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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Dec 23. 2015

소피 이야기, 오늘의 과일 설탕절임


어린 시절의 잡동사니에는 낙관적인 기대가 배어있다. 무의미해 보였던 하나하나가 모여 특정한 시기가 된다. 무엇이 당첨될지 모르지만 어떤 것을 골라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런 기대로 소피의 하루는 늘 기운차다.

세귀르 부인의 연작 <Les malheurs de Sophie>는 말괄량이 소피의 일상다반사를 그린 프랑스 고전 동화이다. 가정 교육서를 목표로 쓰인 만큼 사소하지만 나쁜 버릇들을 극복하는 작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또 잘못한 일에는 반드시 감당할만한 벌을 주는 엄격함을 통해 일상의 품위와 규칙을 주입한다.

계도라는 또렷한 목적에도 이 시리즈가 상당 기간 프랑스의 국민 동화가 될 수 있었던 건 어린이 자체로서의 생동감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활달한 소피와 사려 깊은 폴의 장, 단점을 통해 각자의 차이와 조화를 관찰한다.


국내에 발간된 <세귀르 명작동화전집>에는 이 연작이 모두 실려있다. 에피소드는 완역되어있지만 아쉽게도 일러스트는 전무하다. 금성 전집에 수록된 <소피 이야기>는 연작 중 1권 <소피는 못 말려>의 에피소드이다. ‘과일 설탕절임’과 ‘당나귀’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다.

#소피 이야기, 오늘의 과일 설탕절임 https://brunch.co.kr/@flatb201/20

#소피 이야기, 당나귀 https://brunch.co.kr/@flatb201/202

#소피 이야기, 소녀라는 문법 https://brunch.co.kr/@flatb201/298

#소피 이야기, 빈티지 일러스트 https://brunch.co.kr/@flatb201/299





파리에서 온 소포가 ‘과일 설탕절임’이라는 소리에 설레는 소피와 사촌 폴. 엄마는 하루에 두 개씩만 먹기로 약속받고 남은 간식을 높은 선반에 간수한다. 그러나 소피는 오후 놀이시간 내내 설탕절임 생각뿐이다. 폴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소피는 의자를 딛고 올라가 선반에 간수된 간식 상자를 열어본다.

모양도 종류도 제각각으로 깜찍한 설탕절임을 들여다보던 소피는 딱 하나만 맛보기로 결심한다. 정신을 차린 것은 과자를 거의 다 먹어 치운 후다. 전전긍긍하던 소피는 ‘쥐가 갉아먹었다’는 엉성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둔다.

그날 밤 죄책감과 불안으로 악몽에 시달린 소피는 엄마에게 준비한 변명 대신 모든 사실을 고백한다. 엄마는 소피의 거짓말을 진작 간파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고백한 점을 봐서 용서해준다. 남은 과자를 한 개도 먹어선 안 되는 벌과 함께.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껴 울적한 소피를 사려 깊은 폴이 위로해준다.




다카하시 마코토의 소녀들

금성 전집으로 <소피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이라면 ‘다카하시 마코토’의 화사한 일러스트를 기억할 것이다.

일본 소녀만화의 기준을 세운 다카하시 마코토는 다수의 일러스트와 만화를 연재했다. 그가 일관되게 그려온 소녀들은 별빛 가득 커다란 눈동자, 길고 하얀 손가락, 복숭아빛 뺨과 금빛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다.

#다카하시 마코토의 인어공주 https://brunch.co.kr/@flatb201/200

 다카하시 마코토의 소녀들



설탕절임 과자를 찾는 모험

발음만으로도 달콤한 ‘과일 설탕절임’은 어떤 과자일까?

소피의 엄마는 파리에서 온 과자를 선반 위에 보관했다. 교통이 미비한 시절이니 과자를 받기까지 최소 하루 이상은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니 콤포트 Comfort 계열이라 해도 수분기가 아주 많은 종류는 아니다.

극 중 언급되는 과자의 형태는 서양배, 자두, 호두, 안젤리카 등이다. 과일을 메인으로 하는 쁘티 푸르 중 수분기가 적은 파테 드 프뤼 Pâte de Fruits는 이름처럼 재료가 될 과일을 다져서 굳힌다. 그래서 내가 기대하고 있던 것은 모양부터 간질간질한 프뤼 데기제 Fruit Déguisé였다. 다카하시 마코토의 일러스트처럼 하나씩 슬리브 처리된 깜찍한 장식 과자 말이다. 더군다나 프랑스는 파티세리의 나라가 아닌가 말이다!


나름 열띤 나의 추리는 시시하게 결론 났다. 원전을 찾아보니 이 과자는 프뤼 콩피 Les Fruits Confits-과일 사탕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여기서 사탕은 캔디라기보단 당의 같은 시럽 표피 Glace이다.

소피의 설탕절임은 표면에 시럽을 입힌 조림 과일이 유력한 것이다.

다소 실망스럽지만 19세기 중반이라면 뭐.. 과일 모양만으로도 어린이들은 충분히 혹했을 것이다.

Pâte de Fruits, Fruit Déguisé, Fruits Confits 네.. 세번째가 유력합니다.. 실망


이 시기 설탕절임 과자는 문화사적으로 여러 함의를 품고 있다.

유럽에서 달콤한 감미료의 역할을 해온 것은 당연히 ‘꿀’이었다. 16세기 중반까지도 설탕은 사치품 중에서도 상위에 랭크된 품목이었다. 지치지 않는 정복전쟁과 식민지 수탈을 통해 진즉에 설탕을 들여오긴 했지만 한미한 공급으로 가격이 천정부지였다. 후추 같은 향신료로 분류된 설탕은 심지어 단맛이 날까 아주 아주 미량만 사용했다고 한다. 과장된 효능은 의약품 영역까지 확대되었을 정도다. 설탕 요정 백종원 쌤이 보았다면 뚱한 표정으로 일갈했을 것이다.


설탕의 호사를 끌어내린 건 바로 ‘차 Tea’였다. 도자기 수집 열풍으로 유럽 상류층의 새로운 도락으로 대두한 티타임은 부차적인 리스트를 확장했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지던 야단법석 설탕 장식들의 인기가 점차 떨어지면서 좀 더 실리적인 사용법이 선호되었다.

영국인들의 차 사랑은 이제 일종의 밈이지만 실제로 차 보급률이 증가함에 따라 설탕의 대중화도 가속화되었다. 진즉에 유라시아와 신대륙 정복에 나선 영국이지만 18세기 말이 되자 차와 설탕의 요구량이 너무 높아져 수출은커녕 국내 공급량을 대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수순처럼 19세기 중반 차별적 관세가 폐지되고 자유무역이 성행하게 된다. 기호품으로 안착되어가던 19세기의 설탕은 유럽 내에서 더 이상 호사스러운 품목이 아니었다. 조금 특별한 디저트 같던 설탕절임은 인기 기호품으로 파급된 최신 유행 디저트였던 셈이다.


소학관 원전. 금성 전집은 재편집에 따라 일부 이미지들이 누락되었다. 인쇄 수준이 너무 차이 난다;; 



세귀르 전집 1권에 해당되는 소피는 말썽 많은 다섯 살이다. 여섯 살이 된 2권에서는 심술궂기까지 하다.

후속작에서 소피는 사고로 엄마를 잃고 재혼한 아버지도 병사한다. 새엄마의 냉대에 상처받아 갖은 말썽을 피우던 소피가 주변의 따뜻함으로 성장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나는 이 후속작에 좀 충격받았다.

다카하시 마코토의 그림으로 인해 이 작품은 단연 화사하고 낭창하게 기억하는 동화였다. 이런 감각을 환기하고자 읽은 속편에서 갑자기 현실이 훅 치고 들어온 것이다.

악의는 없지만 어린아이다운 방만함으로 새 둥지를 부수고, 당나귀를 괴롭히며, 식탐을 부리던 다섯 살의 소피는 부모의 죽음이라는 인생의 씁쓸함을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그늘 하나 없던 다섯 살 소피의 말썽이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여섯 살의 말썽과 대비됐다. 씁쓸한 과자도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었다.


똑같이 달콤해 보이지만 각각 다른 매력의 과자를 두고 소피는 늘 고민한다.

선택의 순간 속 작고 예쁜 과일 절임은 호기심 많은 소녀시절의 하루처럼 느껴진다.

매일 같은 일상에서도 어떤 일이 생길까 설레는, 아주 씁쓸한 맛은 당첨될 리 없는 아직은 달콤하기만 한 시절 말이다.





@출처/ 소피 이야기, 세귀르 백작부인 (Les malheurs de Sophie, Comtesse de Ségur, 1858)

小学館 カラー版名作全集 少年少女 世界の文学, 索菲物语 (小学館, 1972, 번역 오히라 요시코 大平佳子, 일러스트 다카하시 마코토 高橋真琴)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22권 프랑스 편, 소피 이야기 (금성출판사, 1979, 번역 유경환, 일러스트 다카하시 마코토 高橋真琴)

세귀르 명작동화 1권, 소피는 못 말려 (넥서스 주니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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