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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y 04. 2021

거인 앨릭스의 모험, 발끝 쳐다보는 아이


어른은 새벽 세시에 치킨을 먹으며 축구를 보고도 눈 뜨자마자 아이스크림부터 먹을 수 있다. 아몬드 대신 보드카에 절인 하리보를 종일 줏어 먹은들 누가 말리겠나. 하지만 꾸역꾸역 매일의 일과를 소화해내야 하는 것도 결국 어른 자신이다. 정말 엉망진창인 날에도 핑계는 좀처럼 수용되지 않는다. 어른의 이벤트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한 항생제 같은 것이다.

에너지 회전율이 월등한 어린 시절엔 어른의 범상한 일과에 선망을 품는다. 아이들의 선망은 종종 어른이 가늠치 못한 엉뚱함으로 튀어버린다. 우연히 마법사를 만난 소년 앨릭스의 소원처럼.




산림관리원 집의 막내 ‘앨릭스’는 깊고 깊은 숲 속에 산다. 폭설이 내린 아침 홀로 등굣길에 나선 앨릭스는 곧 길을 잃는다. 눈보라도 피할 겸 숲 속 공터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난다. 검은 수염에 어울리는 멋진 외투에 실크햇을 쓰고 은으로 된 지팡이까지 든 그는 자신을 마법사라고 소개한다. 도움을 청하는 앨릭스에게 마법사는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한다. 잠깐 고민하던 앨릭스는 마음을 정한다. 나무 위로 목을 내밀어 주위를 빙 둘러볼 수 있을 만큼 키가 커졌으면 좋겠다고.


바늘로 찌르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가라앉자 마법사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앨릭스의 눈앞에는 숲의 모든 나무 위를 가로질러 저 멀리 마을 풍경이 한눈에 내다보인다. 갑작스레 커진 신체가 익숙지 않은 앨릭스는 공들여 걸어 학교에 도착한다. ‘친절하고 조용한 아이’인 앨릭스가 거인의 모습으로 등교하자 선생님은 살짝 당황하지만 일단 수업을 이어나간다. 여러 날이 지나도 앨릭스의 소원은 유효하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이후로도 18미터까지 자란다.


거인이 된 소년 앨릭스는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기 위해 일상을 꾸려나간다. 쉽게 갈아입던 옷은 이제 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충치가 생겼을 때 의사는 커다란 콘크리트 믹서를 동원해야 했다. 얌전히 뒷좌석에 앉아야 했던 자동차를 타는 대신 거대한 트럭을 이어 붙인 스케이트를 신는다. 평범한 소모품도 거인의 크기에는 일상적이지 않기에 이런저런 궁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앨릭스의 매일이 궁색한 것만은 아니다.

어떤 날의 앨릭스는 모래펄에 빠진 배를 구조하고, 화재를 진압하며, 트라팔가 광장의 가장 높은 동상을 청소한다. 또 어떤 날은 마을의 모든 어린이들을 초대해 짐마차 한대 분의 소시지와 몇 포대의 양파와 감자로 브런치를 즐긴다. 거인에게도 서커스는 특별한 것이어서 흥겨운 멤버가 되기도 한다.

거인이 되었을 뿐 소란스럽지 않고 여전히 친절한 앨릭스는 모두에게 좋은 이웃이다.




열 권 밖에 안 되는 <중앙일보 세계아동문학상 수상작 전집>은 당시 국내 편집자들의 기민한 선별력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전집이다. 수록분 중 <여보셔요, 니콜라!>와 더불어 특히 인기 높은 <거인 앨릭스의 모험>은 작가 프랭크 허먼이 자녀들에게 들려주던 베드타임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동화이다.

기존의 <거인 알렉산더 시리즈> 중 <The Giant Alexander in America, 1968>가 빠진 <The Giant Alexander, 1964>, <The Giant Alexander and the Circus, 1966>, <The Giant Alexander and Hannibal the Elephant, 1971>가 묶인 판본이 일본 아카네 전집 라이센싱 판본이다. 일본판 라이센싱 당시 가제본을 받아본 허먼은 몹시 불평했다고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는 동양식 제본을 이해하지 못해 편집 순서가 엉망이라고 오해한 것이다.

아카네 판본을 중역한 중앙일보 판본은 어린이들이 부르기 쉽도록 주인공의 이름을 앨릭스로 교체했다고 역자 후문에서 밝히고 있다. 일본판의 표지는 원본과 동일하지만 중앙일보 판본은 다른 이미지를 표지로 택했다. 원전이 상황을 요약한다면 중앙일보 판 표지는 캐릭터의 성품을 잘 요약해주는 선택이어서 더욱 친밀감이 느껴진다.

#여보셔요, 니콜라!, 친구의 조건 https://brunch.co.kr/@flatb201/107

초판 1964, 중앙일보 판 1979


영국으로 망명한 독일인 프랭크 허먼은 옥스퍼드 재학 시절 출판과 타이포그래피에 관심 가져 진로를 선회한다. 윌리엄 골딩, 귄터 그라스 등의 노벨 문학 수상자를 낸 출판사 Faber & Faber에서 실무 경력을 익혀 이직한 그는 커리어 초기 상당 기간을 아동문학 파트에서 근무했다. <땡땡의 모험 The Adventures of Tintin, Hergé> 같은 비영어권 인기 작품 라이센싱에 주력했던 Methuen에서 <미피 시리즈 Miffy, Dick Bruna> 등을 런칭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나간다. 이후 소더비 앤틱 북 파트 근무 경험을 살려 집필한 <The English as Collectors, 1972>가 업계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거인 알렉산더> 시리즈 역시 나라별로 모두 인기 높았다. 알렉산더에 이입한 어린이들의 팬레터가 넘치다 못해 낭독회를 열 정도로 대중적이고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다.


업무상 맺어진 인재들도 그가 보유한 행운 중 하나였다. 잡지 펀치 Punch의 기고진이던 <곰돌이 푸>의 작가 E. H. 셰퍼드를 비롯해 당대의 아티스트들과 교류했다. <거인 알렉산더> 초판 발행 시 허먼은 인기 삽화가였던 노먼 탤웰 Norman Thelwell에게 일러스트를 의뢰한다. 시안을 받아본 허먼은 탤웰의 알렉산더가 수척한 gaunt 데다 너무 전형적이라며 삽화가를 교체한다. 탤웰의 대표작인 <포니 시리즈>를 살펴보면 아마도 동화적 분위기를 기대했던 듯싶다. 낙천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면서도 전략적으로 절제된 조지 힘 George Him의 스케치들은 허먼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탤웰의 알렉산더 시안(좌) - 탤웰의 포니 시리즈 주인공 '페넬로페'(우)


역시 전시에 망명한 폴란드인 조지 힘은 독일에서 활동하던 그래픽 디자이너다. 비주얼 디자인 전공자라면 전후 모더니즘 기반의 영국 공공디자인으로 익숙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힘의 주요 커리어였던 전시 홍보물 제작은 전후 얀 르윗 Jan Lewitt과 협업한 영국 공기관 디자인으로 이어지며 유명세를 얻는다. 추상미술에 전념하려는 르윗과의 파트너십 해체 후 힘은 출판 및 일러스트 분야의 커리어를 확장한다. <거인 알렉산더> 절판본의 인기도 조지 힘의 일러스트에 빚지고 있다.


추억 보정 없이도 <거인 앨릭스의 모험>은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구시대의 낙후된 묘사도 존재한다.

인종차별적 표현, 동물권 감수성 부재에 유럽 특유의 계급의식이 은은하게 퍼져있다. 당시로선 이슈로도 인식 못했을 평범한 인식이었을 것이다. 당대의 열광적인 인기에도 어느 순간 발행이 중단된 것은 낙오로 볼 순 없어도 분명 시대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의 사랑스러운 점은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말하려 애쓴 점이다.

앨릭스는 일생일대의 소원빌기를 신나는 모험이나 거대한 부가 아닌 스스로 해결이 어려워 보이는 당장의 길 찾기에 쓴다. 이런 소탈한 즉흥성은 어린이들에겐 특별한 것이 아니다.

특히 ‘거인의 브런치’ 에피소드는 일상 자체가 신나는 모험이 된다. 동화에 맛있는 것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반칙인데 짐마차 한대 분의 소시지에 지글지글 대는 양파와 감자, 12x12x12 비율로 만드는 거인의 오믈렛이라니! 무엇보다 이 브런치에 초대받지 못하는 어린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걱정할 거 없다. 아마 일시적인 일이겠지. 넌 다시 작아질 거라구. 따뜻하게 하고 있어. 난 너의 엄마한테 가서 말하고 오마.”


앨릭스가 거인이 된 직후 선생님은 자신의 당혹감을 드러내기보다 앨릭스부터 안심시킨다. 그러나 모든 어른이 선생님처럼 어른다운 것은 아니다. 앨릭스는 몸집만 커졌을 뿐 여전히 아이에서 출발한다. 너무 일찍 어른의 몸을 갖게 된 어린이는 어린이임에도 보호를 받지 못한다.

부당한 집세를 요구하는 욕심쟁이 매치모어 부인 에피소드에서 앨릭스는 내내 휘둘리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앨릭스의 신체적 변화는 위협으로 여겨진다. 교활한 어른은 서양문화사에서 탐욕스럽고 부정적인 거인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써먹는다. 허먼이 탤웰의 시안을 채택하지 않은 이유가 유추된다.

#빛 나라의 탓신다, 최후의 마법 https://brunch.co.kr/@flatb201/139


거인이 된 앨릭스는 어린이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쉽지 않을 재난 해결에 조력한다. 배를 구하거나 광장 높은 곳의 동상을 청소하는 에피소드들은 재난을 해결하는 데서 오는 안도감 외에도 자립적으로 생계를 꾸리는 개연성으로 활용해 성취감을 준다.

무엇보다 거인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도 공동체에서 적정한 위치를 부여받는다. 화재 진압 후 공동체의 감사는 단지 생필품 공급에 그치는 것이 아닌 유대와 연대의 표시가 된다.


조용히 발끝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던 친절한 아이는 거인이, 성인이 된 후 조그만 아이의 올려다 봄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어른의 역할을 받게 된 어린이 앨릭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분투한다. 자신의 발 끝 누군가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면서.

누구나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님을 배웠지만 많은 이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단정 짓는 어른으로 자란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거나 작은 아이라 할지라도 어린 시절 배우는 가치와 이타심을 온전히 보존하며 자랐을 때 거대한 사람이 된다. 그 결과가 위인이 아닐지라도 분명 위대함의 한 형태이다.


현실에서 어린이들이 능동적일 수 있는 범위는 매우 협소하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그 작은 책임에 최선을 다하려고 애쓴다. 어린이다운, 우리가 말썽이라고 부르는 소동의 이면은 종종 어린이 자신이 최선 할 수 있던 선택이다. 그런데도 너무 일찍 어른이 되길 강요받은 아이들은 그 자신도 약한 자임을 인정받지 못한다. 보호 속에 행복하게 자라는 어린이들조차 노 키즈 존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 발끝만 쳐다보는 아이, 의자 뺏기에 소질 없는 그런 아이들도 자신이 서 있을 만큼의 자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크건 작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공동의 삶을 수호하는 것은 동화가 아닌 어른이어야 한다. 자각하건 못하건 우리는 어떤 도움과 배려 속에 살아남은 어른이기 때문이다.

거인의 브런치가 아니라도 모든 어린이는 동등하게 초대받아야 한다.





@출처/ 

거인 알렉산더, 프랭크 허먼 (The Giant Alexander, Frank Herrmann, 1964, 일러스트 조지 힘 George Him)

All About the Giant Alexander (Methuen, 1975, 일러스트 조지 힘 George Him)

あかね世界の児童文学, 巨人アレックスのぼうけん(あかね書房, 1977, 번역 야기타 요시코 八木田宜子, 일러스트 조지 힘 George Him)

중앙일보사 세계 아동문학상 수상작 전집 9, 거인 앨릭스 모험 (중앙일보•동양방송, 1980, 번역 인태성, 일러스트 조지 힘 George Him)


@이미지 출처/

https://www.sevenstories.org.uk/collection/collection-highlights/giant-alex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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