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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Feb 14. 2017

빛 나라의 탓신다, 최후의 마법


독서는 생각보다 품이 드는 취미이다. 모로 누워 하릴없이 페이지만 넘기면 될 것 같지만 적정한 자세를 찾는 것은 은근 요령을 필요로 한다. 시력, 체력이 떨어질수록 피로도는 높아간다. 그럼에도 필요가 아닌 오락으로서 책을 찾아드는 것이 접근성 좋은 플랫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권 안에 완결된 세계,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내 안에서 시작되는 확장성을 물리적 감각으로 각인하는 체험은 독서의 온전한 매력 중 하나이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흔히 그러듯 아동문학가 엘리자베스 엔라이트도 요정과 마법으로 이뤄진 공상에 빠져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의 본격적인 작품들 <마법 골무가 가져온 여름 이야기 Thimble Summer, 1938>, <사라진 호수 Gone-Away Lake, 1958>, <메렌디 가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현실에 기반한 쾌활한 이야기들이다. 고전 동화에 푹 빠졌던 그녀의 어린 시절 취향은 노년에 접어들며 쓴 <탓신다 Tatsinda, 1963>, <지이 Zeee, 1965>에 반영된다.


<탓신다>는 동화의 전형성을 고스란히 갖춘 판타지이다. 엔라이트는 본격적인 전개에 앞서 ‘타틀란’이라는 가상의 왕국을 독자 스스로 더듬어 보게 한다. 집착적으로 꼼꼼히 묘사된 의식주나 문화는 가상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씨앗을 심어준다.

이 씨앗을 발화시키는 것은 아이린 하스의 일러스트다. 회화, 판화, 무대디자인 작업을 병행해 온 아이린 하스는 투명한 컬러도 강렬히 연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의 아름다운 사람들, 운무 속 거인, 신비한 동물들, 아름다운 숲과 길가의 포석 하나까지도 꼼꼼하게 현실감을 입혔다.

그 자신도 미술을 공부했던 엔라이트는 사랑스러우면서도 신비한 하스의 화풍이 <탓신다>에 잘 어울릴 것이라 판단했다. 투명하지만 가볍지 않고 쾌활하면서도 애조 띤 아이린 하스의 일러스트는 문장을 넘어선 이미지 언어이다. 중앙문화사 판본에 실린 일러스트는 조악한 인쇄 상태에도 장면마다 아름다움이 뚫고 나온다.


당대에도 비교적 현대적 작품 선별로 인기 높던 중앙문화사 전집은 몇 번의 개정 끝에 절판되었다. 1980년대에 전체 복간된 적이 있지만 무척 실망스러운 구성이다. 임의로 축약한 작품을 두 편씩 묶어 실은 조악한 페이퍼백 형태에 일러스트 수준도 미미했다.

중앙문화사 전집을 통해 이 작품을 읽었다면 <마법의 선물>이란 제목으로 정식 발간된 단행본도 흡족지 않을 것이다. 번역의 화법은 유화된 아동 서사로 낮아졌으며 결정적으로 캐티 새머 트레헌의 일러스트는 개성적이지만 이 작품의 섬세함에 밀착되지 않는다.

중앙문화사 1974, 중앙문화사 1977, 중앙출판사 2000. 세 권 모두 절판이다.
아이린 하스의 일러스트
캐티 새머 트래헌의 일러스트





짙고 짙은 운무에 둘러 쌓인 높고 높은 산 위의 타틀란 왕국은 발견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어느 날 독수리가 낚아챈 외부의 아이가 타틀란의 사냥꾼에게 구출된다. 늙은 사냥꾼 부부는 ‘탓신다’라 이름 붙인 아이를 애지중지 키운다.

아름답게 성장한 탓신다는 토오틀* 짜는 솜씨마저 남달랐는데 왕실에서도 수 차례 구입해갈 정도였다. (*토오틀은 타틀란의 생필품으로 마루 개념의 양탄자이다.) 탓신다가 성장함에 따라 양부모의 근심은 깊어갔다. 타틀란인이라면 누구나 눈의 결정 같은 은빛 머리칼과 싸늘한 청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외부인 출신 탓신다는 햇빛처럼 반짝거리긴 했지만 금빛의 머리칼에 따스한 갈색 눈을 지녔다. 모두 똑같이 생긴 타틀란인들에게 탓신다의 외모는 기형으로 여겨졌고 친구들은 그녀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동정하고 있었다.


험준한 산속에 은둔한 ‘타다 난’는 특별한 지혜를 가진 자였다. 타틀란인이라면 일생에 딱 한 번 그녀에게 소원을 빌 수 있었다. 탓신다를 타틀란인의 외모로 만들어 달란 양어머니의 소원을 난은 단호히 거절한다. 타틀란인들의 눈에 낯설 뿐 탓신다는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우며 그 다름으로 인해 특별하다고 말한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탓신다는 난의 싸늘한 동굴에 깔려있던 낡은 토오틀이 마음에 걸린다. 며칠 후 탓신다는 어른도 동행하지 않은 채 홀로 험준한 산을 되짚어 난을 찾는다. 난은 빼어난 토오틀보다 탓신다의 씩씩하고 다정한 마음에 감동받는다. 그녀가 성인이 되어 소원을 말하러 올 때 ‘약간의 마법’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한다.


세월이 흘러 탓신다의 마음에도 한 사람이 담긴다. 상대는 용감하면서도 편견 없는 ‘타카탄’ 왕자다. 어린 시절 처음 학교에 간 날, 다른 외모로 놀림받던 자신을 도와준 그가 어느샌가 좋아졌다. 그러나 타틀란인이 아닌 자신은 왕자와 맺어질 수 없을 거란 낙심이 그녀를 괴롭힌다.

결국 탓신다는 난을 찾아가 왕자의 마음을 얻고 싶다고 소원한다. 마법을 약속했던 난은 탓신다의 금빛 머리카락 세 올을 넣어 짠 토오틀을 왕자에게 선물하라고 한다. 이 주술을 완성시키는 것은 탓신다 자신이라는 당부와 함께.

타카탄 왕자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날, 탓신다는 두근거림 속에 다른 이들과 함께 미리 선물을 보낸다. 그러나 마법의 결과를 확인해보기도 전에 탓신다는 뜻밖의 사건에 휘말린다. 타틀란에서 길가의 포석으로 쓰는 돌은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거인족이 좋아하는 보물이었다. 때문에 거인족 우두머리 ‘쪼르꽁’은 짙은 운무를 건너 타틀란을 침략한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타틀란인들은 그를 환영하지만 거인들은 도시를 파괴하며 돌 수집에 열중한다. 충격받은 군중 가운데 다른 외모로 눈에 띈 탓신다는 거인에게 잡혀간다.


타카탄 왕자는 자신의 한 번뿐인 소원을 거인들을 퇴치하는데 쓰기로 한다. 난은 거인을 음악으로 바꿀 수 있는 마법가루를 건네주지만 작전은 실패한다. 탓신다는 자신을 구하러 온 타카탄에게 거인들이 햇빛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리며 자신이 거인을 옭아맬 그물을 짜겠다고 제안한다. 난이 보내준 거미줄 같은 ‘팀브릴의 실’로 탓신다는 고되게 그물을 짜고 타틀란인들은 거인을 유인한다. 햇빛에 노출된 거인은 시끄럽고 흉측한 소음이 되어 사라진다.



합심해 거인을 물리친 이들은 산에서 내려온다. 타카탄은 공포 속에도 용감했던 탓신다의 손을 잡으며 고백한다. 아름답고 총명한 그녀를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고. 난이 선물한 마법이 떠오른 탓신다는 자신이 보낸 선물을 풀러 보았냐고 묻는다. 타카탄은 거인의 침략으로 선물을 볼 여유가 없었다며 함께 보자고 한다.

일생에 딱 한 번뿐인, 그것도 난의 특별한 마법이 들어간 소원을 날렸지만 타카탄의 대답은 탓신다를 훨씬 행복하게 한다.


반드시 은빛 머리칼에 청록색 눈을 지녔던 타틀란인의 외모에는 변화가 찾아온다. 청록색 눈에 금빛 머리칼, 갈색 눈에 은빛 머리칼 등 여러 가지 외모가 나타난다.

이전에는 한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 밖에 없었지만 다양한 종류의 아름다움이 생긴 것이다. 이제 타틀란에는 외모로 동정받는 이들이 없다. 씩씩한 탓신다와 다정한 타카탄의 결혼으로 생긴 일이다.





다른 것이 나쁜 것은 아니며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 <탓신다>의 교훈은 뻔할 정도로 단순하다.

세눈박이 나라의 두눈박이처럼 자괴감에 빠지기 쉬운 사회적 핸디캡에도 탓신다는 능동적인 일상의 히어로로 그려진다. 물론 마음을 ‘마법’로 얻으려 한 것이 공정한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작가는 이마저도 탓신다 스스로 깨우치게 해 우리가 선망하는 가치의 전제를 일깨운다.

탓신다가 타카탄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마법 없이도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편견 없는 타카탄의 심미안은 아름다움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그 태도가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친절과 존중에 있었다는 점이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증명이다.


다양한 모습을 지닌 혐오가 지지받는 원인은 대부분 단순하고 비슷하다. 나와 다른 가치를 수용하기엔 혐오자 스스로가 편협하거나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인종과 계급, 일상에 내재된 편견을 넘어 누군가의 연약한 부분을 사랑하는 것, 어쩌면 현대에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마법’ 일지 모른다.





@출처/ 

탓신다, 엘리자베스 엔라이트 (Tatsinda, Elizabeth Enright, 1963, 일러스트 아이린 하스 Irene Haas)

新しい世界の童話シリーズ 35, ひかりの国のタッシンダ (学習研究社, 1968, 번역 쿠보타 테루오 久保田輝男, 일러스트 아이린 하스 Irene Haas)

중앙문화사 소년소녀 세계수상문학전집 3, 빛 나라의 탓신다 (중앙문화사, 1977, 번역 김병태, 일러스트 전성보(표지), 아이린 하스 Irene Haas)

마법의 선물 (중앙출판사, 2000, 일러스트 캐티 새머 트레헌 Katie Thamer Trehe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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