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은 억울하다!
제인 오스틴의 팬이라면 그녀의 작품이 칙릿의 기원쯤으로 취급되는 것이 부당하다 여길 것이다. 시대적 한계 속 여성 작가로서의 한정적 운신, 관습과 가치관의 차이, 로맨틱 코미디로의 잦은 변주 등 오해를 형성한 원인은 많다. 그러나 제인 오스틴의 천재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드러난다. 웅장한 서사 없이도 잘 벼려진 냉소와 유머로 찰랑거리는 그녀의 문장들은 조지안 시대를 몇 세대나 넘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한적한 사교계 속 사뭇 뻔해 보이는 대화를 주고받는 인물들, 태연자약한 표정 아래 흐르는 감정들은 음모의 긴장감마저 느껴지게 한다.
제인 오스틴식 로맨스에 한정 지어 본다면 엘리너 파전의 <서쪽 숲나라>는 종종 <오만과 편견>을 떠올리게 한다. 편견에 사로잡힌 남자와 오해되던 여자는 서로를 이해하면서 알 수 없던 세계를 목도하게 된다.
이전에 소개했듯 엘리너 파전은 동화의 관습적 작법을 피해 가려 애쓴 작가이다. 구원자로 등장하던 동화 속 남자 주인공들이 파전의 작품 속에선 의외의 존재에게 매혹당한다. 벽지의 꽃처럼 가려진 수줍음을 알아차리거나 (어린 재봉사), 동화의 세계에선 징벌받기 마련인 예쁘지만 무용한 존재들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보낸다. (은빛 황새)
<서쪽 숲나라>는 서로를 자각함으로써 각자의 세계가 확장되는 경이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린 재봉사, 그대와 춤을 https://brunch.co.kr/@flatb201/96
#은빛 황새, 세상에서 가장 짧은 주술 https://brunch.co.kr/@flatb201/94
부지런하고 젊은 왕 ‘존’은 인접국 왕녀들 중 한 명과 결혼할 예정이다. 추운 북쪽 산 나라, 무더운 남쪽 땅나라, 세찬 바람이 부는 동쪽 늪 나라 공주를 차례로 추천하는 신하들에게 존이 묻는다.
“서쪽 숲나라는 어떤가? 그곳엔 공주가 없는가?”
“폐하, 그 나라에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두꺼운 울타리로 가로막힌 서쪽 숲나라에 가본 사람이 없었단 대답에 존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어머니, 왜 서쪽 숲에 가면 안 돼요?”
“위험한 일 투성이니까.”
“어떤 위험인데요?”
“그건 말해 줄 수 없다. 나도 모르거든.”
이후로 존은 ‘아무도 모르는 이상한 것이 산다’는 말을 내내 곱씹는다. 이제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쪽 숲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존은 실망한다. 위압적인 소문이 무성하던 울타리 너머에는 쓰레기만 가득했다. 지친 몸으로 왕궁에 돌아오자 하녀 ‘셀리나’까지 짜증을 돋운다. 자신의 시가 적힌 종이를 마음대로 치워버린 것에 토라진 존은 셀리나에게 ‘잘 자’라고 인사도 하지 않는다.
존에게 하녀 셀리나는 어쩐지 늘 신경 쓰이는 존재다. 고아 출신임에도 당당한 그녀는 왕인 자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심혈을 기울인 시에도 서슴없이 핀잔준다. 셀리나의 태도는 존을 불편하게 한다. 또 한편으론 태도만큼 나무랄 데 없는 일처리로 안락함을 준다. 알 수 없는 양가감정 속에 존은 늘 퉁명스럽게 셀리나를 대한다. 셀리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지만.
..난롯가를 치우며 셀리나가 물었습니다.
“북쪽 공주님은 마음에 드셨어요?”
“눈곱만큼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
“폐하가요? 아니면 공주님이요?”
임금님은 쏘아붙였습니다.
“윗사람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건방지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시키실 일이 또 있나요?”
존은 신부 후보들을 차례로 찾아 청혼한다. 그가 알건 모르건 셀리나는 언제나 한 발 앞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둔다. 그러나 정작 존이 궁금한 것은 자신의 시에 대한 셀리나의 의견이다. 셀리나는 할 일이 너무 많은 자신은 존의 시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셀리나의 무심함에 골이 난 존은 침대 정리를 해준 그녀에게 ‘고맙다’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남쪽나라 공주님과는 잘됐어요?”
임금님은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될게 뭐야.”
“폐하가 마음에 안 드신 거예요, 아니면 그 공주님이 폐하를 싫어한 거예요?”
“네 신분을 알아라, 건방지게!”
“아, 그렇군요. 다른 시키실 일은 없구요?”
자신의 시가 적힌 종이를 찾는 존에게 셀리나는 이미 휴지통을 비웠다고 답한다.
심통이 난 존은 목욕시간이 되어서도 셀리나를 무시한다.
..셀리나는 잠옷과 슬리퍼를 준비하며 물었습니다.
“동쪽 나라 공주님과는 어땠나요?”
“어떻게도 생각하지 않아!”
“폐하를 상대해주지 않은 모양이군요”
“네 분수를 알아라. 셀리나!”
“아, 알았어요. 더 필요하신 건 없나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게 없으면 아무 일도 안될 거야...”
“그게 뭔데요?”
“내 시 말이야.”
“폐하의 시요? 예전에 썼던?”
“물론이야.”
“저런, 왜 진작 말하지 않으셨어요?”
버려진 줄 알았던 존의 시는 셀리나가 보관하고 있었다. 존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던 셀리나를 보며 진짜 감정을 깨닫는다. 풀리지 않던 시구를 완성하며 존은 셀리나에게 청혼한다. 셀리나는 대답 대신 ‘서쪽 숲나라’에서 한 번 더 청혼해 달라고 한다. 다음날 셀리나와 함께 개구멍을 통해 서쪽 숲나라에 도착한 존은 깜짝 놀란다.
그곳은 홀로 찾았을 때의 쓰레기장이 아닌 온통 푸르른 초원, 아름드리 나무와 화려한 꽃들이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쓰레기처럼 보이던 것들은 울타리 너머로 던져진 채 잊혀가던 모두의 꿈이었다.
..“오, 셀리나! 당신은 공주요?”
“서쪽 숲에서는요.”
“아니, 밖에 있을 때도 그래!”
존은 울타리의 널빤지 하나를 떼어낸다. 그 뒤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서쪽 숲나라에 갈 수 있게 된다.
너무 뚱뚱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어린 존은 서쪽 숲에 이상한 것이 있다고 주의받았다. 계급과 성별, 모든 조건을 초월하게 만드는 가치는 이상한 것, 때로는 위험한 것 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신분상승, 계급타파 혹은 사랑이라 부를 뿐.
엘리너 파전은 ‘서쪽 숲’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시적으로 묘사한다. 스크루볼 로맨스식 대화나 존의 소심한 복수들은 동화의 형식 자체를 차용한 유쾌함을 시도한다.
<서쪽 숲나라>를 <오만과 편견>에 대입해보면 캐릭터 역할이 반전되어 있다.
현명한 하녀 셀리나는 당당함을 넘어 오만한 미스터 다아시와 같은 자존감을 내뿜는다. 선량하지만 한정적 세계에 사로잡혀 단정적인 리지와 같은 존은 셀리나에게 편견을 두고 오해한다.
그러나 서로의 내밀한 세계를 엿본 그들은 수순처럼 사랑에 빠진다.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사랑은 당연히 생명력으로 넘치며 온갖 싹을 틔운다. 황무지 같고, 쓰레기장 같고,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니던 그곳은 사랑으로 인해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공허한 수사로 단장되어 있던 시는 마음을 담고야 그녀의 대답으로 돌아온다.
오만과 편견을 버린 그들은 서로를 각자의 세계로 초대한다. 사랑으로 그 세계는 더욱 확장된다. 둘 사이의 간극에 당위를 부여해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판타지뿐이라는 듯이.
제인 오스틴이 남긴 작품은 평생을 통틀어 일곱 권 밖에 안 된다. 21세기의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되풀이해 읽으며 열광하는 것은 로맨스 때문만이 아니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이 속한 협소한 세계 너머의 담론을 꿰뚫어 보고 신랄하게 놀려대거나 상냥하게 조언할 줄 알았다. 월터 스콧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치미 떼는 오스틴의 에티튜드는 <아이반호>의 마상 경기보다 훨씬 위협적이고 시대초월적이라는 걸.
얼마 전 국내 발간된 시공사의 <제인 오스틴 완역 전집>은 반가우면서도 또 다른 의미로 시대초월적이었다. 꽃무늬로 도배된 커버는 편집진이 연상하는 혹은 목표로 하는 독자층이 명료해 보인다. 그 목표는 현재 오스틴이 소비되는 방식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꽃무늬는 죄가 없다. 하필 오스틴 전집에 나물밥처럼 범벅된 것이 싫을 뿐..)
때때로 현대의 제인 오스틴을 상상해보곤 한다. 애정에 집요함이 더해져서일까? 매혹적인 작가들은 많지만 딱히 대체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대체 또한 불필요할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 활동이 좀 더 이어졌다면 우리는 어떤 감탄과 한숨을 교차했을까?
올해도 Happy Birthday! Jane.
@출처/
서쪽 숲나라, 엘리너 파전 (The Little Bookroom; Westwoods, Eleanor Farjeon, 1955)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 전집 12/50 영국 편, 보리와 임금님, 서쪽 숲나라 (계몽사, 1973, 번역 신지식)
작은 책방, 서쪽 숲나라 (길벗, 2005, 일러스트 에드워드 아디존 Edward Ardizzone)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Pride and Prejudice, Jane Austen, 1813)
제인 오스틴 전집, 오만과 편견 (시공사, 2016, 번역 고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