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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Sep 16. 2021

개구장이 미셸, 오늘의 목각인형


과거의 어떤 한 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복기가 기억 속에서만 온전하기 때문이다. 비에른 베리의 일러스트로 더욱 사랑받는 <뢴네베르가의 에밀> 시리즈는 복구된 린드그렌의 유년시절이다. 목가적 정취 아래 근면하고 투박한 농장 식구들과 스웨덴 시골 커뮤니티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진다. <떠들썩한 거리의 아이들>, <마디켄> 등의 시리즈처럼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들로 진행되지만 지루할 틈이 없는 작품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아이들 https://brunch.co.kr/@flatb201/277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파트너들 https://brunch.co.kr/@flatb201/278

#로타와 자전거, 좋은 계절 https://brunch.co.kr/@flatb201/160

#개구장이 미셸, 오늘의 목각 인형 https://brunch.co.kr/@flatb201/279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소년의 행방 https://brunch.co.kr/@flatb201/282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고양이 꽁치와 악당들의 설탕 쿠키 https://brunch.co.kr/@flatb201/283




에밀과 미셸

린드그렌은 저작권 방어에 철저한 편이었고 다작에 판본까지 많기로 유명했다. 단일 에피소드로 구성되는 시리즈 특성상 <에밀 시리즈>도 다양한 판본이 발행되었다. 세 장으로 구성된 스웨덴 초판은 이후 소설판과 에피소드별 그림책으로 발행되었다. 소설판 일러스트의 경우 베리가 스몰란드 취재 여행 시 그린 잉크 드로잉들이 단색 인쇄되었지만 그림책들은 컬러가 추가되었다. 극 중 에밀의 어머니는 푸른 노트에 일기를 쓰는데 사실상 에밀의 사건 일지에 가까워진다. 초판 한정 챕터별 제목도 일지의 날짜처럼 카운팅 되어 생생함을 더한다.


초콜릿색 프레임 안에 명조체 제목이 또렷했던 <범우 사루비아 전집> 수록분으로 읽게 된 <에밀 시리즈>는 지금도 즐겨 읽는다. 주로 청소년 문고로 지칭되던 기존 고전들을 요약 편집한 반양장 문고판 전집이다. 그런데 범우사 수록분 제목은 ‘에밀’이 아닌 <개구장이 미셸>로 표기되어 있다. 이유는 스웨덴 원전이 해외 판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이름이 교체된 것으로 추측된다. 프랜차이즈 매출이 중요해진 현재는 캐릭터의 고유성을 보전하지만 이전 시기에는 국가별 정서에 맞춰 독자 친밀성을 높이는 전략이 구사되었다. 린드그렌의 다른 작품들-영문판 로타는 ‘폴리 Poly’로, 소년 탐정 칼레는 ‘빌 Bill’로 교체 발행되었다.


상, 하로 분권 된 범우사 판본은 국내 미발행된, 거의 모든 에피소드가 수록된 사실상 완역본이다. 현재 구입 가능한 국내 단행본 <장난을 배우고 싶은 꼬마 이다, 논장, 2016>, <에밀의 크리스마스 파티, 논장, 2016>, <에밀의 325번째 말썽, 논장, 2018>은 범우사 판본 이후 발행된 싱글 에피소드의 하드커버 그림책이다. 귀엽긴 하지만 이 시리즈의 매력을 어필하기엔 단촐하다. 스웨덴 초판본 구성을 따른 <에밀은 사고뭉치, 논장, 2013>는 아쉽게나마 소설판 일부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다.

오래된 책들, 특히 절판된 책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저 특정 판본을 가지고 있다는 과시욕을 경계하는 편인데 <에밀 시리즈>를 좋아해 ‘국문 완역본’이 궁금해졌다면 범우사 판본을 구해보길 추천한다. 안타깝게도 현재로선 대체 판본이 없다.




325일의 소년

앞서 말했듯 <에밀 시리즈>에는 린드그렌의 가족 및 유년 시절 농장 일꾼들의 모습이 배어있다. 에밀이 축제에서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거나 농장 입구 통행료를 걷어 용돈벌이를 하는 에피소드들은 실화에 기반한다.

린드그렌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다정했고 어머니는 다소 가차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 깔끔한 성격이었는데 시리즈에선 바뀌어 설정되었다. 아버지의 다정함은 에밀의 절친인 농장 일꾼 ‘알프레드’에게 분산 배치되어 있다. 이 시리즈의 공식 귀요미 ‘이다’는 에밀의 앙숙 ‘리나’마저 너무너무 예뻐하는 순둥이다. 아직 어려 주도적이지 않을 뿐 오빠인 에밀의 장난에 편견 없는 대범한 인물이다.

병원놀이 에피소드. 이 일러스트 한 장이 챕터 그 자체이다...


극 중 에밀과 아버지의 ‘다소 서먹한 사이’도 린드그렌 자신과 어머니의 변주이다. 린드그렌은 주인공을 남자아이로 바꾸며 ‘남자 대 남자’라는 하찮은 클리셰 대신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어린이들의 양가감정을 탁월하게 입혔다. 물론 이 서먹함은 325번을 넘어가는 에밀의 무지막지한 장난으로 인한 것이지만 유쾌함 속에 가려져 있어도 에밀은 그저 노는 게 제일 좋은 ‘어린이’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사고로 진행되는 우연성 아래는 사실 어린이다운 인정 욕구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어린이 입장에선 빌런처럼 느껴지는 어른도 사실 어른이기에 감내하는 선택이 있음을 배려심 있게 묘사하고 있다.

에밀과 아버지의 관계는 늘 이런 식이다.
앙숙이지만 리나를 돕고 싶은 안타까움은 에밀의 진심이다.




325개의 나무 인형


“이제 미셸이 새 나무인형을 깎을 때가 된 모양이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남자아이는 그럴 수 있는 것’이란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에밀은 반드시 말썽에 대한 ‘책임’을 감수한다. 의도야 어쨌건 소동을 일으킬 때마다 일종의 ‘벌칙 방’인 창고부터 달려간다. 하루에 세 번도 넘게 갇힌 날엔 아버지가 호통치기도 전에 자가격리를 실행한다. 홀로 차분히 반성하라는 조치였겠지만 창고에 갇힐 때마다 에밀은 목각 인형을 하나씩 조각한다. 그 자신의 연표를 채워가듯.

아동 혐오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인 건지 작품 도입부에선 이 가차 없는 말썽꾸러기가 이때의 경험으로 아주 유쾌하고 좋은 어른이 되었으며, 존경받는 미래의 교구장이 될 것임을 정해두고 시작한다. 이 시리즈가 발표되던 시기는 가부장의 권위만큼 체벌이 일상적이었다. 창고는 벌칙 방이기보단 에밀의 아지트에 가까워 아동 학대의 분위기마저 걷어낸다. 어린 시절, 에밀이 325개도 넘는 목각 인형을 깎아둔, 말린 과일과 소시지, 크래커가 상시 비축된 창고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에밀의 사건들은 에피소드마다 유쾌해서 한 가지를 꼽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도 뢴네베르가를 뒤흔든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천덕꾸러기 돼지와 에밀이 나눠 먹은 버찌’ 일 것이다.





에밀의 아버지는 구두쇠는 아니지만 근면한 농부답게 무척 알뜰하다. 바지런한 어머니의 요리 솜씨는 뢴네베르가를 넘어섰다. 에밀에게 행운만 가져다준 경매에서 아버지가 유일하게 보전한 건 돼지 한 마리뿐이건만 새끼를 모두 물어 죽여 가장 허약한 아이만이 간신히 살아남는다. 에밀의 애지중지 덕에 새끼 돼지는 건강해지고 간식 훈련으로 줄넘기도 뛰는 영특함을 보인다. 이 기쁨을 전하는 에밀에게 아버지는 미래의 소시지가 줄넘기를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응수한다. 에밀은 불운한 운명이 예고된 아기 돼지를 ‘천덕꾸러기 돼지’로 부르며 소시지가 될까 전전긍긍 더욱 애지중지 한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버찌 찌꺼기를 한 양동이나 버리러 가던 오후, 여느 때처럼 아버지의 천덕꾸러기 돼지는 에밀의 뒤를 졸졸 따라온다. 어차피 찌꺼기니까 간식으로 먹게 놔둔 버찌 찌꺼기에 돼지는 코를 박은 채 기뻐 정신을 못 차린다. 농장의 대장 수탉까지 가세하자 에밀은 슬며시 궁금해진다. 코끝에 올라오는 달큰함에 에밀은 돼지와 함께 버찌를 한 두 개씩 주워 먹기 시작한다.


식사시간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는 에밀을 찾으러 간 리나가 목격한 것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헤롱대는 돼지와 수탉과.. 에밀이었다. 어느 해 보다 풍작인 버찌가 아까웠던 에밀의 어머니는 패트럴 부인의 부탁으로 과일주를 담근 것이다. 에밀이 먹은 것은 발효된 술지게미였다.

엄격한 청도교 질서의, 심지어 금주법 시대에, 그것도 어린 소년이 술에 취하다니!

앙숙과 절친의 온도 차... (깐족대긴 해도 리나도 에밀을 걱정한다.)


“어린 소년이 술잔을 들고 죽음을 채우네..”

“술잔으로 마신 게 아니에요!”

사뭇 장중한 교구회 성가단의 엄숙한 노래를 들으며 훈계를 듣고 귀가한 에밀에게 아버지는 호통 대신 서글프게 말한다.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한다면 언젠가 아버지의 유일한 돼지인 천덕꾸러기 돼지를 주겠다고. 아버지 방식의 애정 표현은 돼지의 안전을 보장받은 것만큼 에밀을 들뜨게 한다.

다음 날, 에밀은 알프레드와 밤놀이로 잡은 수십 마리의 게를 아버지의 침실에 가져다 둔다. 자랑스러운 전리품을 아버지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 후, 달빛 아래 아버지의 비명이 길게 울려 퍼진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에밀이 벌이는 소동이 ‘좋은 의도’로부터 시작됨을 꼼꼼히 강조한다. 서툴지만 전력을 다한 진심은 이타심 넘치는 기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양로원 노인들과 알프레드에 관한 크리스마스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에밀의 말썽이 늘어갈수록 창고의 목각 인형은 하나씩 늘어난다. 그러나 주위 어른들의 애정과 끝없는 인내심 덕에 에밀은 목각 인형 개수만큼 성장한다. 덕분에 독자인 우리는 안도하며 에밀의 장난을 마음껏 지지할 수 있다. 읽는 내내 즐겁고, 따분한 설교 없이도 성찰하게 하고, 한 번쯤 시도를 꿈꾸게 하는 읽을 때마다 놀라운 작품이다.





@출처/ 

뢴네베르가의 에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Emil i Lönneberga, Astrid Lindgren, 1963, 일러스트 비에른 베리 Björn Berg)

범우 사루비아 문고 124, 125; 개구쟁이 미셸 1, 2 (범우사, 1986, 번역 한기상, 김윤희, 일러스트 비에른 베리 Björn 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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