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동화의 다른 한 축-그림 형제와 샤를 페로의 동화들은 지역별 수집을 바탕으로 한다. 화려하고 기괴한 바로크 양식의 <펜타메로네 Pentamerone, 1634>는 채록 민담집의 특징을 형식화했다. 노골적인 성적 함의, 태연한 신체 유린, 관습화 된 폭력이 어우러진 기괴함은 권선징악도 개의치 않는 드라마 자체의 매력을 한껏 드러낸다.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 우리들은 밤새워 춤출 수 있다. 1 https://brunch.co.kr/@flatb201/199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 우리들은 밤새워 춤출 수 있다. 2 https://brunch.co.kr/@flatb201/294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 빈티지 일러스트 https://brunch.co.kr/@flatb201/295
제목에서부터 예감되는 화려한 인상처럼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도 여러 변주가 있다.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 일러스트레이터 마거릿 에반스 프라이스는 미국 동부의 학교들을 거쳐 당시에도 문화 중심지이던 뉴욕에서 활동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미비하던 20세기, 남편 어빙 프라이스의 회사이긴 해도 아트디렉터로서 전공을 활용한 사회적 경력도 이어나갔다. 대충 눈치챘겠지만 이 회사가 현재도 이어지는 완구 회사 ‘피셔 프라이스 Fisher Price’다.
프라이스가 그린 <고전 동화집> 일러스트는 나른한 라인의 산뜻한 판화들이다. 담백한 컬러 아래 프라이스 생전 메가트렌드였을 플래퍼 스타일을 녹여두었다. 동시대 창작자들의 화려함과 비교해보면 프라이스의 과감한 여백들의 미니멀한 분위기는 오히려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아름다운 열두 명의 공주를 딸로 둔 왕에겐 고민이 있다. 정숙한 품행을 위해 왕은 열두 명의 공주를 매일 한 방에서 재우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그런데 일상적 활동 외에 움직일 일 없는 공주들의 구두가 아침이면 바닥이 드러나도록 닳아 있었다. 공주들을 추궁해 보아도 밤새 깊이 잠들었다는 똑같은 대답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이에게 원하는 공주를 주겠다는 선언에 여러 왕자들이 도전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매번 공주들이 권한 포도주를 마시고 곯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공주들에겐 공동의 비밀이 있었다. 밤이면 비밀 계단을 내려가 마법에 걸린 왕자들이 사는 지하세계에서 춤을 추고 돌아왔던 것이다.
어느 날 새로운 도전자로 퇴역 군인 한 명이 방문 앞을 지킨다. 포도주를 마신 군인이 곯아떨어지자 공주들은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고 지하세계로 향한다. 여느 때처럼 계단을 내려가던 중 막내 공주는 옷자락을 밟힌다. 뒤를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는 평소의 계단이다.
보석 나무 숲을 지나 도착한 물가에는 열두 명의 멋진 왕자들이 평소처럼 각자의 조각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 공주는 자신이 탄 조각배가 유달리 속도를 내지 못하자 불안해한다. 지하 세계의 왕자는 자신이 더 힘껏 노를 젓겠다고 다정하게 말한다. 공주들은 오늘 밤도 호수 한가운데 비밀 왕궁에서 밤새 즐겁게 춤을 춘다.
다음날, 군인이 지하세계의 보석 나뭇가지를 내놓는다. 사실 군인은 술을 몰래 버린 후 우연히 얻은 마법의 투명 망토를 쓰고 공주들을 미행했다. 공주들의 비밀에 관한 증거로 지하 세계의 보물을 가지고 온 것이다. 실토할 수밖에 없는 공주들을 보며 왕은 크게 기뻐한다. 군인은 가장 나이가 많은 첫째 공주를 신부로 원하고 지하 세계로 가는 입구를 봉쇄한다. 이후로 공주들의 신발이 닳는 일은 없었다.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은 이 장르에서 새로울 것도 없는 ‘자산으로 획득되는 여성의 조건’을 규정한다.
<당나귀 가죽 공주>처럼 근친상간 성 착취까지는 아니라도 그 조건에 성적인 부분이 빠질 리 없다. 약탈혼은 허용되지만 여성의 분방함은 있을 수 없다. 딸들의 순결을 위해 왕은 감금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에 당당하다.
발이나 구두는 빈번히 성적인 함의로 활용되어 왔다. 공주들의 구두가 닳아있다는 것은 성욕을 떠나 스스로의 욕망을 자유롭게 행사할 권리에 대한 선망으로 보는 것이 옳다. 지하세계가 유난히 신비하고 아름답게 묘사되는 것도 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자유는 꿈속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군인이 가장 어리고 예쁜 막내 공주를 두고 첫째 공주를 신부로 택하는 것도 그다지 훈훈하게 볼 수 없다. 분방한 과거를 가진 상대지만 후계 서열 일 순위라는 조건은 일생일대의 기회이니까. 이 작품의 해결사인 군인은 다른 유사 서사에서도 주로 나이 많은 남성으로 설정된다. 어리고 분방한 여성을 계도하는 나이 많은 남성-최근 논란이 된 메스꺼운 드라마 제목이 떠오른다.
결혼을 앞둔 19세기의 여성들은 자신의 나이보다 적은 허리 치수가 목표였다고 한다. 19세기 이전도 이후도 여성성으로 상징되고 요구되는 이미지는 여전하다. 결혼이라는 현대판 Happily Ever After는 양날의 칼 같은 이데올로기이다. 결혼은 연애의 결실로, 가정은 행복의 첫 번째 단위로 규정된다. 그러나 성 역할이 개입되는 순간 일방적 희생에 대한 여성의 반발은 이기심으로 간주되고 책임을 추궁당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특별한 여성이나 작은 행복으로도 충만한 여성이나 빈틈없이 사회적 노예의 삶을 떠안게 된다. 이런 관습적 부조리는 ‘시월드’라는 명칭을 통해 가해의 주범을 여성으로 내세우는 이중의 폭력을 행사한다. 명예 남성 서사에 취한 생물학적 여성들, 편익에 따라 기혼과 비혼 편 가르기 함정에 떠밀리는 여성들, 이런 부조리를 관음 하며 부추기는 남성들, 그 주체가 가족이기까지 할 경우 느끼는 씁쓸함은 매번 극복하기 쉽지 않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를 위해 한껏 치장하고픈 날이 있다.
놓치고 싶지 않은 멜로디처럼 오직 스스로에게 집중했을 때야 얻어지는 자유가 있다.
이유 따윈 필요 없다. 미스 슬로운이 말했듯 개인적 좌절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동기는 촌스러우니까.
우리들은 밤새워 춤출 수 있다. 함께 추는 춤은 한껏 흥겹다.
그러나 때로는 마지막 춤을 위해 남겨둘 상대마저 필요치 않다.
@출처/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 그림 형제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Brothers Grimm, 1812)
Once upon a time : A Book of Old Time Fairy Tales; Dancing Shoes (Rand McNally & Company, 1989, 일러스트 마거릿 에반스 프라이스 Margaret Evans Pr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