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엇일까? 머리도 꼬리도 없는 찰나, 그 토막은 어떤 연유로 살아남았을까?
어느 별밤, 이제 막 껍질을 깬 아기 펭귄이 있다. 이름도 없고 이름이란 게 무엇인지 모른다. 껍질 너머 보이는 쏟아질 듯 휘황한 작은 빛들과 그 아래 묵직한 얼굴을 무어라 부를지 모른다. 태어나 마주한 최초의 풍경이 이후의 삶을 내내 지탱해주리라는 것은 더더욱 알 리가 없다.
창작동화 <긴긴밤>은 입소문을 듣고 읽은 책인데도 정말 좋았다. 상반기도 안 지났지만 내 마음은 이미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처음 읽었을 때가 개인적인 슬픔에 빠진 때여서 나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감상적인 건가 싶었다. 지난 계절 잠들기 전마다 되풀이해 읽었다. 짧은 이야기기에 내쳐 죽 읽은 밤도 있지만 무작위로 한 문단씩 읽고 잔 밤이 더 많았다. 그리고 매번 위로 속에 잠들 수 있게 해 준 작품이다.
<긴긴밤>은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모범적으로 제시한다.
버림받듯 혼자 남겨진 멸종 직전의 코뿔소와 불길한 알에서 태어난 어린 펭귄의 여정은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로드무비 속 풍광을 일궈낸다. 상상 속의 풍광들은 이 판타지에 되려 공고한 현실감을 입히며 감정의 고저를 확장시킨다.
의인화라는 전통적인 화법에 있어 디즈니와 지브리를 거쳐온 세대에게 익숙할 캐릭터 편의성을 취하지만 각자의 서사가 또렷하다. 부여받은 한 장이 끝날뿐 그들은 희미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이’의 여정을 뒤쫓으며 우리는 그들의 유산에 더욱 이입하고 응원하게 된다.
문명과 야만 사이의 대안가족, 다름의 인정과 연대를 쉽고도 또렷하게 성찰하는 작품이다. 다음 세대를 수호하고 약속의 땅을 개척하는 용기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거창하다 못해 비대해질 수 있는 성찰을 조곤조곤 작은 씨앗으로 심어 소중히 피워 올리는 빛나는 이야기이다.
해외 출간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스테디셀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원작자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들도 아름답다. 이미지 서사를 활용한 에필로그는 더없이 깔끔하면서도 여운을 확장시킨다. 소프트한 컬러들은 쉽게 감흥 되는 서정성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한편으론 작품 안에서 내내 회전하는 역동성을 가리는 느낌이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텍스처가 거친 이미지도 시도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늘진 마음을 안은 채 어두운 밤에도 어두운 길만 골라 걷는 시기가 있다.
그런 밤이면 어둠의 농도보다도 이 밤이 영원하리란 막막함에 절망하게 된다. <긴긴밤>의 주인공들은 안이한 약속보다 다정한 응원을 보낸다. 끝없어 보이는 이 어둠 속에도 분명 별이 있음을, 그 별이 고단한 발걸음에 일렁대는 웅덩이 속이 아닌 우리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음을 속삭인다.
그러니 부디, 오늘 밟고 지나온 웅덩이 속 별에라도 의지해 이 긴긴밤을 건널 수 있길.
이토록 엉망진창일지라도 다시 걸음을 뗄 수 있길. 당신도, 나도.
@출처/
긴긴밤, 루리 (문학동네, 2021, 일러스트 루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54677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