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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Sep 15. 2021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아이들


창작자 개인의 삶과 작품을 동일시할 수 없다. 그러나 작품 아래 가라앉은 개인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고야 만다. 싸구려 수사 사이에서 발견한 우직한 목소리가 울림을 주는 이유기도 하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들은 아동 문학의 매뉴얼이다. 세대를 건너 앞으로도 굳건할 매력의 비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녀의 작품은 구매자인 성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어린이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다소 계도적일 이야기들조차 항상 진짜 목표를 의식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아이들 https://brunch.co.kr/@flatb201/277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파트너들 https://brunch.co.kr/@flatb201/278

#로타와 자전거, 좋은 계절 https://brunch.co.kr/@flatb201/160

#개구장이 미셸, 오늘의 목각 인형 https://brunch.co.kr/@flatb201/279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소년의 행방 https://brunch.co.kr/@flatb201/282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고양이 꽁치와 악당들의 설탕 쿠키 https://brunch.co.kr/@flatb201/283




아니카와 토미, 진짜 독자들

<말괄량이 삐삐>는 사랑받는 만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발표 당시에는 통상적으로 쓰이던 ‘검둥이’ 같은 표현과 일부 설정 때문에 인종주의 논란까지 더해졌다. 우려를 가장한 공통된 비난은 홀로 사는 어린이-그것도 ‘여자 어린이가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삐삐의 첫 번째 독자였던 린드그렌의 딸 카린, 아니카와 토미로 대표되는 대다수 어린이에게 동경을 넘어 해방감을 선사한 자유로움이 대다수의 성인들에게는 과격한 불량함으로 간주되었다.

린드그렌은 해외 판본 발간 시 단어 하나의 뉘앙스에도 철저했지만 일부 국가에선 멋대로 순화된 축약본이 발행되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편집부가 제안한 개정판을 린드그렌은 거절한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삐삐라는 인물을 다른 성격으로 만들려고 했다면, 어린 독자들에게 즐거움 이상의 어떤 것을 주는 인물로 만들 작정이었다면, 아마 그건 이런 것이었을 거예요. 사람이 힘을 잘못 사용하지 않고도 권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린드그렌은 아마도 성선설 쪽에 서있던 듯싶다. 어린이들이 어떤 것을 욕망하는지 그 욕망이 오도당했을 때의 방향성에 관심 두었다. 삐삐가 드러내는 폭력성조차 윤색되어선 안된다는 린드그렌의 주장은 작가적 자부심이나 아집이 아니었다. 시대에 따른 낙후함조차 어린 독자 스스로 인지하고, 그 탐험의 과정이 자연스러운 독서의 경험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마구잡이 독서로 이 자리에 온 독자들이라면 금기의 자극에서 시작했던 꼬리물기식 독서 경험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읽기란 유치한 패러디나 개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전의 아름다움을 곱씹되 낙오된 시대성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다.




에밀, 마디타, 로타와 시끄러운 거리의 아이들, 유년의 계승자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린드그렌은 <에밀 시리즈>에 묘사된 전형적인 스웨덴 농가에서 성장했다. 부유한 것은 아니지만 노동으로 소박한 행복을 일구는 삶이었다. 린드그렌의 주인공들이 물려받은 낙천성은 모두 이 시기에서 기원한다.

더없이 완벽한 유년을 만들어준 자연도 성년이 된 린드그렌에겐 지루한 일상이 된다. 나이, 환경, 어린 시절에는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던 성별의 제약까지 더해지자 린드그렌도 도시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꿈꾼다. 낙관적인 아버지의 독려 아래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아버지뻘 편집장과 그녀 단 둘 뿐인 작은 신문사에 취업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불안한 예감대로 18세의 린드그렌은 49세의 유부남 상사 ‘라인홀트 블룸버그’와 부적절한 사랑에 빠져 임신한다. 이 사랑은 조금 의심스러운데 사회 경험이 없는 미성년 여성에게 로맨스란 착각은 얼마나 쉬운 속임수인가? 이후의 수순이 그 증명인데 불륜남은 뻔하게 책임을 회피하며 양육비 지급도 지키지 않았다.

청도교적 가치를 중시하던 고향집에도 기댈 수 없자 린드그렌은 의외의 선택을 한다. 사생아가 된 아이를 버리지 않고 비혼모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현재도 쉽지 않은 비혼모의 삶은 20세기 초에는 사회적 자살과 같았다. 아들 라르스는 간통죄로 인한 징역형에서 사수하기 위해 수년간 덴마크 위탁가정에 맡겨 비밀리에 키워야 했다. 타이피스트로 재취업 한 린드그렌은 홀로 아들의 위탁비용을 대며 위태롭게 버틴다. 창작 겸업이 가능한 사무직인가 싶겠지만 철저히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한미한 급여에 여유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린드그렌은 공식적인 남편이 생긴 후, 그것도 육아가 안정적인 궤도에 들고서야 창작 활동에 대한 소망을 돌아볼 수 있었다. 린드그렌 자신의 유년을 마무리 짓고 아들의 유년을 위해 분투한 시기였다.




실레비 펜과 지붕 위의 칼손, 늑대의 시간

린드그렌의 자녀들에게 법적인 성을 준 ‘스투레 린드그렌’은 유쾌한 사람이었지만 이미 알코올 중독자였고 외도도 빈번했다. 이 사랑도 약간은 모호한 것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애정보다는 파트너이자 안전한 양육자로 그를 선택했고 그 대가로 일생 그의 사고를 묵과하고 수습했다.

린드그렌은 자녀들에게 공평했지만 어쩔 수 없이 첫 아이인 라르스에게 좀 더 관대했다. 유아기를 함께 해주지 못한 것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이었음에도 린드그렌 또한 일하는 엄마들에게 강요되는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위탁가정에서 자라기는 했어도 선량했던 위탁인들의 아낌없는 사랑 덕에 라르스는 행복한 유년을 보냈다. 엄마와 살게 된 후 한동안 위탁인들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평범하게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던 라르스는 이십 대가 되자 린드그렌의 새로운 좌절이 된다. 문란한 성편력, 낭비벽과 도박, 도둑질, 낙제와 퇴학, 마지못한 혼전임신 결혼 등 가지가지 사고들을 착실히도 쌓는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라르스가 남편 이상의 구제불능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것이다. 명랑했던 라르스의 부인은 남편에 지쳐 함께 술잔을 들었고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다.

감정적으로 금전적으로 부족함 없던 라르스의 파국은 온전히 그 자신의 문제였다. 후대의 독자가 보기엔 호강에 겨워 요강 걷어찬 탕아일 뿐인데 어머니로서의 린드그렌은 아들의 탈선에 내내 부채의식을 가졌다.

<지붕 위의 칼손>과 실레비 펜으로 알려진 <닐스 칼손>의 소년들은 부모가 부재한 시간 속에서 쓸쓸함과 무력감에 빠진다. 그러나 두 소년은 요정과의 교제로-혹은 교제로 은유되는 상상을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고 되려 부모를 위로하는 상냥한 성장을 이룬다. 해피엔딩임에도 이 작품들이 내내 쓸쓸하게 느껴지는 건 라르스에 대한 린드그렌의 절박함이 투영돼서 일 것이다.




로냐, 다시 그대로의 자연으로

악의가 한 가지 혐오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선의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뿌려진다. 어린이들에 대한 린드그렌의 애정은 반전 피력과 동물보호, 환경보호로 확장되었다. 특히 세계대전을 거치며 린드그렌은 어떤 종류의 폭력도 용납치 않았다.


“폭력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의 어린이들이 언젠가는 내일의 세상을 이끌어갈 것이기에 이런 악순환은 깨져야 합니다. 다음 세대가 따뜻하고, 열려 있으며, 타인을 믿는 사람으로 자랄 기회를 갖는 일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린드그렌은 아이들의 엉뚱함을 선의에서 비롯된 한정적 판단으로 보았다. 미숙함을 이해하려는 시도야말로 어른의 우선순위이어야 함이 작품마다 녹아있다. 어린이들의 의도가 좌절될 지라도 사고로 폄하하지 않고 좌절한 만큼 내딛는 다음을 만들어준다. <산적의 딸 로냐> 속 숨은 주인공인 ‘자연’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반목의 역사 청산이야말로 린드그렌이 남기고 싶었던 진짜 유산일 것이다.

#계영님, 린드그렌의 유산 https://brunch.co.kr/@jkyjsw88/90





아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어른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런 입장이 어린이가 차선이어도 된다는 혐오의 당위가 될 순 없다.

모든 처음은 쉽지 않지만 육아는 특히나 열정을 배반당하기 쉽다. 투입되는 시간이 무색하게 돌이킬 수도 없다. 특정 성별에 대한 편애, 이성애적 표현을 덧댄 관용어구 (애인 같은 아들, 딸바보)야말로 소름 끼친다. 자기 자식이 어여뻐 어쩔 줄 모르면서도 타인의 아이들에게 서슴없이 잔혹한 이중성은 목격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이런 반발을 비혼의 결핍으로 치부하는 아둔함이야말로 혐오돼야 하는 대상이다.

어떤 법안의 명칭으로 자식의 이름을 확인하게 되는 부모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존재하지도 않은 민식이 놀이를 만들어내 약자 혐오를 조장하는 이들이 노 키즈존을 수호한다. 각종 ‘린이’들은 어린이들이 잠재적 사고뭉치로 각인되는 밈을 날조한다. 비출산 선호, 낙태가 합법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당신이 그 원인에 일조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길.


성별 이전 어린이란 정의가 우선이다. 여자아이니까 허용되지 않는 것은 없어야 하는 것처럼 남자아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은 없다. 아이들의 연약함을 알아본 이들이 사회적 약자를, 동물을,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 또한 고민한다.

훌륭한 아동문학가들 사이에서 심지어 그 자신의 실패한 양육에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대표성을 획득한 것은 이런 이타심에서 기인한다. 적어도 책을 읽는 어린이라면 린드그렌의 응원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어른들에게 물려진 그 응원이야말로 고귀한 유산이며 진짜 권력이다.





@출처/

Astrid Lindgren Official https://www.astridlindgren.com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마렌 코트샬크 (여유당, 2012, 번역 이명아)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옌스 안데르센 (창비, 2020, 번역 김경희)

폭력에 반대합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위고, 2021, 번역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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