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여러 순간들이 적절한 시간대를 만나준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 나쁜 일도 좋은 결말을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순간에 맞춰 주진 않는다. 대개의 사건은 심지어 하필 이 순간! 급작스럽게 등장한다. 갑자기 거인이 되어서 고민하는 소년도 있는 반면 시도 때도 없이 티스푼 크기로 작아지는 여성이 있다. 티스푼 아주머니는 하필 이 순간을 어떻게 극복할지 궁리한다.
(동서문화사 수록분을 기준으로 각 판본별 원문 표기를 따릅니다. 영문 표기를 우선합니다.)
알프 프로이센의 동화 <티스푼만큼 작아진 노파>는 국내에도 ‘호호 아줌마’라는 명칭으로 오래 기억되는 작품이다. 나라마다 폭발적 인기몰이를 한 이 시리즈는 TV쇼, 연극, 애니메이션 등 폭넓게 변주되며 사랑받았다.
초판인 노르웨이 판본은 티스푼 아주머니 에피소드에 짧은 우화성 동화들이 묶여 발행되었다. 회원제 잡지 연재분이 인기를 얻어 단행본으로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티스푼 아주머니 작아지다 Little old Mrs. Pepperpot>, <마법 숲에 간 티스푼 아주머니 Mrs. Pepperpot in the magic wood>, <티스푼 아주머니의 외출 Mrs. Pepperpot's Outing>로 묶인 에피소드들은 여러 판본으로 재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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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전집 내에서도 특히 사랑받은 <작은 티스푼 아주머니>는 일본의 학습연구사 판본을 중역했다. <동서문화사 빨강머리 앤 전집> 완역자인 박순녀 번역가가 번역했다.
에피소드마다 골고루 사랑받지만 ‘월귤 열매를 따러 간 아주머니’는 어떤 판본에서나 인기 높다. 완역된 비룡소 판본은 초판 구성을 따라 해당 에피소드는 누락되었다. 내용 면에서도 원전의 운문들이 다수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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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푼 아주머니’의 남편은 요즘 내내 기분이 좋지 않다. 이런저런 노력에도 여전히 뿌루퉁한 남편을 위해 아주머니는 그가 좋아하는 팬케이크를 점심으로 준비한다. 과연, 아저씨의 표정은 즐거움으로 환해지지만 다시 크게 한숨을 쉬곤 궁시렁거린다.
“..당신이 더욱더 슬퍼하는 것을 보고 있는 나도 전혀 기쁘지 않아요.”
“응, 그야 당신이 전보다 많이 내 생각을 알아주는 것 같더군. 하지만 팬케이크만 있으면 다 되는 건 아니잖소. 뭔가 좀 더 생각했으면 좋겠구려.
..팬케이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월귤 잼도 생각이 나면 좋겠구려.”
한동안 월귤 잼을 내놓은 적이 없음을 떠올린 아주머니는 곧바로 월귤을 따러 나선다. 찻잔 가득 월귤 열매가 채워지면 양동이에 부은 뒤 다시 찻잔에 열매를 모았다. 이제 한 컵만 채우면 되는데 늘 그렇듯 아주머니는 중요한 순간에 티스푼만하게 작아져 버린다.
작아진 아주머니가 마지막 한 컵 곁에서 난감해할 때 여우 ‘미켈’이 나타난다. 암탉 이야기에 낚여 찻잔을 양동이까지 날라준 여우는 속았다는 걸 깨닫자 숲 속으로 사라진다.
아주머니는 여우를 비웃으며 나타난 거대한 늑대 ‘잿빛 신사’에게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이 하인으로 부리는 ‘실 없는 외귀 One-Eye Threadless’가 혼내줄 것이라 말한다. 늑대가 의심하자 아주머니는 주머니 속에 데리고 다니는 녀석을 만나보라며 바늘로 코를 찌른다. 겁 먹은 늑대는 월귤 양동이를 숲 가장자리까지 옮겨주고 달아나버린다.
남은 거리를 고민하던 아주머니 앞에 ‘거대한 갈색곰’이 나타난다. 둘은 한껏 예의 차려 인사를 나누지만 곰은 월귤 열매를 먹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날쌔게 등에 올라탄 아주머니가 귀를 긁어주자 기분이 느긋해진 곰은 양동이를 큰길까지 옮겨주고 숲으로 돌아간다.
그 순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양동이를 들고 명랑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아저씨는 완벽한 팬케이크를 먹을 것이다. 신선한 월귤 잼을 듬뿍 발라서!
알프 프로이센의 동화적 상상력은 마법의 근원을 부연하기보다 그로 인한 모험을 그린다. 티스푼 아주머니가 작아지는 이유는 그저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다. 사고가 될지 모험이 될지는 주인공의 태도에 달려있다.
구시대의 목가적 풍경에는 북구 작가 특유의 자연에 대한 소회가 녹아 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일꾼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프로이센은 낙천적이었다고 한다. 동화작가, 시인, 가수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도 한결같이 하층민과 농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작아진 아주머니가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설정은 자연 본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애쓴 삶의 태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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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것도 의미 있다. 판본만큼 주인공의 명칭도 다양한데 철자는 달라도 원전인 노르웨이 판을 비롯해 대부분 ‘찻숟가락 노파’로 표기하고 있다.
독자 친밀도를 높이고자 자국에 좀 더 통용되는 명칭으로 변경한 판본들도 있다. 프랑스 판에선 ‘잡동사니 부인 Mère Brimborion’, 영문판에선 ‘후추통 부인 Mrs. Pepperpot’으로 명칭이 교체되었다. 국내에선 NHK 애니메이션의 영향으로 ‘호호 아줌마’로 기억된다.
이 시리즈의 초판 일러스트를 그린 보르그힐드 루드 Borghild Rud도 농민의 생활을 주요하게 묘사했던 노르웨이의 국민 일러스트레이터이다. <티스푼 아주머니>를 연재하던 문학모임으로 친분을 맺게 되어 초판의 일러스트를 그렸다.
스웨덴 판 발행 시 초기 에피소드 몇 편은 여전히 루드의 일러스트가 채택되었지만 곧 비에른 베리의 일러스트로 전면 교체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 힘입은 스웨덴 아동문학 출판사 라벤 & 셰그렌은 작품만큼이나 빼어난 실무진을 보유했다. 베리 또한 린드그렌의 대표작을 다수 작업한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비에른 베리는 풍자화로 커리어를 다진 일러스트레이터답게 사랑스러운 외형에도 역동적인 캐릭터, 절제되었지만 포인트가 또렷한 묘사에 능했다. 대표작 <에밀 시리즈 Emil of Lönneberga, 1963-1997>를 작업할 때는 스몰란드 전체를 여행하며 열정적으로 스케치했다.
<티스푼 아주머니> 또한 비에른 베리 특유의 아기자기한 캐릭터, 간략한 라인으로도 유추되는 북구의 유려한 풍광들이 가득하다. 수십 가지의 판본에도 이 시리즈의 폭발적인 인기 견인은 그의 공이 크다.
197,80년대 책들에 빈번히 등장하던 ‘월귤 越橘’은 보통 베리 Berry의 일종이라는 무성의한 주석이 붙곤 했다. 가끔 산딸기 종류라는 주석도 있었다. 아는 베리는 스트로베리뿐이던 어린 시절의 나는 발음 때문이었는지 낑깡이라 불리던 금귤 金橘을 상상했다. 내 상상 속 호호 아줌마의 월귤 잼은 약간은 쌉싸름한, 투명하게 눈부신 황금빛 젤리였다.
명칭에 따른 이런 오해는 이 시기 어린이들의 공통된 정서였나 보다. 문학작품 속 음식과 번역에 관한 에세이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김지현, 2020>에도 베리의 생태에 따른 번역가의 고충이 유쾌하고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명칭에 대한 오해는 과정마저 익숙해 특히 즐겁게 읽었다.
성인이 된 후 찾아본 학습연구사 판본에 ‘코케모모 コケモモ’로 표기된 월귤은 산미가 도는 붉은 알의 ‘링곤베리 Lingonberry’이다.
프로이센의 원전에선 링곤베리가 아닌 ‘빌베리 Blåbærtur(원전)-Bilberry(영문)’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블루베리보다 더 작고 검푸른 북유럽 자생식물이다. 영문판이 발행되면서 영어권-특히 미국에서 더 범용적이던 ‘블루베리 Blueberry’로 명칭이 교체됐다. 영문판 페이퍼백을 라이센싱 한 당시 일본에선 블루베리가 생소한 과일이었기에 스케치와 유사한 모양의 링곤베리가 채택되었다고 한다.
호호 아줌마, 아니 티스푼 노파의 월귤 잼은 내 상상 속 탱글거리는 황금색이 아닌, 일본 어린이들이 읽어 온 루비처럼 투명한 붉은색도 아닌, 오늘 아침에도 처덕처덕 발라댄 블루베리의 검푸른 색이었다. 하긴 찻잔에 모아 담기엔 낑깡은 너무 도톰하지;;
..주인아저씨 때문에 화가 나 있는 아주머니들은 언제나 그렇지만, 아주머니도 무섭게 빨리 걸어서 곧 월귤이 자라는 숲까지 갔습니다.
..“몸은 비록 작지만, 뭐든지 쉽게 해치울 수 있어.
..기분이 언짢기만 한 남자를 다루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지. 핫케이크에 월귤 잼을 발라주는 것.”
기민한 독자라면 아주머니의 수많은 사랑스러움 속에서도 내내 찜찜함을 느꼈을 것이다.
수동 공격도 모자라 훈계라니.. 심지어 겨울 동안 다 먹어 치워서 없는 거잖나, 월귤이라도 따오고선 징징대던가. 이 상황에 아주머니도 화가 나지만 곧 수긍해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한계에도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그 해결책은 공격적 이어선 안되며 쿠션어를 잔뜩 깔아 둔 보드라운 방식이어야 한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는 유럽에서도 ‘두 번째 물결 Second Wave Feminism’ 전후였다. 티스푼 아주머니는 작아진다는 점을 빼면 아주 보통의, 나이 든 당시 여성이다. 프로이센은 늘 뿌루퉁한 아저씨를 대비시켜 아주머니의 상냥함과 능동적인 부분을 부각했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모험 대부분은 일상의 익숙한 부조리에서 발화된다.
여성이 차리는 한 끼는 일과지만 남성이 차리는 한 끼는 이벤트가 된다. 프로이센의 의도야 어쨌건 그의 시대에나 당연시되었던 태도가 동화로 학습되는 건 더욱 교묘하고 나쁘다.
지금의 어린이들-특히 여자 어린이들에겐 단호함을 다정함만큼 안전하게 쓸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 주어야 한다.
햇빛 눈부신 정오, 윤기 흐르는 시럽과 블루베리 콩포트, 꽃이 차려진 식탁에서 먹는 팬케이크.
결국 이 느긋함은 그 아래에 흐르는 부단한 노동으로 완성된다. 일상의 유지보수를 우리는 ‘가사노동’이라고 부른다. 그 일상에는 한쪽 성별만 살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일상을 ‘관리만 할 권리’ 같은 건 더더욱 없다. 사랑이 당위를 부여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거울부터 보길 바란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브런치라니 듣는 것만으로 느긋해진다. 그러나 착취가 전제되지 않고도 충분히 여유로울 보통날의 팬케이크 한 장이 가장 맛있는 법이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라면 월귤 잼이 없어도 충분하다.
@출처/
Kjerringa som ble så lita som ei teskje, Alf Prøysen, 1957 (티스푼 노파, 알프 프로이센)
Teskedgumman Plockar Bär (Rabénoch & Sjögren, 1989, 번역 Inga Olrog, 일러스트 비에른 베리 Björn Berg)
新しい世界の童話; 小さなスプーンおばさん (学習研究社, 1966, 번역 오오츠카 유조 大塚勇三, 일러스트 비에른 베리 Björn Berg)
메르헨 전집 35, 작은 티스푼 아주머니 (동서문화사, 1982, 번역 박순녀, 일러스트 비에른 베리 Björn Berg)
Mrs. Pepperpot Goes Berry Picking (Farrar Straus & Giroux, 1990, 번역 Marianne Helweg, 일러스트 비에른 베리 Björn Be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