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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pr 07. 2017

검둥이 삼보, 모두의 팬케이크


오래된 책은 지나간 시간을 복원시켜 찰나의 도취를 돌려준다. 있던 줄도 몰랐던 기억을 소환한다.

또 한편으론 그 기억들이 결국 과거일 뿐임을 상기시킨다. 윤색된 추억은 변화된 맞춤법과 문법적 오류에 배반당한다. 어린 시절 실체를 알 수 없던 의혹이 씁쓸한 이해로 돌아오기도 한다. 몹시나 사랑받았어도 시대성 아래 낙오되거나 부정되기도 한다.

그저 흥겨운 동화 같은 <검둥이 삼보>는 그렇게 낙오된 옛날 책 중 하나이다.




공감각적 상상

한껏 차려입은 검둥이 ‘삼보’는 밀림을 지나다 호랑이들을 만난다. 삼보는 무서운 호랑이들에게 우산과 바지, 윗도리와 예쁜 구두를 차례로 뺏긴다.

벌거숭이가 된 삼보가 숨은 나무 밑으로 모여든 호랑이들은 빼앗은 물건을 자랑하다 다투게 된다. 서로의 꼬리를 물고 나무 주위를 미친듯이 돌던 호랑이들은 그대로 녹아 노오랗고 먹음직스러운 버터가 된다. (네?)

삼보와 아빠가 담아온 ‘호랑이 버터’로 삼보의 엄마는 맛있는 팬케이크를 만들어준다. 삼보는 혼자서 수백 장의 팬케이크를 먹는다. 냠냠!


노란 호랑이가 녹아 노란 버터가 된다니! 황새가 아기를 물어다 주는 동화의 세계에서도 획기적인 공감각적 전환이다. 수백 장의 팬케이크를 먹는 결말은 어린이들에겐 더없이 완전한 해피엔딩이다.

삼보의 원래 모델은 인도의 소년으로 극 중 팬케이크는 인도식 납작한 빵 ‘난 Nann’이다. 호랑이 버터 역시 ‘기 Ghee’라는 인도식 유제품이다. 작가가 정확한 명칭을 전달할 수 없자 윤색했다고 한다. 서구권에서도 호랑이 버터의 인상은 강렬했는지 실제로 동명의 디저트가 있다. 모양을 보면 절로 납득되고 만다.

#Tiger Butter Fudge https://www.verybestbaking.com/recipes/129441/tiger-butter/



정치적으로 공정한 팬케이크

막연히 전래동화라고 생각해 온 <검둥이 삼보>는 스코틀랜드 작가 헬렌 밴너만의 창작동화이다.

기발한 상상력과 흥겨운 분위기, 발간 당시 인기에도 현재 이 작품의 복간본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예민한 이라면 이미 느꼈겠지만 ‘검둥이 Black’라는 인종차별적 단어 때문이다. 초판본 <The Story of Little Black Sambo>를 카피한 일본의 그림책들, 일서를 중역한 국내 그림책들에선 토인, 검둥이라는 표현으로 한층 비하된다.

대부분의 사어들처럼 검둥이라는 단어도 그저 흑인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쓰인 때가 있었다. “I have a dream.”으로 시작되는 마틴 루터 킹의 그 유명한 1963년 연설 속 Negro가 그렇다. 그러나 인종차별금지 투쟁이 심화되며 진즉부터 부정되는 단어이다.


<검둥이 삼보>는 시각적 풍성함과 서사의 발랄함으로 많은 종류의 빈티지 북이 있다.

삼보는 작가가 한때 거주했던 인도의 소년들이 모델이지만 묘사 자체는 흑인에 가깝다. 인종에 예민할 필요 없이 살아온 1세계 백인에겐 유색인종과 흑인 간의 문화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 백장의 팬케이크를 먹는 결말 또한 식탐 많고 미련스럽게 희화화된 당시 미디어 속 흑인의 이미지를 그대로 입혔다. 실제로 수 세대의 흑인과 인도인들은 이 작품을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밴너만은 왜 유색인종에게 Black이란 수사를 붙인 걸까? 기본적으로 인권감수성이 부족해서겠지만 창작자로서의 그녀는 컬러를 통한 공감각적 수사에 스스로 도취된 것 아닐까? 부정확함과 정치적 불공정함으로 인해 이 작품은 차츰 아동도서목록에서 빠지게 되었다.

검둥이 삼보의 빈티지북. 제일 첫 번째가 초판이다. 대부분의 삼보는 누가 봐도 흑인이다.



동화는 화려한 속성으로 인해 다양하게 변주된다. 시대성에 따른 부조리, 비윤리가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재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재해석 중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작품은 많지 않다. 심지어 제목과 달리 공정하지도 않은 잔혹동화 시리즈는 최악이다. (백설공주가 소아성애자인 난쟁이들과 관계하고, 신데렐라에 된장녀 프레임을 덧씌우는 글들? 그저 어쩌라고 싶은 쓰레기다.)

설명을 해야 하는 농담이 실패한 농담이듯 사실 원초적으로 재미있는 창작물들은 어떤 부연도 필요 없다. 그러나 불편하지 않은 마음으로도 한껏 즐거울 수 있는 창작물은 훨씬 찾기 쉽지 않다. 물론 창작물에 기대하는 것이 교훈뿐일 리 없다. 그 자체의 재미, 재치 넘치는 상상력 또한 창작물의 매력이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관념들이 있다. 그 대상이 지도가 필요한 아동이라던가 작은 시도일지라도 Negro, Nigger 같은 불공정한 관념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라면 더욱 말이다.

순간의 재치나 기법이 목적이 될 수도 있고 거기에 도취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도취를 언제나 우선에 두는 창작자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너절한 헛소리도 가리지 못하는 이에게 무엇을 동조할 수 있을까?





@출처/ 

검둥이 삼보, 헬렌 밴너만 (The Story of Little Black Sambo, Helen Bannerman, 1899)

オールカラー版 世界の童話 9, ちびくろサンボ (小学館, 1967, 후지와라 잇세이 藤原一生, 일러스트 후카자와 쿠니로 深沢邦朗)

금성 어린이 교육 칼라 텔레비젼 세계교육동화 14 영국 동화, 검둥이 삼보 (금성출판사, 1978, 일러스트 후카자와 쿠니로 深沢邦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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