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사소한 보물들이 나오는 이야기가 어떻게 재미없겠는가? <방랑자 라스무스>는 반짝이는 5요레 동전, 까만 고양이, 이름부터 즐거워지는 봉봉처럼 어린 시절의 선망을 우정과 연대의 시그니처로 활용한다. 크림봉봉처럼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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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함을 싫어했던 어린이는 그리 흔치 않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무서워했을 수는 있지만 사탕을 무서워하는 어린이는 없다. 흔해 보이지만 이미 세계를 장악한 사탕은 어린이들의 첫 번째 재화이다. ‘Good’을 의미하는 ‘Bon’이 두 번 반복되는 단어가 사탕인 것은 너무 당연하다.
발음도 귀여운 동화책 속의 ‘봉봉 Bonbon’은 종종 종잡을 수 없었다. 양 볼이 부풀어 오를 만큼 커다랬다가,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는 구름 같은 폭신함이었다가, 쫀득하게 늘어지는 캐러멜이 흘러나왔다가.. 분명 각기 다른 형태일 달콤한 것들이 봉봉으로 묘사되었다. 서양 어린이들이 ‘달고나’와 ‘뽑기’의 차이를 직관적으로 알 수 없듯 동아시아 어린이는 동화책마다 튀어나오는 봉봉을 어렴풋이 더듬어 볼 뿐이었다. 캔디보다 설레는 기대감을 주는 마법의 단어였다.
중역이 아니라도 봉봉이란 명칭은 초콜릿 캔디류를 통칭하며 범용적으로 사용되었다. 전통적 의미의 봉봉 French Bonbon은 템퍼링 된 반질반질한 초콜릿 코팅 안에 부드러운 크림 형태의 가나슈 페이스트를 첨가한다. 템퍼링은 적정 온도에 맞춰 초콜릿의 텍스처를 안정화시키는 공정이다. 완성된 초콜릿의 퀄리티를 가르는 섬세한 작업이다.
속재료인 가나슈로는 밀도가 다른 초콜릿 크림이 사용된다. 지리적 확장으로 향신료 수급이 원활해지자 비싼 가격에도 바닐라 크림이 인기를 얻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말린 과일과 견과류, 달콤한 리큐르를 섞는 유행이 고착되었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크랜베리와 호두가 여전히 선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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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무스가 오스카에게 호감을 잔뜩 담아 건넨 봉봉은 영문판에서 버터스카치 Butterscotch, 또 다른 판본에선 막대사탕 Lollipop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잠깐, 납작한 드롭스도 막대사탕도 모두 단단하잖아?
스웨덴판 원전에서는 스웨덴식 토피인 ‘크넥 Knäck’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문 구판에서 주로 Christmas Butterscotch, Swedish Butterscotch로 번역된다. 본격적인 설탕 수급으로 파생된 당밀 Molasses은 설탕과 꿀 사이에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당밀과 버터를 기본으로 하는 캔디류의 레시피는 대동소이해 보이지만 각기 다른 농도와 밀도를 가진 백, 황, 흑설탕 및 시럽에 의해 종류가 갈라진다. 또 굽는 온도에 따라 쫄깃 끈끈한 퍼지 Fudge 스타일부터 깡깡 부숴 먹는 크랙 토피 Crack Toffee 등으로 나뉜다.
고전적인 버터스카치는 퍼지와 토피의 사이의 경도였다. 과일 설탕 절임에 코팅되는 글라세 Glace로도 활용되며 가볍게 부숴먹거나 녹여먹었다. 균열 Crack을 의미하는 명칭만 보면 스웨덴의 초창기 크넥도 단단한 스타일에 가까웠을 것이다. 다만 크넥은 견과를 섞어 다소 쫀득한 상태로 건조하는 명절 필수 디저트였기에 Swedish Butterscotch로 불렸다.
그런데 라스무스가 사 온 봉봉은 ‘다섯 개의 커다란 크래커 Fem Stora Knäckstrutarna’라고 표기되어 있다. 종이 포장지를 돌려 벗기는 스틱형 초콜릿 ‘Knäckstrutar’로 폭죽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크래커 Cracker라고 부른 것이다. 가나슈가 흘러내리는 전통적인 초콜릿이 아닌 범용적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잡화점 주인이 건넨 초콜릿은 퍼지 형태의 녹여 먹는 초콜릿으로 추정된다. ‘초클라카카 Chokladkaka’는 초콜릿류 디저트를 가리키는 범용적인 명칭으로 사용된다.
신지식 번역가는 포일 은박지를 ‘납종이’라고 의역했다. 197, 80년대라고 해도 초콜릿 은박지가 낯선 것 일리 없는데 왜 이 단어를 사용한 걸까? 번역가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납종이라는 단어는 작은 보석 같은 무게감을 실어준다. 대단찮은 호의로 건네진 조그만 시식용 초콜릿이래도 라스무스에겐 뜻하지 않게 얻은 보석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 설레는 무게감이 배어있는 것 같아서 이 문장이 너무 좋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라스무스가 오스카와 함께 ‘고양이 노래 Kitten Song’를 만드는 부분은 개정판에서 삭제되었다. 과거의 동화들과 달리 이제는 운문이 선호되지 않고 번역판을 어색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 노래’는 공통의 모험 아래 서로에게 스며든 라스무스와 오스카가 ‘본격적으로 함께’ 만들어낸 정서이며 둘의 미래에 대한 복선이다. 원전의 애독자로선 린드그렌의 조밀한 설계가 다소 훼손된 듯한 느낌이 들어 내내 아쉽다.
‘봉봉’이 라스무스에게 일상적 기쁨을 자각시켰다면 ‘고양이’는 행복의 구체적인 형태를 그리게 해 준다. 무엇도 소유할 수 없던 고아 소년이 마침내 인생 고양이를 만나게 된 대목에 이르면 덩달아 행복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라스무스의 상상 속 고양이가 먹는 생선은 꽁치가 아닌 ‘청어 Sill’이다. 청어 또한 동화책에 빈번히 등장하던 미지의 음식이었는데 계몽사 전집에선 아시아에서 좀 더 친밀한 생선인 꽁치로 의역했다. 스웨덴 전통 발효 청어 ‘슐스트뢰밍 Surströmming’은 봄에 조어한 산란기 청어를 발효시킨 보존식으로 홍어처럼 특유의 지독한 향취를 뿜는다. 청어 자체가 기름기가 많고 과거 소금의 단가가 비쌌기에 옅은 소금물에서 염장처리 해 삭혔다.
라스무스가 대접받는 일상식으로의 청어는 간단히 절인 ‘생선 피클 Pickled Herring’이다. 나무통에 소분해두었다 크래커처럼 바삭한 빵인 ‘툰브로드 Tunnbröd’나 ‘크네케브뢰드 Knäckebröd’에 올려 카나페처럼 먹는다. 새콤한 사워크림을 올린 양파 절임에 브리또처럼 말아 씨감자나 으깬 감자를 곁들이기도 한다. 라스무스의 노래 속 고양이가 감자를 함께 먹는 이유도 일상식으로서의 청어를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에선 악당조차도 어린이에게 은근한 친절을 베푼다. 이전 페이지에서 생사를 건 레이스를 펼쳤음에도 아이를 굶기진 않는다. 빼앗긴 동전이 금액 이상의 풍성한 빵 봉투로 돌아오자 살짝 혹 하는 라스무스의 갈등에는 아이다운 천진함과 소박한 즐거움이 드러난다.
어린이가 함부로 다뤄지는 것을 경계한 린드그렌은 아동문학다운 여백에 충실했다. 이 작품의 첫 번째 빌런 격인 효오크 원장도 따지고 보면 규칙에 충실한 직장인일 뿐이다. 고아원에서 도망치던 라스무스는 두려움과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애틋함을 품은 채 효오크 원장의 그림자를 지켜본다. 비록 어린 라스무스는 깨닫지 못하지만 성인 독자들은 고단한 직업여성으로서의 효오크 선생을 무작정 악당으로 규정짓진 못한다. 그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어린이를 굶길 리 없다. 감금된 상태에서도 라스무스는 맛있는 빵들을 종류별로 맛본다. 차갑고 고소한 우유까지 곁들여서!
시나몬롤 Kanelbulle (Cinnamon Bun)
스웨덴식 시나몬롤 ‘카니엘불레 Kanelbulle’는 미국식 레시피에 비해 담백하다. 스웨덴식 커피 브레이크에 해당하는 피카 Fika 외에도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간식빵이다. 국내 단행본에서는 모양에 중점 둬 롤빵으로, 영문판에서는 번철에 구워내는 공정을 기준으로 둔 건지 Bun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리프가 사 온 계피 빵은 ‘길고 가느랗다’고 묘사돼있다. 아마도 스틱 형태의 ‘카니엘불레 핀브뢰드 Kanelbulle Pinnbröd’로 추정된다. 꼬치나 소시지에 돌돌 만 반죽을 불에 돌려가며 구워 먹는 간식이다. 야영용 비상식에서 안착되었다고 한다.
설탕쿠키 Sockerskorpor (Sugar Cookie)
영문판에서 슈거 케이크 Sugar Cake로 표기된 설탕쿠키는 달콤한 크러스트 쿠키인 ‘Sockerskorpor’이다. 기존의 아몬드 파우더 쿠키와 유사해 보이지만 17세기 이전부터 전해진 스웨덴 전통 디저트로 초기에는 효모로 질감을 내고 향신료를 첨가했다. 바삭하게 구워낸 후 굵은 설탕 위에 굴려 마무리하는데 스푼으로 반죽을 떠 스푼 쿠키로도 불린다. 설탕쿠키라는 명칭이 마무리에서 기원한 것은 아니다. Sockerskorpor의 주요 향신료 카다멈 Cardamom은 약간 달콤한 향취를 풍긴다. 근대 이전의 디저트들은 아무래도 특별한 시즌을 위해 만들어졌다. 현재야 일상적으로 쓰이는 향신료들이지만 대항해시대로 수급 가능해진 귀한 재료들이었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고려하면 라스무스의 설탕 쿠키는 효모가 아닌 베이킹파우더를 사용한 일상 쿠키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후추쿠키 Pepparkakor (Swedish Ginger Bread)
이름부터 재채기 한 번 하게 될 것 같은 후추쿠키 ‘페퍼카커 Pepparkakor’는 영문판에서 스웨덴식 진저브레드 Swedish Ginger Bread로 표기되어 있다. 지역적 재료가 중점 되는 페퍼카커는 우리가 익숙한 영미권 진저 브레드와 다소 차이가 있다.
영미권의 전통적인 진저 브레드는 생강향이 밴 쫀득한 당밀 쿠키이다. <메리 포핀스>의 존과 메리가 받은 진저 브레드는 금빛 별이 가득한 넙적하고 두툼한 타입이었지만 대개는 적당히 단단하고 납작한 쿠키이다. 모양내기가 용이해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로 애용되어 왔다.
페퍼카커는 기존의 영미식 진저 브레드 보다 훨씬 얇고 단단하며 컬러도 짙다. 역시 아이싱을 입혀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로 애용해왔다. 한때 폭풍유행한 ‘이케아 말 쿠키-달라호스트 Dalahäst Pepparkakor’도 페퍼카커를 베이스로 한다. 아이싱 스타일도 차이가 있는데 기존의 진저 브레드가 화려한 컬러링을 동반한다면 스웬덴 전통 아이싱은 페퍼카커의 짙은 갈색과 또렷이 대비되는 클래식한 흰색 패턴들이 애용된다.
대동소이해 보이는 디저트 레시피들은 ‘킥’이 되는 비법으로 인해 각기 다른 매력을 드러낸다. 기존의 진저 브레드는 사탕수수 시럽과 생강의 알싸함으로 풍미를 올린다. 페퍼카커 또한 향신료와 시럽이 주요 비법이지만 전통적인 페퍼카커는 ‘골든 시럽 Golden Syrup’이라 불리는 자작나무 수액 채집 당이 사용된다. 이름에서 유추되듯 사탕수수 당밀보다 연하고 약간의 알싸한 향취를 품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따뜻한 기운을 품었다고 여겨진 ‘검은 후추 Black Pepper’를 가미해 스파이시함을 한껏 올린다.
크리스마스 레시피에 애용되는 향신료들은 대개 동방박사의 선물을 의미하는 기독교식 상징이다. 향신료가 귀했던 시절 검은 후추를 가미해 명칭과 의미를 고착시킨 레시피의 기원은 사실 스웨덴이 아닌 노르웨이라고 한다.
근대로 접어들며 설탕이 대중화되자 북유럽산 수액보다는 희석된 정제당이 애용되었다. 메이플 시럽으로 대체해도 유사하다고 한다. 향신료 또한 검은 후추보다 덜 매우면서도 스파이시함을 유지할 수 있는 소재들이 선택되었다. 전통 레시피의 따뜻한 기운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계피 Cinnamon, 생강 Ginger, 정향 Cloves을 듬뿍 갈아 넣는다. 그러나 라스무스의 후추쿠키는 달라호스트 쿠키처럼 일상 간식으로 안착된 얇고 납작한 쿠키로 추측된다.
@출처/
방랑자 라스무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Rasmus på Luffen, Astrid Lindgren, Rabén & Sjögren, 1956, 일러스트 에릭 팜퀴스트 Eric Palmquist)
Rasmus på Luffen (Norstedts, 2004, 일러스트 에릭 팜퀴스트 Eric Palmquist)
Rasmus and the Vagabond (Oetinger Verlag, 1956, 번역 Gerry Bothme, 일러스트 에릭 팜퀴스트Eric Palmquist)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 전집 34/50,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계몽사, 1981, 번역 신지식, 일러스트 전성보, 홍성찬)
라스무스와 방랑자 (시공주니어, 2020, 번역 문성원, 일러스트 호른스트 렘케 Horst Lem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