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나 클래식에 그다지 관심 없다 해도 <호두까기 인형>의 넘버들은 듣는 순간 친밀함이 느껴질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음률은 특별한 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소환해준다.
<호두까기 인형>을 처음 접한 것은 어린 시절 본 유니버설 발레단의 정기공연이었다. 아시아 어린이답게 호두는 정월대보름날 망치로나 까먹던 나는 기괴하면서 앙증맞은 호두까기 인형의 존재감에 압도당했다. 컬러풀하고 역동적인 매튜 본의 재해석도 좋았지만 이 시기가 되면 어린 날 본 고루한 버전이 먼저 떠올리곤 한다.
상당수의 크리스마스 동화들처럼 <호두까기 인형> 역시 시간적 배경이 크리스마스 전날 밤 시작되는 것 외에는 크리스마스와 그다지 관계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크리스마스 클래식으로 각인되는 것은 원전이 가진 환상성과 크리스마스 정신으로 포용되는 감상성에 있을 것이다.
호프만의 원전을 읽은 것은 청소년기, 당시 좋아했던 슈토름의 작품을 찾아보면서였다. 슈토름이 저물어가던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수혜자라면 호프만은 그 절정을 구가했다.
유럽사에 있어 충격적 이슈일 수밖에 없던 대혁명은 당연히 대대적 인식 전환을 가져왔다. 이성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하며 유럽을 장악해 온 고전주의는 대혁명 이후 낭만주의에 밀려난다. 불완전한 현실에 대한 반발로 먼 이상향을 동경하는 낭만주의는 주관적 감성과 상상력을 중시했다. <호두까기 인형>에는 독일식 낭만주의 특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또 시대적 흐름이던 새로운 지식과 과학의 열기에 호프만도 관심 깊었다. <호두까기 인형> 속 인형 왕국 소인들은 현미경이 마술 기구처럼 여겨지던 시대상이 반영된 에피소드*라고 한다. (*보물창고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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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특징들은 필연적으로 많은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영감을 주었다. 오스트리아의 일러스트레이터 리즈벳 츠베르거의 <호두까기 인형>은 고전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세피아를 베이스로 한 차분한 배경과 탄탄한 데생 아래 어둠으로 치환된 색 번짐을 통해 모호한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꽃무늬가 그려진 복식이나 촘촘한 패턴들은 단조로울 수 있는 색감에 부조와 같은 질감을 부여한다.
특히 ‘단단한 호두’ 에피소드 장면은 한 편의 궁정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공주의 주술을 풀 젊은 마일은 뒷모습뿐이지만 이 장면의 주인공답게 섬세한 무늬가 입혀진 붉은 옷으로 시선을 당긴다. 아직 주술이 풀리기 전인 필리파 공주의 마리오네트 같은 얼굴과 구석에서 주시하는 생쥐 마우제링크스 부인의 시선은 젊은 마일의 운명을 예고한다.
츠베르거의 화풍은 극적인 구성과 화려한 색감을 전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담백함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두 세계의 괴리를 극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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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슈탈바움 가의 남매들은 선물을 풀어보느라 흥겹다. 개구쟁이 ‘프리츠’는 멋진 ‘호두까기 인형’의 턱을 벌써 망가뜨렸다. 다정한 ‘마리’는 망가진 호두까기 인형을 불쌍해하며 보살펴준다.
모두가 잠든 자정, 홀로 장난감을 정리하던 마리 앞에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쥐들과 인형들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호두까기 인형은 용감했지만 머리가 일곱 개나 달린 ‘생쥐 대왕’에게 밀려 위험해진다. 마리는 생쥐 대왕에게 슬리퍼를 집어던져 호두까기 인형을 구하고 정신을 잃는다.
깨어난 마리는 자신이 던진 슬리퍼에 유리장이 깨져 다쳤음을 깨닫는다. 간밤의 전투에 대해 가족들에게 열심히 설명해보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우울한 마음으로 병석에 눕게 된 마리에게 언제나 묘한 분위기의 ‘대부 드로셀마이어’가 찾아온다. 드로셀마이어는 자신이 선물했던 호두까기 인형을 고쳐 주며 ‘피를리파트 공주와 단단한 호두’에 관한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대한 생쥐 ‘마우제링크스 부인’은 식탐을 부리다 필리파 공주의 아버지에게 자식을 잃는다. 복수를 다짐하던 그녀는 저주를 걸어 ‘필리파 공주’를 추레하고 기괴한 호두까기 인형으로 만든다. 왕명을 받은 드로셀마이어는 점술가의 조언에 따라 저주를 풀 젊은이로 자신의 조카를 추천한다.
..크라카툭 호두는 48파운드의 대포가 밟고 지나가도 깨지지 않을 만큼 껍데기가 단단했단다. 그 호두를 단 한 번도 수염을 깎지도, 장화를 신어 보지도 않은 남자가 공주 앞에서 딱! 호두를 깨물어 까야했어. 그리고 눈을 감고 공주에게 알맹이를 바쳐야 했지. 남자는 넘어지지 않고 일곱 걸음을 뒤로 걸은 후에야 눈을 뜰 수 있었어.
‘젊은 마일’은 공주의 저주를 푸는 데 성공하지만 마우제링크스 부인의 방해로 그 자신이 저주를 뒤집어쓰고 호두까기 인형으로 변한다. 추레한 모습에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이를 만났을 때 마일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은혜를 입은 필리파 공주부터 매정하게 그를 외면한다.
마리는 대부의 이야기가 자신의 호두까기 인형에 관한 것임을 알아차린다.
며칠 후 달빛 눈부신 밤, 호두까기 인형은 생쥐 대왕과의 결투에서 승리하고 마리를 인형의 나라로 초대한다.
마리는 크리스마스의 숲을 지나 과자의 나라를 거쳐 아름다운 수정 궁전에 도착해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하지만 이 역시 꿈이었을까? 어느 틈엔가 잠들었다 깨어난 마리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다. 다시 한번 간밤의 일을 설명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더 이상 호두까기 인형과의 모험을 말하지 않지만 잊을 수는 없다. 마리는 호두까기 인형에게 속삭인다.
“아..! 네가 살아 움직이기만 한다면 난 절대로 필리파 공주처럼 너를 멀리하지 않을 텐데…”
그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마리는 다시 기절한다. 깨어난 그녀에게는 다시 드로셀마이어 대부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젊고 잘생긴 조카와 함께이다. 마리와 단 둘이 남게 된 청년은 나지막이 속삭인다.
“마리 아가씨, 호두까기 인형의 주술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일 년 후 마리는 호두까기 왕자와 함께 인형의 나라로 떠난다.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들을 볼 수 있는 그런 나라로 말이다.
마리의 모험은 현실이었을까, 환상이었을까?
<호두까기 인형>은 ‘마리의 환상’과 ‘단단한 호두 이야기’가 이중 구조를 이룬다. 중첩된 구조는 의도된 모호함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흩어놓는다.
현실 세계에서 드로셀마이어와 마리는 주변인에 가깝거나 소외된다. 이 둘은 현실의 몰이해를 겪는 이, 특히 창작자들이 겪게 되는 외로움과 내적 분열을 대변한다. 창작자들이란 내밀함을 꿰뚫어 보고 가시화시키는 이들이다. 그러나 형식과 규율이 주도적인 일상 속에선 선택받은 자의 눈에만 보이는 특별한 세계는 쉽게 부정당하곤 한다. 비록 아침 햇살에 흔적조차 아릿해도 어젯밤의 신기루를 목도한 이들은 그 벅찬 순간을 잊지 못한다. 현실의 유리에 베이고도 호두까기 인형에게 소망을 속삭이는 마리처럼.
호프만이 쓴 크리스마스 전날 밤의 모험은 그 특별한 세계가 모두에게 공유되길 바랐던 작가의 소망 아니었을까? 어떤 것을 소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 크리스마스니까 말이다.
@출처 및 인용/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대왕,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Nussknacker und Mausekönig, 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1816)
두두 명작그림동화, 호두까기 인형 (두두, 1995, 번역 권태문, 일러스트 리즈벳 츠베르거 Lisbeth Zwerger)
클래식 보물창고 38, 호두까기 인형 (보물창고, 2016, 번역 함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