 우주인이니.. 쉴 새 없는 수다는 그의 복장보다 괴상하고 이해할 수 없다. 젊은이들은 언제나 요상한 유행에 사로잡히기 마련이고 에이브 자신이 유행과 동떨어진 20세기 신사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에이브는 티미가 몹시 좋아졌다. 덜렁대고 시끄럽지만 활달한 티미는 바라만 봐도 즐겁다. 아내와 똑같이 생긴 그의 수다를 듣고 있노라면 건강해져 돌아온 패비아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요리 중이던 티미의 손이 칼에 살짝 스친다. 그런데 티미는 구급약을 가져온 에이브에게 손 내밀기 주저한다. ‘에이브를 위해 좋은 기회인데 왜 망설여지는지 모르겠다’는 알 수 없는 말까지 중얼거린다.

그때 어째선지 에이브의 지인들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들은 티미가 에이브를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찾아온 악마라며 절대 그의 몸에 손대지 말라 소리친다. 지인들이 티미를 때려 쫓아내려 하자 에이브는 본능적으로 티미를 감싸 안는다. 그런데 에이브의 팔과 몸은 티미를 통과해버린다. 그가 만져지지 않는다!

지인들의 탄식 뒤로 사뭇 냉랭한 표정의 티미가 말한다.

에이브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그가 애타게 기다리는 패비아 역시 오래전에 죽었다고. 패비아가 죽었다는 자각 속에 에이브는 소멸된다.


티미는 사실 유령 퇴치사였다. 아름다운 팰로우 저택을 찾은 것도 끈질기게 떠도는 전 집주인 에이브의 유령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유령을 자각시켜 사라지게 하는 것이 티미의 업무였고 이번에도 유능하게 처리했다.

사라진 에이브가 무해했기 때문인지, 다정했기 때문인지 의뢰인과 텅 빈 저택을 둘러보던 티미는 어쩐지 좀 씁쓸하다. 그때 의뢰인이 에이브의 아내로 추정되는 20세기 초의 사진을 발견하고 호들갑 떤다. 사진 속의 그녀는 티미와 똑같이 생겼다. 사진을 본 티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에이브와 패비아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비틀거린다.

무료한 햇빛이 쏟아지는 텅 빈 저택에는 패비아의 애틋한 약속이 떠돈다.





<일요일의 손님>은 고딕 소설의 형식을 차용해 끝나지 못한 애도로 시간 속에 갇힌 이들을 그리고 있다.

패비아로 인해 영겁을 헤매게 된 에이브는 패비아로 인해 영면에 들 수 있게 된다. 서로에 대한 간절함은 불가항력적인 시간 속을 끊임없이 돌아 만남을 이루고야 만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자각까지 제 때 도착하진 못한다. 엇갈린 자각은 애틋함의 밀도를 높인다. 만져질 듯 만져지지 않는 두텁게 쌓인 시간의 먼지로 더 아스라한 햇빛처럼.


고딕 소설-고딕 로맨스는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로 피어난 18, 19세기 신비주의 낭만을 표방하는 장르이다. 초자연적 존재와 초현실적 사건들의 모호함은 불길한 매혹을 펼쳐 보인다. 불가항력적이라 더욱 원하게 되는 간절함을 바탕으로 하기에 여전히 사랑받는 장르이다. 속한 세계에서 이물감 넘치는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을 즐겨 그린 이정애 작가의 성향과도 퍽 잘 어울린다.

#성홍열, 쓸쓸한 유산 https://brunch.co.kr/@flatb201/21

#루이스 씨에게 봄이 왔는가? https://brunch.co.kr/@flatb201/39


장르 차용을 떠나 이 작품의 서사나 반전은 이제는 비교적 흔한 클리셰이다. 그러나 이 장르에서 종종 언급되는 영화 <식스 센스 The Sixth Sense, 1999>, <디 아더스 The Others, 2001> 보다도 십여 년이나 앞서 발표되었다. 헐리웃이야 이 짧은 만화를 알리 없겠지만 서정성에 있어서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나른한 봄날 오후에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쓸쓸함은 언제나 햇빛 눈부신 날에 더욱 사무치니까.





@출처/ 

일요일의 손님, 이정애

월간 르네상스, 일요일의 손님 (서화, 1988.12)

이정애 컬렉션 4 신데렐라 이야기, 일요일의 손님 (대원씨아이, 20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