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이 불분명한 민담들은 채록을 통해 장르로 편입됐다. 그림 형제, 샤를 페로, 안데르센의 초기작들도 당시 기준에서 현대적으로 각색한 대중 문학으로 어필했기에 원전의 선정적 요소들이 함께 이어졌다. 근대화에 따라 마술적 신비주의에 대한 경외가 하위 장르적 재미로 바뀌며 동화의 범주로 재편된다. 이런 채록 민담들은 유사 서사를 바탕으로 지역색을 비치며 변주된다.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도 계도성에 중점 둔 버전이 주도적이지만 여러 가지 변주가 있다. 감금되어 살았던 왕비가 딸들만은 자유롭길 바라며 비밀 세계의 통로를 유언으로 남겼다던지, 정략결혼에서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큰 공주가 버틴 이야기도 있다.
카이 닐센의 데뷔작 <In Powder and Crinoline, 1913> 수록분은 프랑스 로맨스에 기반한 좀 더 초기의 버전이다. 늙수그레한 군인 대신 야심 찬 꽃미남이 해결사로 등장한다.
로맨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즐겁지만 주저하게 된다. 너무나 당연함에도 현실에서 수반되지 않는 가치들을 이야기 속에서만 찾다 보면 씁쓸한 뒷맛만 남는다. 현실의 올려치기는 지긋지긋하다. 그럼에도 야심을 삶의 원동력 삼던 이가 누군가의 곁에 서기 위해 가치의 우선순위를 바꿀 때, 기사가 아니고 될 수도 없는 이가 기사의 품위로 행동할 때 거기에 시선 두지 않을 도리가 없다.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 우리들은 밤새워 춤출 수 있다. 1 https://brunch.co.kr/@flatb20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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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 빈티지 일러스트 https://brunch.co.kr/@flatb201/295
(원문 링크가 유실되어 Artima 판과 기억에 의존한 작성입니다. 의역이 섞여 있습니다.)
예쁜 외모를 가진 어린 목동 ‘미셸’은 온 마을의 소녀들에게 사랑받았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이상형인 그는 건강하지만 투박한 그녀들에게 관심 없었다. 어느 날 그의 꿈에 황금빛 옷을 입은 요정이 나타나 거듭 계시를 준다. 요정의 조언에 사로잡힌 그는 열두 명의 공주가 사는 왕국으로 떠나 보조 정원사가 된다. 미셸은 매일 아침 공주들을 위해 특별한 꽃다발 열두 개를 만들어 둔다. 공주들은 다정하고 예쁜 그를 귀여워했지만 한낱 보조 정원사로서 였다. ‘막내 공주’가 새침하게 굴 때면 닿을 수 없는 마음과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될 뿐이었다.
세 겹의 자물쇠가 채워진 방에서 함께 잠드는 공주들은 정오나 돼야 일어났다. 그리고 매일 열두 켤레의 새틴 구두가 여지없이 닳아있다. 비밀을 풀기 위해 왕은 지원자를 모집하고 여러 왕자가 도전한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방문 밖을 지키던 왕자마저 사라졌고 구두는 여전히 닳아 있었다.
파수 당번에 지원하기 전 미셸은 요정에게서 금으로 된 단지, 곱디 고운 실크 천, 반짝이는 월계수 잎 두 장을 받는다. 실크로 정성껏 닦은 금화분에서 자란 월계화의 도움으로 미셸은 공주들을 미행하는 데 성공한다. 여느 때처럼 한껏 꾸민 공주들은 지하 세계의 마법 궁전으로 향한다.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가 갖은 보석 나무가 가득한 숲을 지나면 조각배를 탄 그날 밤의 파트너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무도회 파트너 중에는 사라졌던 도전자도 있었다. 언니들을 쫓아가던 막내 공주는 드레스 자락이 밟힌 기분에 찜찜했지만 무도회가 시작되자 곧 잊는다. 무도회가 끝나자 왕자들은 즐거웠다는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공주들이 건넨 마법 황금 잔의 물약 때문이다.
밤새 공주들을 지켜본 미셸은 왕에게 사실을 고하지 않는다. 그의 공주가, 무도회의 공주들이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그날 아침 막내 공주의 꽃다발에 지하 세계의 보석 나뭇가지를 섞어 건넨다. 막내 공주는 미셸을 불러 다그쳤다.
“곧 아버지에게 포상을 받겠구나.”
“공주님, 전 말하지 않을 거예요.”
“왜? 아버지가 무서워?”
“아니요, 공주님.”
“그게 아니면 따로 원하는 거라도 있는 거니?
미셸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내렸다. 그날 오후 내내 막내 공주는 미셸을 무시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맴도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일렁거리던 감정을 떠올렸다. 고민하던 막내 공주는 언니들에게 미셸의 일을 털어놓는다. 자매들은 깔깔거리며 막내 공주가 정원사의 부인이 되어 물을 긷고 아침의 꽃다발을 만들게 될 거라고 놀려댄다. 마법 궁전에 어떻게 따라올 수 있었는지 추궁해도 미셸이 대답하지 않자 자매들은 그를 그날 밤의 무도회에 초대한다. 미셸이 끝까지 비밀을 지킬지 테스트하고 그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다. 막내 공주는 언니들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비밀을 아는 미셸은 어쨌든 위험하지 않은가.
미셸은 두 번째 월계화의 도움을 받아 귀족처럼 꾸미고 전날처럼 모습을 숨긴 채 무도회에 쫓아갈 수 있었다. 미셸과 차례대로 춤을 추는 공주들은 어느 때보다 친밀하고 즐거워 보였다. 마침내 파트너로 만난 막내 공주만이 그에게 까칠하게 군다.
“너, 왕자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구나.”
춤추는 내내 감히 그녀에게 말 붙일 수 없던 미셸은 마침내 결심한다.
“공주님,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공주님이 정원사의 부인이 되는 일은 없을 거니까요.”
당황한 표정의 막내 공주를 뒤로 하고 그는 조용히 다른 파트너에게 향했다. 마지막 춤마저 끝나고 미셸에게도 기억을 잃는 물약이 건네 진다. 칭찬과 미혹에 취하지 않았음에도 미셸은 기꺼이 잔을 든다. 잔이 입술이 닿는 순간 막내 공주가 외쳤다.
“그 술 마시지 마!”
“네가 마음을 바꾸느니.. 내가.. 내가 정원사의 부인이 되는 게 낫겠어.”
눈물 흘리는 막내 공주를 바라보며 미셸이 잔을 내던지자 지하 세계 궁전과 왕자들에게 걸린 마법이 깨진다. 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조각배가 보석 숲 물가에 닿자 마법의 궁전은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진다. 미셸은 왕에게 지하 세계에 대한 비밀을 고하고 통로는 폐쇄된다. 얼마 후 열한 명의 공주들은 무도회 파트너였던 왕자들과 각각 맺어진다. 그리고 막내 공주 또한 귀족과 약혼한다. 작위를 받은 미셸이었다.
미셸의 고백으로 막내 공주는 월계화의 비밀을 알게 된다.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나머지 날들을 채우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월계화를 부러뜨린다. 이후로 왕궁 안팎의 소녀들은 노래한다.
‘우리는 더 이상 숲에 가지 않을 거야.
월계화는 자르고, 여름이면 달빛 아래 춤을 추지.’
@출처/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In Powder and Crinoline;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일러스트 카이 닐센 Kay Nilsen, 1913)
Les Douze Princesses Dansantes (Artima 1950판, 일러스트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