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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ug 27. 2021

가구야 공주, 언젠가


이 비가 그치면 또 한 계절이 끝났을 테다. 달이 아름다운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달은 욕망하면서도 두려운 양가감정을 품게 한다. 변덕이건 변신이건 모습을 달리하는 일주 一周의 걸음도 특별하다. 세상에는 태양처럼 빛나는 여성들도 가득하지만 달의 우아하고 서늘한 아름다움에 여성성이 더해지면 종종 처연하다. 여성성과 동반 계승되어온 비극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대나무를 팔아 살던 가난한 노부부가 상서롭게 빛나는 대나무순에 감싸진 아기를 발견한다. 대나무에선 황금과 비단이 쏟아졌고 아기는 몇 달 만에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했다. 노부부의 정성 아래 성년이 된 소녀는 가구야 공주 かぐや姫로 불린다. 황금과 비단으로 부자가 된 노부부는 그들이 살던 숲을 떠나 대도시로 이사한다.

기념 우표 '옛날 이야기' 시리즈, 1974


아름다움으로 인한 칭송과 청혼이 가구야에겐  쌍의 불량배 같았다. 그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높은 신분의 귀족 다섯 명이 한꺼번에 청혼하자 그녀는 ‘부처의 돌그릇, 불사의  가지, 불쥐의 불타지 않는 가죽옷, 용의 역린아들을 순산한다는 제비의 조개 혼수로 구해달라 요구한다. 꼼수와 조작에도 다섯 명의 귀족들은 모두 실패한다. 그러나 좌절된 미션마저 가구야를 욕망하게 했고 급기야 거절할  없는 신분인 황제가 그녀를 취하려 든다. 하지만 가구야를 만나본 황제는 그녀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 친분을 나누는 사이에 그친다.

Japanese Tales and Legends, Joan Kiddell Monroe, 1959


3년 후, 날로 수심 깊던 가구야는 달에 돌아가게 되었다 말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대나무 숲을 지켜보다 인간 세계가 궁금해 내려온 달의 선인이었다. 만월의 밤, 달에서 내려온 엄청난 선인 행렬이 겹겹이 에워싼 황제의 군대를 물린 후 가구야를 데려간다.





궁극의 인형

빛나는 대나무 사이에서 발견된 달의 아이, <다케토리 모노가타리 竹取物語>는 신비한 연극적 분위기로 많은 분야에서 변주되며 사랑받고 있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 공연된 그림자 연극을 본 적 있는데 동적인 시각화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는 잔존하는 고대의 우아함으로 사랑받는다. 그러나 상식적인 현대인이라면 다수의 신화와 제국을 지나간 풍경으로 관망할 뿐 그 시대로의 회기를 꿈꾸지 않는다.

옛이야기 속 여성은 대게 남성의 전리품으로 획득되고 그로 인해 지위를 얻는데 가구야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그녀의 미션도 자산의 획득이 아닌 자기 수호에 맞춰져 있다. 결국 그녀가 달로 돌아간 ‘선택’은 최악을 모면키 위한 차악처럼 느껴져 쓸쓸해지고 만다.

아사쿠라 세쓰 朝倉摂, 1968
다카하시 마코토 高橋真琴, 2013
우노 아키라 宇野亜喜良, 2006 / 와카나 케이 若菜珪, 1971


다카하타 이사오의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이런 부조리를 강조해 가부장 제도하에 시들어갈 위기에 처한, 그러나 끝내 저항하는 여성상을 그려 호평받았다. 낙후하고 있는 일본의 현재를 중첩해보면 더욱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이 남성들의 범죄행각은 너무 익숙하다. 사기꾼에게 휘둘리는 우둔함이나 허세를 부리다 도망치는 비겁함은 따분할 정도다.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거짓과 조작은 물론 수순처럼 성범죄가 시도된다. 합스부르크가 초상화 인물 같은 주걱턱 황제는 자기도취까지 뿜으며 끔찍함의 절정을 과시한다.

노부부-가구야의 보호자도 긍정적이지 않은데 약한 존재에 대한 이타심이 가부장의 옷을 입자 황금과 비단으로도 살 수 없는 계급 상승의 욕망으로 변화한다. 그 욕망의 합리화를 위해 가스라이팅을 일삼음은 물론이다. 무지함이 왜 폭력일 수 있는지, 이타심은 지능에 관한 문제기도 하다는 걸 9세기의 옛날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다.

Studio GHIBLI, 2013


이런 제도적 억압은 예법으로 포장해 강요된다. 기모노는 현재도 서양 복식사가 우스운 빠듯한 규칙의 복식이지만 헤이안 시대의 착장은 분량부터 엄청났다. 여덟 겹으로 시작한 예복은 신분이 높아질수록 배수로 더해 입었다. 겐지의 강간 시도를 피해 우츠세미가 도망친 자리에 남겨진 옷들이 매미 껍질* 같았다는 대목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Minj님, 무라사키 시키부의 버티는 나날 https://brunch.co.kr/@minjbook/30


화장법이 거들지 않을 리 없었다. 알려진 대로 이 시기 일본 여성들은 노동하지 않아 땀 흘리지 않는, 고귀한 인형 같은 아름다움을 상징하기 위해 눈썹을 모조리 뽑아야 했다. 이마 위로 과장된 눈썹 자국이 그려졌고, 충치를 방지했다지만 백분을 두껍게 바른 얼굴과 대비되도록 치아는 새까맣게 칠했다. 그 와중에도 여성성이 강조되도록 입술은 도드라질 정도로 붉어야 했다.

때문에 부드러운 선묘와 담백한 색채에도 다카하타 이사오의 가구야가 예복을 벗어던지며 대로를 질주하는 장면은 엄청난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꼬리를 끌며 허물로 남겨진 그녀의 옷들은 절망의 농담 濃淡이다. 원전의 가구야가 버린 것은 오욕칠정이었지만 다카하타 이사오의 가구야는 제도적 코르셋을 버림으로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개인을 보여준다.

성인 여성 예복 주니히토에 十二単, 아름답지만 보기만 해도 한숨;;
오카노 레이코 岡野玲子 <음양사 陰陽師>




새로운 여성

기사도, 뮤즈 운운하며 수치심을 포장이라도 하던 서양에 비해 아시아의 가부장은 항상 당당하다. 청대 말 문화개방으로 대대적인 신지식과 신문물이 유입된 중국에는 새로운 계층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던 걸, 모던 보이’로 파생된 ‘신여성’은 당대 가장 상징적인 계급 출현이었다. 그러나 명칭과 달리 신여성들은 여전히 구제도에 발목 잡혀 있었다.

타자가 바라본 근대 중국에 관한 스케치 <점석재화보 點石齋畵報>의 일화를 살펴보면 대학교육까지 받은 신여성이 집안의 압박을 이길 수 없자 결국 구식 남성에게 시집가기로 한다. 혼례일 아침, 예비 신부는 목을 맨 채 발견된다.

교육이든 자각이든 '알게 된' 여성은 돌아가지 않는다. 당시 여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지도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한 그녀는 죽음으로 권리를 행사한다. 교육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해본 여성들에겐 좌절감도 컸다. 무지가 악행에 당당한 것처럼 회기로 인한 절망은 더욱 짙었다.

점석재화보 點石齋畵報, 목을 맨 신여성



“재산 유무에 관계없이 이슬람교를 믿는 남자가 아홉 살짜리 처녀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페르세폴리스, 시간을 달리는 소녀 https://brunch.co.kr/@flatb201/164


모습을 지우고, 교육과 독서가 우선순위로 금지되고, 오직 쾌락을 위한 생식기로 존재하는 여성.

탈레반과 무관한 곳에 사는 각국의 여성들이 아프간의 여성들만큼 불안하고 절박한 것은 회기로 더욱 잔혹해진 그녀들의 절망을 고스란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빨간 옷의 시녀들을 드라마로 소비할 때 여성들은 혹시 모를 우려와 은은한 위기로서 주시한다. 올림픽 선수단의 성별이 거의 비슷해지기까지 100여 년이 걸렸지만 야만으로의 회기는 십 년이 안 되는 시간으로도 가능하다. 지금의 여성들이 목격자이며 증인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다르지만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같은 질감을 가진다.

우리는 머릿속이 꽃밭인 명예 남성조차 그 공포에 물리지 않길 바란다. 그 공포를 오래전 신화로만 전해 듣는 세대, 그 공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여성 세대가 등장했을 때야 비로소 신여성이라는 명칭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이 옷을 벗고 달리리라, 스스로 선택해 내려온 청명한 바람이 감도는 대나무 숲에서 춤추리라, 돌아가지 않아도 좋을 저 달을 바라보리라. 역사는 그런 희망으로 움직인다지만 지금 이 어둠 속의 우리가 먼저 보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언젠가에 기대어 희미한 반짝임마저 꺼지지 않도록 애쓸 뿐.





@출처/

다케토리 모노가타리 竹取物語


@인용/

*空蝉 (겐지 모노가타리 源氏物語)

**재산 유무에 관계없이..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아자르 나피시)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을 패러디한 조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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