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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Sep 15. 2021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파트너들

잉리드 방 니만, 비에른 베리, 일론 비클란드


경력 단절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게 성취를 넘어 진짜 인생을 돌려준 것은 글쓰기였다. 스웨덴 출판사 라벤 & 셰그렌의 공모전에 응모했던 린드그렌은 계약직 직원으로 근무할 기회를 얻는다. <삐삐 시리즈>를 시작으로 인기작을 연타로 쏟아내며 기획과 매출의 중심에 서게 된 린드그렌은 라벤 & 셰그렌의 파트너가 된다. 한 줄 요약된 신데렐라 스토리 같지만 린드그렌은 이때의 분투를 잊지 않았다.

성공한 시리즈를 명예롭게 만드는 건 결국 가치관을 공유하는 파트너들이다. 회사의 대표가 된 린드그렌은 그녀 자신이 작가로 재도전할 때처럼 파트너들을 발굴하는데도 열정적이었다. 물론 전성기 때의 라벤 & 셰그렌은 좋은 인력이 확보되어 있었다. 린드그렌의 커리어 초기 <방랑자 라스무스>, <소년 탐정 칼레> 시리즈의 일러스트를 그린 에릭 팜퀴스트 Eric Palmquist나 중, 후반기 <순남앵>, <사라진 나라>의 일러스트를 그린 마리 톤퀴비스트 Marit Törnqvist를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협업의 지속성, 작품 자체의 기준을 만든 대표성을 볼 때 잉리드 방 니만, 비에른 베리, 일론 비클란드야말로 가장 앞줄에 세울 파트너들이다.

순서대로 잉리드 방 니만, 비에른 베리, 일론 비클란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아이들 https://brunch.co.kr/@flatb201/277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파트너들 https://brunch.co.kr/@flatb201/278

#로타와 자전거, 좋은 계절 https://brunch.co.kr/@flatb201/160

#개구장이 미셸, 오늘의 목각 인형 https://brunch.co.kr/@flatb201/279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소년의 행방 https://brunch.co.kr/@flatb201/282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고양이 꽁치와 악당들의 설탕 쿠키 https://brunch.co.kr/@flatb201/283




잉리드 방 니만 Ingrid Vang Nyman

(잉그리드로 배워 온 세대지만 현행 표기법에 맞춥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삐삐에게 영혼을 불어넣었다면 생명을 준 것은 잉리드 방 니만이다. 스웨덴 초판본의 일러스트레이터여서가 아니라 니만은 린드그렌의 문장 속에서 삐삐를 끄집어내어 이 캐릭터의 기준을 만들었다.

니만의 커리어는 린드그렌과도 유사하다. 여자아이들은 배제되던 시대임에도 니만의 부친은 딸의 학업을 독려하고 공평하게 양육하려 애썼다. 니만은 소녀시절에도 드레스 업 대신 바지를 입은 채 사내아이들과 섞여 놀 수 있었다. 12살 때는 남아메리카로 탐험을 떠나겠다며 가출까지 했다. 어릴 적 썰매 사고로 오른쪽 시력을 잃은 후 병약해진 니만은 일찍 사망한 부친으로부터 가족력인 결핵을 물려받는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 한 니만은 홀로 아들 펠레를 데리고 스웨덴에 정착한다. 일러스트뿐 아니라 조각, 판화, 만화 등 다재다능했던 니만은 아들을 모델로 소품을 작업하며 근근한 생활을 이어나간다.

아들 펠레를 모델로 한 니만의 유화


니만에게는 이누이트 친척들이 있었는데 그녀의 창작활동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민속학과 박물학에 관한 니만의 관심은 중국, 아프리카, 인도 같은 다른 문화와 인종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자연과 동물 또한 좋아해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커리어의 활로도 그녀의 이누이트 사촌 Pipaluk Freuchen이 일간지에 기고한 <에스키모인들의 크리스마스 Julafton bland eskimåer, 1944> 삽화로 시작한다.

니만은 독자의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창작물이 고른 수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기심만큼 새로운 인쇄 기술에 정통했던 니만은 구식 석판화와 수채화가 여전하던 당시의 시장에서 다양한 기법들을 시도했다. 특히 또렷한 윤곽선의 고채도 석판화를 선호했는데 음영 Shade을 배제한 채도 대비만으로 원근법을 구사해냈다. 이런 기법들은 현재에 와서야 보편화된 시도였고 니만의 일러스트는 스웨덴 아동 도서계 전반에 모더니즘적 영향을 미쳤다.

Summertime by Franz Berliner, 1968


당시의 니만이 사실상 커리어 초기의 여성 창작자임에도 그녀의 개성을 단박에 알아본 린드그렌은 삐삐의 초판 일러스트를 의뢰한다. 매거진용 만화였던 초기 삐삐는 빠른 회전율을 요구했는데 니만의 기법은 인쇄에 용이해 작업 속도까지 빨랐다.

니만에 관해 자주 언급되는 항목은 ‘높은 보수 요구와 저작권 고수로 인한 트러블’이 있는데 니만의 작업과 아티스트로서의 자부심을 좋아했던 린드그렌은 무척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착취가 여전한 이 분야를 떠올려 볼 때 스타일뿐 아니라 창작권 수호에 관해서도 진보적인 작가였다. 짧은 기간 독특하고 방대한 작품세계를 구축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괴롭혀온 지병에 우울증과 협심증이 더해져 니만은 43세에 자살한다.

삐삐 롱 스타킹 시안(좌), TV시리즈 프로필 (우)




비에른 베리 Björn Berg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게 협업을 의뢰받은 시기의 비에른 베리는 이미 유명 삽화가였다. 린드그렌 또한 <삐삐 시리즈>의 성공으로 본격적인 창작을 열어가던 시기였다.

커리어를 모색하던 아버지로 인해 베리는 어린 시절을 뉴욕에서 보냈다. 베리의 아버지는 당시 화려하게 피어나던 미국 문화의 주도자가 될 창작자 다수와 교제한다. 그중에서도 SVA에서 수학 중이던 구스타프 탱그렌 Gustaf Tenggren은 가족 모두의 친구였다. 어린 시절 베리의 우상이자 롤모델이던 탱그렌은 스웨덴에서의 인지도를 뒤로 하고 뉴욕에 입성한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뛰어난 실력으로 빠르게 자리 잡으며 자신의 오리지널 시리즈도 발표한 탱그렌은 월트 디즈니의 <백설공주>, <밤비>, <피노키오> 등의 제작을 주도하며 미국 애니메이션의 황금시대를 이끈다.

구스타프 탱그렌의 <Snow White> 캐릭터 시안(좌), 탱그렌에게 영향 받은 베리의 초기 일러스트 <Tomten>(우)


스웨덴으로 돌아와 성장한 베리는 광고대행사에 재직하며 드문드문 삽화를 게재하다 스웨덴 대표 일간지 Dagens Nyheter의 르포 타주 삽화가로 활동할 기회를 얻는다. 사진 대신 삽화가 미디어를 주도하던 시기 일간지 삽화가라는 직업은 글로벌 취재 여행의 행운까지 선사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베리는 평생 여행을 좋아하게 된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오마주 한 <8일간의 세계일주>를 발행하기도 했다. 편집자 알프 헨릭손 Alf Henriksson의 지원뿐 아니라 작가 알프 프로이센 Alf Prøysen과 <작은 티스푼 아주머니> 시리즈를 협업하면 인기를 공고히 한다.

#작은 티스푼 아주머니, 보통날의 팬케이크 https://brunch.co.kr/@flatb201/261

Dagens Nyheter 드로잉


유명세를 얻기 전부터 베리는 다양한 관심사만큼 다재다능하고 부지런했다. 주업인 카툰뿐 아니라 회화, 조각, 공예 심지어 어린 시절 취미인 나무 조각까지 탁월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100장씩 발송했다고 한다. 자신처럼 아티스트였던 아내의 헌신과 조언 아래 가족과 돈독했던 베리는 자주 그들을 모델로 삼았다.

린드그렌에게 새 주인공 ‘에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 초상화도 베리가 직접 그린 아들 토르뵤른이었다. 린드그렌이 보낸 초안에 푹 빠진 베리는 작품의 배경이 된 스몰란드로 날아가 방대한 양의 스케치를 해온다. 일간지 삽화로 다져진 날렵한 잉크 드로잉과 담백한 수채화, 무엇보다 기억만큼 온전하게 복구된 스몰란드의 정취에 린드그렌은 더없이 흡족해했다. <뢴네베르가의 에밀>이 시작된 순간이다.




일론 비클란드 Ilon Wikland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공통된 철학을 가진 파트너들을 선호했다. 그중에서도 일론 비클란드는 린드그렌의 창작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고 추종했다. 파트너이자 멘토, 친구였던 린드그렌은 비클란드에게 가능성을 선사했다.

부모가 이혼하자 비클란드는 고작 8살의 나이에! 반려견 티토와 단둘이! 이웃 국가의 외조부모를 찾아가야 했다. 무책임한 부모와 달리 외가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 비클란드는 명랑하고 행복하게 성장한다. 이때의 목가적 풍경과 즐거운 일상은 그녀 작품의 외형적 모델이자 기반이 되어준다. 그러나 유럽에는 세계대전의 기운이 번지고 일가는 약소국인 에스토니아를 탈출해 스웨덴에 정착한다.

미술가였던 이모의 영향으로 입학한 미술학교에서 타이포그래피, 판화, 북 디자인 등을 배우며 비클란드는 자신의 방향성에 눈을 뜬다. 학과를 너무 좋아했던 비클란드는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지만 나치즘 확산과 인플레 속에 더 이상 학업을 이을 수 없었다. 북 디자인을 특히 좋아했던 비클란드는 전공을 활용할 수 있던 인쇄소에 취업한다. 이때의 제책 Bookbinding 공정에 관한 실무 경험은 이후 커리어의 자산이 된다.

비클란드가 즐겨 그린 마을의 전경(좌)과 에스토니아의 외갓집


동세대 여성 창작자들처럼 비클란드 또한 쉽게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이들을 모델로 습작을 이어가던 비클란드는 라벤 & 셰그렌에서 일하던 동기의 주선으로 인터뷰 기회를 얻는다. 당시 린드그렌은 출판사 주요 편집진이었고 신작 <미오, 나의 미오>의 일러스트레이터를 고르던 중이었다. 비클란드는 학생 시절 과제물 <미운 오리 새끼>를 보강해 포트폴리오를 꾸리고 어린 딸과 함께 출판사를 방문한다.


“내가 찾던 것을 찾았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어요. 동화처럼 보이도록 동화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 말이에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미술학교를 두 학기밖에 다니지 못해 기교는 부족했지만 비클란드는 성실한 습작으로 성장을 이뤄나간다. 거듭된 시안 요청에도 항상 꾸준했을 뿐 아니라 시안 작업마저 즐거워했다고 한다. (악덕 클라이언트 만났으면 딱 착취당하기 좋은 스타일;;) 초기작들은 섬세한 관찰에 기반한 동글동글한 인물들, 짧은 선 위주의 흑백 펜화지만 점차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시도한다. 니만에게 영향받은 것처럼 보이는 고채도 일러스트 시기를 지나 파스텔과 유화 혼합을 즐겨 사용한 후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아름다운 장면들이 만들어졌다.

#로타와 자전거, 좋은 계절 https://brunch.co.kr/@flatb201/160


사실상 무명작가였기에 비클란드는 <미오, 나의 미오> 이후 한동안 일이 없었다. 그러나 린드그렌은 신뢰 속에 의뢰된 후속작들로 점차 인지도를 높여간다. 린드그렌의 작품을 가장 많이 맡은 일러스트레이터였던 비클란드는 정서적으로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파트너라고 생각된다.

린드그렌, 니만, 베리처럼 자신의 아이들에게서 영감 받았고 어린이들의 명랑함뿐 아니라 외로움, 소외감, 고립감이 성인과 동등하다고 여겼다. 비클란드는 초안을 곱씹어 낭독하며 이미지로 해석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자신의 오리지널 시리즈에도 같은 방식을 고수했다는데 린드그렌의 마음에 쏙 들지 않을 수 없다. 린드그렌의 필모 중 <로타 시리즈>처럼 사랑스러운 작품 외에도 어둡고 철학적인 작품들도 다수 맡은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공통의 정서를 모색하는 창작자들을 선택하고 지속적으로 협업했다. 세 창작자 중 성별로 인한 시대적 특혜뿐 아니라 가장 평탄한 커리어의 비에른 베리 조차 전통과 자연에 관한 가치관에 있어 린드그렌과 같은 관점을 공유했다.

특히 린드그렌은 자신이 커리어를 시작하던 때를 잊지 않고 성별과 환경의 제약으로부터 여성 창작자들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그 응원에 힘입어 비슷한 좌절의 역사를 가진 창작자들이 자기 안의 온전한 창작 구현을 위해 분투했다. 서로를 지지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연대로서 손 내밀었음은 이 작품들이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 이유를 확인시켜 준다. 이런 방식의 해피엔딩이 이 어둠 속에도 우리가 노란 벽돌길을 깔며 걸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주리란 것도.





@출처 및 일부 인용/

Astrid Lindgren Official https://www.astridlindgren.com

Bildmakarna Berg http://www.bildmakarnaberg.se

Svenskt Kvinnobiografiskt Lexicon, Helene Ehri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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