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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y 16. 2018

인어공주, 내일 이별한다 해도


안데르센의 판타지 중 <인어공주>는 애틋한 감상성으로 긴 잔상을 남긴다. 후대 창작자들은 저마다의 상상으로 이 작품의 신화성을 다져왔지만 대부분 원작의 감상성을 충실히 재현하는데 그친다. 개선된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탐미에 있어 본능적일 여자 어린이들은 여전히 아름답게 포장된 혐오 서사를 주입받는다. 

원작의 진짜 목표는 ‘기독교 세계관에 속하지 않는 초월적 존재들이 이상적 가치를 탐하면 징벌받는다’는 편협한 계도성에 있었다. <분홍신>과 마찬가지로 여성, 심지어 인어나 요정 같은 탈기독교적 존재는 신의 사랑마저 자격을 갖춰야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어공주는 연민에 빠진 왕자에게 서글픈 입맞춤을 보내며 물거품이 된다. 원작의 결말은 몇 백 년간 선을 쌓으면 기독교 윤리 아래 재편될 수 있다는 설정이다. 당시 사회적 기준에는 부합할지 몰라도 종교적 배타성까지 고려해보면 사족 같은 결말이다.

안데르센은 탈기독교적 존재들에게 내리는 징벌로 천국이 아닌 무 無를 부여했다. 자의적 선택으로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는 바람도, 대기도 아닌 어떤 존재가 된다. 심지어 신에게도 속박되지 않아 안데르센의 의도와 다르게 인어공주는 진짜 자유를 얻는다. 멀리서 지켜보아야 했던 반짝이는 불빛 사이를 스쳐, 꼬리를 아프게 조이는 굴 장식 없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언제든 가로지를 수 있게 된 그녀는 진짜 소망에 닿지 않았을까?

그토록 원했던 왕자마저도 닿을 수 없던 먼 풍경과 같은 허상이었음을 깨닫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만나는 수많은 동화들 중에 <인어공주>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애틋하다.

제인 오스틴이나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게 되기 전 여성들은 <인어공주>를 읽는다. 아니, 평생 오스틴이나 울프에 무관심해도 인어공주만은 만나게 된다. 때문에 기억 속의 아름다운 이미지들 외에 과거의 인어공주는 이제 필요치 않다. 하물며 경주마처럼 눈앞밖에 못 보는 왕자야 더더욱 필요치 않다.

변함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이 동화를 펼쳐들 지금의 여자 어린이들에겐 새로운 인어공주가 있길 바란다. 

단죄로서의 물거품이 아닌 자의적 용기로 스스로를 지지하는, 내일 이별한다 해도 후회 없는 선택이 가능한 그런 이야기가 남길 바란다.

워낙도 걸출한 일러스트가 많지만 절판된 책들에 관한 만큼 과거 전집류 중 유명한 일러스트를 골라보았다.




코마미야 로쿠로 駒宮録郎 

금성 전집의 <인어공주>는 처음으로 읽었던 판본은 아니지만 가장 자주 읽을 수밖에 없었다. 코마미야 로쿠로의 이미지들은 흑백 일러스트마저 투명한 농담을 구사한다.

같은 전집의 <백조왕자>, <파랑새>에서도 그 탁월함을 확인할 수 있다.

#코마미야 로쿠로가 그린 북유럽 동화 https://brunch.co.kr/@flatb201/189

#파랑새, 신기루의 이름 https://brunch.co.kr/@flatb201/50




후지이 치아키 藤井千秋

197, 80년대 전집을 읽고 자란 세대라면 작가의 이름은 몰라도 익숙한 일러스트일 것이다. 국내에는 <금성 칼라 텔레비젼 전집>에 수록되어 있었다. 만화 같은 말랑말랑한 분위기에도 뜻밖에 역동적인 구도가 가득하다. 꼼꼼한 데생과 컬러링, 아름다운 인물들은 빈티지한 매력을 물씬 풍긴다. 성인이 된 후 보니 어쩐지 다카라즈카 극의 화려한 분위기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케다 히로아키 池田浩彰

아, 정말이지.. 설명도 필요 없고 감탄도 부질없는 이케다 히로아키의 일러스트이다.

작품마다 고른 완성도를 과시하지만 <집 없는 아이>, <백조왕자>, <인어공주> 만큼은 반드시 챙겨봐 둘 만한 이미지들이다.

<인어공주>는 이케다 히로아키의 특기인 광원 대비를 과감한 여백과 모던한 장식성으로 치환했다.

그다지 소장 욕구가 없던 <세계의 메르헨 世界のメルヘン, 講談社, 1980> 전집 경매를 이 작품 때문에 심각하게 들락날락거린 적 있다. (단권임에도 일찌감치 낙찰에 실패했다고 한다. 쓸쓸..)

#집 없는 아이, 이케다 히로아키의 빛과 그림자 https://brunch.co.kr/@flatb201/119

#백조왕자, 소실점 2 https://brunch.co.kr/@flatb201/217




와카나 케이 若菜珪

역시 당대의 인기 삽화가였던 와카나 케이는 <거대한 무>처럼 유쾌한 우화풍 작품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화려하다기보다는 미니멀한 화풍 때문일 것이다. <붉은 양초와 인어>, <양철 병사>처럼 서정적인 드라마를 독특한 분위기로 그려내는 작가이기에 컬러판을 꼭 보고 싶었는데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그림 없는 그림책>에 수록된 일부 이미지만 확인할 수 있었다.




다카하시 마코토 高橋真琴

무수한 ‘소녀들의 소녀’를 그려낸 다카하시 마코토의 일러스트이다. 작품의 감상성을 절정으로 구사한 작가가 아닐까 한다. 다카하시 마코토의 <인어공주>는 화풍의 미세한 변화를 비교해 보는 즐거움이 있다. 높은 인기만큼 몇 년에 걸쳐 다수의 개정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변화 속에서도 다카하시 마코토의 소녀들은 여전히 말간 얼굴과 별빛 가득한 눈동자로 꿈을 꾼다.

뺄 것 없는 필모를 가진 작가이지만 활달한 분위기로 가득한 <소피 이야기>를 추천하고 싶다.

#소피 이야기, 오늘의 과일 설탕절임 https://brunch.co.kr/@flatb201/20





@출처/ 

인어공주,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The Little Mermaid, Hans Christian Andersen, 1837)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18권 북유럽 편, 북유럽 민화, 인어공주 (금성출판사, 1979, 번역 김영일, 일러스트 코마미야 로쿠로 駒宮録郎)

어린이 교육 칼라 텔레비젼 세계교육동화 3 안데르센 동화, 인어공주 (금성출판사, 1978, 일러스트 후지이 치아키 藤井千秋)

世界のメルヘン, 人魚姫 (講談社, 1980, 일러스트 이케다 히로아키 池田浩彰)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 5, 그림 없는 그림책, 인어공주 (동서문화사, 1976, 번역 곽복록, 일러스트 와카나 케이 若菜珪)

アンデルセン 童話, 人魚姫 (集英社, 1977, 일러스트 다카하시 마코토 高橋真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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