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페에서 책 읽기 Mar 25. 2021

벨벳 토끼, 백일몽


장난감, 담요, 뽀스락대는 비닐봉지, 작고 반짝거리는 무용한 잡동사니.. 어린 시절의 애착은 무엇이든 선택될 수 있다. 성인이 되면 우리의 애착은 분산된다. 반려동물, 일, 취미, 아이나 연인에게로. 그 종착지가 어디건 유일함은 우리를 같은 시간 속에 묶어준다.


아동문학가 마저리 윌리엄스의 대표작 <벨벳 토끼 혹은 장난감은 어떻게 진짜가 될까?>는 헝겊 토끼 인형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오래된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들 중 상당수처럼 계몽사의 노란 책 전집을 통해 읽었다. 작품 선별이 탁월했던 노란 책 전집은 보통 표제작에 별도의 중, 단편이 묶였다. 이 작품은 미국 작가로 분류된 건지 <유쾌한 호우머 Homer Price, Robert McClosky, 1943> 편에 <빌로오도 토끼>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197, 80년대 전집을 읽고 자란 세대에게 익숙한 ‘빌로오도’는 ‘벨벳’의 당시 표기이다. 작가명도 결혼 후 성을 채택해 ‘마저리 비앙코’로 표기되어 있다.

초판, 윌리엄 니콜슨 William Nicholson, 1922 / 계몽사, 송훈, 1973





벨벳으로 만들어진 토끼 인형은 아기의 크리스마스 선물들 중 하나였다. 분홍색 공단이 덧대진 귀를 늘어뜨린 벨벳 토끼는 사랑스럽고 보드라웠다. 하지만 아기는 갖가지 신형 장난감에만 사로잡혔다. 부끄럼이 많은 벨벳 토끼는 주눅 든 채 장난감 상자 구석에 방치된다.

‘진정한 사랑을 받으며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장난감을 진짜로 만들어 준다’는 오래된 가죽 말 인형의 위로에 벨벳 토끼는 소망의 씨앗을 품는다. 어느 날 강아지 인형의 분실로 벨벳 토끼는 아기와 매일을 함께하게 된다.

Don Daily, 1997
Florence Graham, 1987


“이 따위 토끼는 없으면 안 되니? 장난감 하나 가지고 사람을 귀찮게 구니..”

유모의 불평에 아기가 외쳤다.

“내 토끼 이리 줘요!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이건 장난감이 아니라.. 이건 정말 토끼라구요!”

톱밥으로 가득 찬 벨벳 토끼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 나는 장난감이 아니야, 아기가 그렇게 말했잖아!’


벨벳 토끼는 너무도 행복했다. 콧등이 해지고 분홍빛 귀가 바래지는 것도 모를 만큼.

酒井駒子, 2007
Michale Hague, 1983 / Don Daily, 1997
Florence Graham, 1987


행복한 봄을 지나 여름이 가까워지던 날, 아기와 숲에서 놀던 벨벳 토끼는 깜짝 놀란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토끼 인형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태엽도 없이 제각각 움직이는 살아 있는 숲의 토끼였다. 숲의 토끼들은 벨벳 토끼가 진짜가 아니라며 숲으로 돌아간다. 아기가 자신을 진짜로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를 할 틈도 없이.

Robyn Officer, 1991 / Florence Graham, 1987
Michale Hague, 1983


즐거운 날들 중 또 어느 날, 아기는 성홍열에 걸린다. 벨벳 토끼는 힘겨워하는 아기를 북돋아주려 온종일 안간힘 쓴다. 지겨울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 아기는 회복되지만 벨벳 토끼의 시간도 끝나버린다. 병균 덩어리니 태워버리라는 의사의 선고에 벨벳 토끼는 쓰레기 틈에서 밤을 맞는다. 바닷가 갈 생각에 들뜬 아기는 내일이면 태워질 벨벳 토끼를 까맣게 잊었다.

진짜가, 마침내 진짜가 되었는데 이런 마지막을 맞다니.. 벨벳 토끼의 동그란 눈망울에서 ‘진짜 눈물’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그 눈물이 아름다운 요정을 불러낸다.

Don Daily, 1997
酒井駒子, 2007
Robyn Officer, 1991


또 한 해가 지나 여름날, 숲에서 놀던 아기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토끼와 마주친다.


“와아, 내가 아팠을 때 잃어버린 토끼를 닮았네!”


아기는 그 토끼가 자신의 오랜 친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자신을 ‘진짜’로 만들어 주었던 아기를 보러 왔다는 것을.





이른 나이에 시작된 윌리엄스의 집필활동은 결혼과 세계대전으로 인해 중단된다. <벨벳 토끼>는 미국 이주 후 첫 작품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베드타임 스토리를 정리한 것이다. 작은 토끼는 무명에 가깝던 윌리엄스에게 폭발적인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세대를 걸친 히트작인만큼 메릴 스트립이 낭독한 오디오 북, 애니메이션 등 분야별로도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국내에도 다수의 판본이 다양한 제목으로 발행되어 있다.

빈티지북들 (상단 가장 우측이 메릴 스트립이 낭송한 오디오북 커버이다)


초판의 일러스트를 그린 윌리엄 니콜슨은 정물화 위주의 목판화가였다. 우직하고 거친 터치의 니콜슨을 비롯해 대부분의 판본이 원전의 타임라인을 충실히 따른다. 갖은 변주에도 고유성이 희생되지 않은 작품답게 <벨벳 토끼>의 디테일들은 온전한 기준이 된다. 사계절의 풍광에 중첩되는 묘사들은 서정성을 확장시키며 주인공들의 감정을 밀도 있게 쌓아 올린다.

크리스마스 양말에서 내려다보던 도입부의 시점은 이불 동굴, 아기 침대, 정원과 쓰레기통, 요정의 품 속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서사의 리듬을 시각화한다. 이 상승과 하강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서로를 마주 봄으로서 마무리를 알린다.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원전의 애틋함을 충실히 구현한다.


워낙도 훌륭한 일러스트가 많은 작품이지만 로빈 오피서가 일러스트를 그린 판본들이 흥미로운 것은 속편이 있어서다. 제니퍼 그린웨이의 오마주 <A Real Little Bunny, Jennifer Greenway, 1993>는 진짜가 된 벨벳 토끼가 이후로도 내내 행복했을 지에 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속편의 결말은 원작의 지향과 다소 다르게 동화적 낙관으로 맺어지지만 애틋함만은 원전을 충실하게 쫓아간다. 대비를 이루는 건 오히려 로빈 오피서의 일러스트다. 윌리엄스의 원작을 달콤하기 그지없는 색채로 채웠던 로빈 오피서는 속편에서 좀 더 현실적인 화풍을 구사한다. 두 작가의 서사와 한 작가의 두 가지 화풍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는 판본이다.

<The Velveteen Rabbit>, Robyn Officer, 1991 / <A Real Little Bunny>, Robyn Officer, 1993


인간화를 원하는 무생물의 소망은 그다지 특별한 주제가 아니다. 어린이 대상 동화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자체로 특별한 주인공들은 왜 인간과 묶이고 싶어 하는 걸까? 때로는 그저 인간 편의 위주의 주입식 클리셰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벨벳 토끼>가 세대를 걸쳐 간직되는 이유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췄지만 안이한 낙관에 기대지 않는 성찰에 있다.

초판 발행 시 편집부는 아동 대상으로는 어두운 분위기가 드리워진 결말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삶의 어두운 부분들도 우리의 한 시기를 이루고 있음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이런 현실 인식은 헝겊 토끼의 역사 속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극 중 벨벳 토끼가 아기의 애착 인형이 될 수 있었던 건 이전의 강아지 인형이 분실되었기 때문이다. 벨벳 토끼는 너무도 쉽고 온전하게 강아지 인형을 대체한다. 순도 높지만 가차 없기도 한 아이다운 애정과 변덕은 서사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진짜 Real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은 아동문학의 고정된 낙천성에서 빗겨 난 성숙하고 애수 띤 결말을 곱씹게 한다.

벨벳 토끼는 진짜가 된 최초의 순간이 아이로 인한 것이라 믿는다. 현재의 행복도 진짜이지만 처음에 그렸던 행복과는 다른 형태이다. 두 가지 행복은 함께 할 수 없기에 각자의 세계로 갈라진다. 그럼에도 서로가 유일했던 순간은 둘을 같은 시간으로 소환해 묶어둔다.

그저 한쪽만이 간직하고 있었다 해도, 눈 한번 깜박거림에 녹아버린 꿈처럼 이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 해도, 때로는 우리가 바라는 형태가 아닌 해피엔딩도 존재할 수 있음을 확인시킨다.

Michale Hague, 1983



오전 내내 용암처럼 솟구치던 눈보라가 흔적도 없는 오후였다.

꾼 줄도 모르고 깨어난 꿈처럼 생경한 정오에 다시 곱씹어본다.

인생의 어떤 일들은 순식간에 휘몰아치곤 시치미를 뗀다.


나의 두 번째 개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십 년 전 먼저 다리를 건너간 나의 첫 번째 개에게도 동생인 가족 모두의 막내였다.

혹독한 꽃샘추위 속에 버려졌던 아이였기에 가는 날은 따뜻한 봄날 졸음 속이길 항상 바랬다. 폭설 속 긴 한파 뒤 따뜻했던 하루, 봄이 왔다고 생각한 건지 나의 막내는 갑자기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아니, 18년을 산 개에게 ‘갑자기’란 어울리지 않는다.

하루를 수년처럼 내달리는 노견에겐 무엇도 갑작스럽지 않다. 갑자기는 사람만, 오직 남겨진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느리고 졸리고 가려워지다 영영 잠드는 게 죽음이라지만 나의 개는 점점 아이가 되어갔다. 볼 때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노쇠함 속에는 내가 목격하지 못했던 갓난쟁이 모습이 비쳤다.

발톱 끝에만 송송하던 흰 양말털이 어깨까지 끌어올려지고, 황금빛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다정한 속눈썹, 밤하늘처럼 까맸지만 이제는 깊은 바다처럼 투명해진 눈동자, 상냥한 비밀 같던 눈썹자리, 까만색이 벗겨지며 드러나던 벚꽃 분홍색 코, 복숭아 분홍색으로 빛나던 동그란 배, 고소한 황금빛 구름 같던 우리 모두의 막내.


나의 개와 함께 하는 매일은 모든 날이 특별한 여행이었다.

하루가 지날 때면 내일치의 애정이 미리 더해졌다. 과거의 내가 어떤 좋은 일을 했었나 착각하게 할 만큼 조그만 몸뚱이 가득 터질듯한 애정을 담아 후회 없을 매일을 선물해주었다.

이 과분한 행복은 오직 시간으로 치러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시간만이 고스란히 남았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너무 많이.

매일의 사랑과 복기 속에 너희는 영원의 아이로 남겨진다.

그럼에도 너무 많은 사랑은 상처가 되는 걸까.

여전한 이 사랑이 이토록 감당되지 않는다. 눈물이 번진 채 일으켜지는 슬픈 꿈처럼.





@출처/ 

The Velveteen Rabbit or How Toys Become Real, Margery Williams Bianco, 1922 (George H. Doran Company, 1922, 일러스트 윌리엄 니콜슨 William Nicholson)

계몽사 소년소녀 현대세계 명작전집 16, 빌로오도 토끼 (계몽사, 1972, 번역 조풍연, 일러스트 송훈)

The Velveteen Rabbit (Andrews and McNeel, 1991, 일러스트 로빈 오피서 Robyn Office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