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페에서 책 읽기 Dec 25. 2020

크리스티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어린 시절의 책들이 데려다주는 곳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런 세계 중 대부분의 어린이에게 호불호 없이 사랑받는 것은 온갖 음식 목록 아닐까? 나 또한 성인이 되면 흥청망청 먹어보리라 결심한 미지의 음식 목록을 품고 다니던 어린이였다.

상상으로 인한 결핍은 절대 해소되지 않는다. 그 결핍은 실패 후에도 새로운 시도로 확장된다. 미성년 시기 글로 접한 분야들이 이토록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기도 하다.

#호첸플로츠 시리즈, 상상 속의 미각 https://brunch.co.kr/@flatb201/54


애거서 크리스티의 디테일은 분산에도 몰입에도 한결같다. <버트램 호텔에서 Bertram's Hotel, 1965>의 범인이나 동기는 까먹어도 클로티드 크림의 꾸덕함만은 언제나 생생하다.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도 단연 이런 디테일을 뽐내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포와로나 진귀한 보석, 흰 눈 아래 비밀 무엇도 주인공의 자리를 얻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크리스마스, 그것도 클리셰처럼 전통적인 영국식 크리스마스이다. 읽다 보면 ‘영국 음식 최악’이라는 진부한 밈이 새삼 지겨워진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에브니 홀에서 보낸 크리스마스를 내내 사랑했다. 엇갈리는 감정과 꿍꿍이를 품은 어른들 사이에서 무지막지하게 먹고, 마음껏 웃고 떠드는 어린이들에 관한 스케치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행복한 유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중편으로 개작된 1960년 판본을 번역한 해문 판본은 원전 수록분 중 <패배한 개 The Under Dog>, <24마리의 티티새 Four-and-Twenty Blackbirds>가 빠져있지만 시즌 분위기를 돋우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서문이 온전히 실려있다. 코스 요리에 빗대어 소개되는 수록분 중 제목부터 당당히 메인 디쉬인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에는 에르큘 포와로가 등장한다.

자국이 보유한 작가들을 곰탕처럼 우려먹는, 크리스마스면 특히나 힘 빡 주는 BBC가 어째서 이 작품의 새 버전을 안 만드는 걸까? 세대차이와 계급주의마저 ‘전통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녹여 버린 이 작품은 다소 예측 가능함에도 매번 꼼꼼히 읽게 된다. 말했잖은가, 범인도 동기도 중요치 않다. 구식 카드 속 일러스트 같은 대저택의 크리스마스 만찬에 고고하게 불타는 푸딩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심지어 흰 눈까지 펑펑 내려 모든 것을 도드라지게 한다.





(영문 원전과 해문판 표기를 따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스케치는 20세기 초 크리스마스 풍경이다. 근대 이전, 그리고 현재와도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정통이라는 엄포에도 전통은 늘 유행을 덧대 왔다. 여전히 민스파이를 고르며 크래커를 뜯지만 가족 연극을 하는 집은 이제 없다. 영국식 크리스마스, 특히 정찬이 현재와 같은 프레임을 갖추게 된 것은 빅토리아 아 시기이다. 강력한 권위와 부강함의 낙관에 취해있던 제국은 온갖 관습마저 치렁치렁하게 확장해두었다. 이 글에서는 디저트만 살펴보겠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마치 포트넘 앤 메이슨 목록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요.


엘바스 플럼과 칼스배드 플럼, 설탕에 절인 과일과 생강 Elvas Plums & Carlsbad Plums, Crystallized Fruit and Ginger

엘바스와 칼스배드는 우리가 떠올리는 자두로 만든 설탕절임 과일이다. 반짝거리는 당의 Glace를 입힌 끈적한 시럽 조림과 우박 설탕을 입힌 스타일 모두 인기가 많았다. 특히 일조량이 풍부한 엘바스의 과일들은 여전히 선호도 높은 브랜드이다. 이 디저트는 크리스마스 클래식인 <호두까기 인형>에서 착안한 마케팅이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인기 넘버인 ‘설탕 요정의 춤 Dance of the Sugar Plum Fairy’ 주인공이 바로 이 설탕절임이다.

카테고리가 한정적이던 시절 대중적인 디저트로 설탕절임만 한 것이 없었다. 향긋함과 훈훈한 기질을 지닌 생강과 계피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클래식으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소피 이야기, 오늘의 과일 설탕절임 https://brunch.co.kr/@flatb201/20 

#호두까기 인형, 어젯밤의 신기루 https://brunch.co.kr/@flatb201/116

Fortnum and Mason Elvas Plums


민스파이 Mince Pie

어릴 적 동화책에 심심찮게 나오던 민스파이는 대부분 고기 파이라는 주석이 붙어있었다. 성인이 되어,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 만나게 된 민스파이들은 디저트 스타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영국에선 어드밴트 캘린더가 경쟁적으로 쏟아져 계절을 환기시킨다.

고전적인 민스파이는 말린 과일과 향신료, 잘게 다진 고기를 페스트리 형태로 구워내던 중동의 요리법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 전파된 것으로 본다.

계급 사회답게 영국 중상류층은 여러 번 치대야 하는 퍼프 페스트리 생지에 고기 필링이 (흥청망청 버터와 고강도 반복 노동, 비싼 육류 필링!), 민간에선 쇼트 브레드 생지에 자투리 고기나 부재료가 필링으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생지 모양은 보관에 더 용이한 타르틀렛 쪽에 가까운데 파이로 명칭이 정착된 것 역시 초기 레시피에서 기원한다. 거대한 사각 페스트리 형태는 장식성이 가미되며 뚜껑이 딸린 타르틀렛 형태로 안착된다.


민스파이가 크리스마스 시그니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중요한 재료인 향신료 덕분이다. 크리스마스 레시피마다 애용되는 계피 Cinnamon, 정향 Clove, 육두구 Nutmeg는 동방박사의 세 가지 선물을 상징한다. 아직 향신료가 비쌌던 시기 사치스러운 디저트에 당위를 부여하기 위한 핑계가 아닐까도 싶다. 근대에 접어들며 지리적 확장과 식민지 수탈로 향신료 대량 수급이 쉬워지자 필링도 달콤한 쪽에 맞춰진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종종 당근과 민스파이가 짝꿍을 이루는 것이 궁금했는데 이 역시 마케팅으로 인한 유행이다. 빠듯한 밤을 보낼 산타와 루돌프를 위한 간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진짜 맛있는 크리스마스 푸딩을 만들려면 크리스마스가 되기 몇 주 전에 미리 푸딩을 만들어 놓고 충분히 재어놔야 한답니다.

.. 오래 재어두면 둘수록 푸딩의 맛은 더 좋아지게 되지요.


플럼 푸딩 Victorian Plum

오래전 책들은 물론이고 현재에도 여전히 ‘자두 Plum’로 번역되는 이 플럼은 자두가 아니다. 알려진 대로 빅토리아 시기 건포도 Raisins를 의미했던 단어가 고유명칭으로 안착된 것이다. 18세기 해상무역과 식민지 개척으로 설탕이 대중화되기 전 달콤한 맛의 최상위는 역시 꿀이었다. 부족한 수요에 건포도처럼 좀 더 저렴한 말린 과일들로 단맛을 보강했다. 표면에 꿀을 입힌 묵직한 육류 요리를 의미했던 이 초기 푸딩들은 면포로 감싸 도기에 쪄내는 레시피가 발전하면서 달콤함이 강조된 디저트로 파생된다.

정통 빅토리안 푸딩 또한 숙성시킨 단짠 고기 푸딩으로 건포도가 첨가된 고기 죽이었던 중세 시대 ‘프루멘티 Frumenty’로 부터 기원한다. 저장에 용이했던 견과와 말린 과일을 아낌없이 넣은 고기 푸딩은 여러 개 만들어 신년 이후에도 내어 먹는 겨울 저장식으로 고착된다.

육중하고 동그란 모양은 Figgy Pudding이라는 전통적인 애칭 외에 대포알 Cannon-ball로도 불렸다. 상단은 예수의 면류관을 상징하는 홀리와 미슬토가 올라가는 것이 의례적이었다.


Make Victorian Plum, Kenny Meadows, 1848



은쟁반 위에는 크리스마스 푸딩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놓여 있었다. 푸딩은 커다란 축구공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 푸딩 위에는 승리를 나타내는 깃발처럼 홀리 가지 하나가 꽂혀 있었고, 그 둘레에서는 푸르고 붉은빛을 내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꼭대기에 홀리와 미슬토 모양이 붙어있는 도자기 틀인데, 크리스마스 푸딩은 항상 그 속에 넣고 쪄냈었답니다. 정말이지 어디서 그렇게 큰 틀을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요즘에는 그렇게 큰 틀은 만들지 않거든요.

..아,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아요.


어릴 적 푸딩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면 젤라틴을 넣어 모양낸 탱글탱글한 커스터드 우유 푸딩을 떠올렸었다. 조금 더 커선 엔젤케이크나 구겔호프 형태라고 여겼다. 공 형태의 푸딩이 우리에게 익숙한 반구 형태로 변한 것은 역시 빅토리안 시기 넘쳐나는 장식성에서 시작되었다. 젤라틴 보급이 용이해지자 정말 온갖 재료의 젤리들이 유행했다. 탱글한 젤리들이 상당 기간 유행하며 도구도 다양해졌고 푸딩의 모양내기에도 이 젤리 몰드들이 애용되기 시작했다.

켜켜이 오랜 시간을 거쳐 완성된 푸딩은 도수 높고 향긋한 브랜디로 만든 버번 소스 Bourbon Sauce에 적셔진다. 푸딩을 흠뻑 적신 따뜻하게 데운 버번 소스에 불을 붙여 내어 가는 때가 고전 크리스마스 만찬의 하이라이트였다.



“하드 소스 Hard Sauce를 드릴까요, 포와로 씨?

“아니, 엠 Em. 또 내 브랜디를 슬쩍해두었군, 그래?” 식탁의 다른 쪽 끝에서 아주 기분 좋은 목소리로 대령이 말했다. 레이시 부인은 남편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보, 로스 부인이 최고급 브랜디를 써야만 한다고 하잖아요.”


푸딩의 풍미를 올려주는 브랜디 버터 Brandy Butter를 의미한다. 하드 소스라는 통칭에서 알 수 있듯 술이 들어간다. 기본 버터 소스에 럼이나 브랜디, 셰리주 같은 풍미가 좋은 주류와 바닐라를 섞어 만들기 때문에 도수가 있다. 뜨거운 음식과 함께 제공해 풍미를 올렸다. 따뜻한 브라우니에 올려 에스프레소와 함께 해도 최고다!! 만찬이 가장 신날 어린이들을 위해선 크림소스나 젤리가 준비되었다.



이 댁에 계신 분들이 모두 부엌으로 들어와서 한 번씩 푸딩 반죽을 휘저으면서 소원을 한 가지씩 빌었으니까요. 선생님,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 내려온 관습이기 때문에 전 항상 그것을 지켜왔답니다.


어린 시절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으로 각인된 부분이었다. 소망과 기원, 메타포화 된 일상의 오컬트, 심지어 크리스마스라는 필터를 장착하고 있으니 어떻게 흥미가 돋지 않겠나!

소원을 빌며 푸딩 반죽을 휘젓는 이 작은 행사는 영국식 푸딩 레시피의 필수 과정이다. 강림절 일요일 Stir-up Sunday-보통 11월 말 경 그해 만찬 참석자들은 장식물이 첨가된 푸딩 반죽 앞에 모인다. 각자의 소원을 빌며 한 번씩 휘저어진 반죽은 다시 재워졌다 크리스마스 만찬에 맞춰 쪄냈다.

Stir-up Sunday


6펜스 은화 Sixpence

푸딩에 첨가되는 뽑기 아이템 중 가장 고전적인 품목이다. 한 해동안 재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이다. 크리스마스 크래커처럼 푸딩에서 은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날 밤의 여흥에서 왕 또는 여왕 포지션을 얻었다고 한다. 빅토리아 시대 식후 여흥이던 가족 팬터마임 및 왕 놀이에서 일종의 혜택이었던 셈이다.

레이디 레이시는 완전무결하게 순수한 은화가 없다는 이유로 10실링짜리 금화를 사용했다.

Victorian Sixpence


반지 Ring

예상 가능하듯 반려자가 나타날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선 한 쌍으로 넣어 연인이 될 이들을 암시한다. 원래도 한 쌍으로 넣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녀딸 사랑이 지극한 귀여운 할머니 레이디 레이시가 일부러 두 개를 넣은 것 아니었을까? 만약 데이빗과 리가 함께 반지를 뽑았다면..;;


독신남 단추 Bachelor’s Button

독신으로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실로 꿰지 않고 맞물려 잠궈 사용하는 남성용 단추이다. 바느질해 줄 여성이나 하녀가 없던 독신 남성과 대학생들이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푸딩용 참으로도 성행했지만 커프스 보다 캐주얼하고 편리해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Bachelor’s Button


골무 Thimble

금속 골무는 독신남 단추의 여성 버전이다.

Thimble


크리스마스 참 Christmas Charm

푸딩 이벤트에 가장 오래 사용된 장식물은 은화, 골무, 단추 같은 작은 일상 소모품이었다. 시즌 이벤트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아예 각각의 의미를 품은 사물이나 재미를 위한 마스코트가 참 Charm 장식 형태로 발전했다. 전통적인 상징물 외에 이후로 여러 형태의 크리스마스 참이 유행했다.

닻 장식 Anchor은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경고, 위시 본 Wishbone은 행운을 점칠 때 쓰는 Y자 모양 뼈로 즐거운 일에 관한 예고이다. 극 중 콜린은 돼지 Pig를 뽑는데 아마도 돼지 모양의 참 장식물이었을 것이다.



에르큘 포와로는 즐거웠다. 그는 정말 즐거웠다. 그는 자신이 아주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의무에 가까운 선물 발송도 끝내 두었고 케이크를 퍼먹으며 나의 개와 뒹굴거린다. 술렁거림에 기대어 이렇게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나간다. 나쁘지 않다. 적어도 오늘은.

매해 돌아오지만 매번 다른 매일처럼 복기와는 다르더라도 범상하고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길 바라본다. 이 낙관적인 흔들거림을 내년에도 소중한 이와 누릴 수 있길, 보호받아야 하는 이들이 상처받고 산화되는 일이 줄어들길, 그런 선물 같은 새해가 기다리고 있길 바라게 되는 크리스마스이다.





@출처/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애거서 크리스티 (The Adventure of the Christmas Pudding and Selection of Entrée, 1960)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해문, 1989, 번역 황해선)




            

작가의 이전글 코니 크리스마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