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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pr 14. 2017

로타와 자전거, 좋은 계절


동화책 작가로 이루어진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수많은 ‘작가들의 작가’는 누구일까?

갈팡질팡 고심에는 스웨덴의 국민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괴력의 사랑스러운 주근깨 소녀 삐삐, 에너지가 넘치는 개구쟁이 에밀, 장난이라면 소년들에게 지지 않을 마디켄, 못생긴 더벅머리 고아지만 의리 있고 낙천적인 라스무스, 세심한 소년 탐정 칼레, 실레비 펜이라는 명칭으로  유명한 꼬마 닐스 칼슨까지. 적지 않은 작품 수에도 어떻게 매번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들을 쓸 수 있었을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상상력이 세심한 관찰과 애정에 기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아이들 https://brunch.co.kr/@flatb201/277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파트너들 https://brunch.co.kr/@flatb201/278

#로타와 자전거, 좋은 계절 https://brunch.co.kr/@flatb201/160

#개구장이 미셸, 오늘의 목각 인형 https://brunch.co.kr/@flatb201/279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소년의 행방 https://brunch.co.kr/@flatb201/282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고양이 꽁치와 악당들의 설탕 쿠키 https://brunch.co.kr/@flatb201/283



린드그렌의 아이들은 마냥 착하지 않다. 우리가 때때로 어린이들에게 느끼는 작은 악마 같은 본성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그러나 이런 본성은 린드그렌의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인해 혐오보다는 이해를 품게 된다. 비록 엄청난 소동으로 귀결되어도 이면의 의도를 간과하지 않음으로써 공감과 동조를 불러일으킨다.

린드그렌의 아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장난을 좋아하는 낙천성 정도일 것이다. 또래의 아이들은 비슷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비슷하지 않다. 그들은 현실이건 상상이건 개인적 모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엿보게 해 준다.


꼬마 소녀 로타는 불만이 있다. ‘완전한 다섯 살’이 되었건만 언제나 요나스 오빠와 마리아 언니의 신나는 일상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 특히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언니와 오빠의 자전거를 볼 때면.. 로타는 말한다.


“나도 저까짓 자전거쯤은 탈 수 있어. 자전거가 있다면 말이지..”


생일을 맞은 오늘, 로타에겐 특별한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모험에 해적이나 요정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가 잊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한 ‘첫 번째 순간’이 다가온다.


다작 작가인만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시리즈도 많이 발표했는데 로타는 비교적 평범한 소녀이다. 얼핏 그녀의 위치는 조연에 가까운 범상한 캐릭터-삐삐를 선망하는 아니카와 토미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일상성으로 로타는 어린이들, 어린이였던 이들에게 스스로를 대입하게 해 준다.

로타는 삐삐처럼 멋진 해적 아빠를 두었거나 백만장자가 아니다. 마디켄처럼 갖가지 사고를 치지만 그 창의성과 규모에 있어 에밀을 능가할 수 없다. 평범한 로타는 현재의 혹은 과거의 ‘나’처럼 실수하고, 투덜대고, 즐겁다가, 억울하고 그래도 썩 괜찮은 하루를 보낸 후 잠자리에 든다.

이런 동시성이 우리가 로타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수록분마다 독특하고 훌륭한 일러스트의 문선사 전집을 많이 기억한다. 내 경우 처음 이 작품을 읽은 것은 어떤 잡지의 별채 부록으로 나온 편집본을 통해서였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꿈나라나 소년 중앙일 것이다.) 사실 어떤 판본을 읽었건 이 작품은 일론 비클란드의 일러스트로 각인된다. 성인이 되어 린드그렌의 작품임을 알게 된 후 새삼 역시!라고 감탄할지언정 로타, 이 평범하고 작은 소녀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비클란드의 이미지들이다.

린드그렌과 페어를 이룬 비클란드는 아이들을 보는 관점도 비슷했다. 린드그렌이 아이들의 종잡을 수 없는 엉뚱함을 분석하기보다 이해하려 했다면 비클란드는 아이들 자신도 자각 못하는, 그러나 먼 훗날 강렬한 잔상으로 남을 미세한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섬광처럼 스치고 가는 일상의 눈부신 순간은 드라마틱한 구도로 피어난다. 로타가 그네를 타는 그 유명한 장면처럼 말이다.

이런 섬세한 해석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로타와 자전거>를 인생 그림책으로 뽑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햇빛이 사랑스러운 언젠가의 봄날, 조카에게 물었다.

“오늘 뭐 했어?” 

“당근 뽑았어~!!!”

현장학습 뭐 그런 듯한데 까르르 웃으며 치켜든 당근은 덜 자란 상태였다.

그 오후 내내 조카는 볼을 빛내며 즐거워했다.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키우던 관찰 식물 중 당근은 수가 많지 않아서 함부로 뽑는 것을 금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종 당근을 뽑아 사육장 토끼에게 먹이곤 했다.

퐁- 하고 뽑혀올 때의 경쾌함, 눈이 아린 선명함, 잎도 뿌리도 완전 예쁜 당근.

햇빛 좋은 날 뽑아 온 당근을 자랑하는 오후, 처음으로 바로 세운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는 꽃그늘, 매해 돌아오지만 매해 마지막일 하루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내 흩어지고 말 고운 먼지처럼 연약한 기억들이다.

하루는 더디지만 계절은 빠르게 우리를 스쳐간다. 좋은 계절은 더욱.



세월호 유족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출처/ 

로타와 자전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Visst Kan Lotta Cykla, Astrid Lindgren, 1971, 일러스트 일론 비클란드 Ilon Wikland)

현대세계걸작그림동화 11, 로타와 자전거 (문선사, 1984, 번역 차미례, 일러스트 일론 비클란드 Ilon Wikland)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 (논장, 2014, 번역 햇살과 나뭇꾼, 일러스트 일론 비클란드 Ilon Wik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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