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이 유명한 작품은 많지만 그 문장들의 흡입력은 화려한 수사에 의지하지 않는다. 공허한 서사가 내는 목소리는 우리를 움직일 수 없다. 완독 후 곱씹게 되는 도전적인 첫 문장은 작가의 목소리를 한층 인상적으로 남긴다. 강신재 작가도 자신을 각인시킨 한 줄의 문장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젊은 느티나무, 1960>로 사랑받는 강신재 작가는 무척 꾸준한 집필활동을 했다. 독자로서 체감하기엔 박완서, 박경리 작가만큼 명예의 전당에 든 것도 아니며 짐작보다 방대한 필모는 쓸쓸하게 언급된다. 약력을 살펴보면 당대의 기득권층이기에 누려온 행보도 비친다. 그러나 그녀의 필모는 가장 사랑받는 순정적인 작품조차 조금 비켜선 태도의 불온한 매력이 있다.
연령대를 빗겨 난 마구잡이 독서나 TV 시청도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장편 <숲에는 그대 향기, 1969>의 드라마 버전은 강신재 작가가 다소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로 소설과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원작의 강렬함이 1980년대의 고루함을 뚫고 나온다. 전형적이고 포르노적이긴 해도 당시엔 명칭조차 낯선 사이코패스와 스토킹 묘사로 회자되었다. 어린이 상태에서 이 작품을 보았던 나는 어안이벙벙했다.
#녹색의 문, 게임의 여왕, 강신재 https://brunch.co.kr/@flatb201/86
<숲에는 그대 향기>를 굳이 장르화 한다면 로맨스 스릴러가 적당할 것이다. 영길의 노트, 루미의 일기, 태식의 독백으로 교차 서술되는 형식미를 시도하고 있다. 신파적 막장드라마의 쾌감에도 작가 특유의 트렌디한 서술도 여전하다. 특히 감각적인 이미지 메타포를 캐릭터 서술에 활용한다. 자극적이고 집요한 범행 묘사만큼 주인공들에 대한 시선은 냉랭하다. 어느 쪽 성별에도 기울지 않은 채 각자의 어리석음을 관조하는 화법이 고수된다.
루미가 의대생과 사귄다는 소문에 영길은 착잡하다. 조짐은 있었다. 순하지만 애매한 그녀, 윽박지르면 아이처럼 겁먹는 그녀와 연락이 끊어지더니 소문은 실체로 다가왔다.
영길은 자신의 초라함을 위악으로 합리화한다. 이런 남자들은 뻔하다. 사실 영길은 루미를 잡아두지 못해 안달이다. 도피성 입대를 앞두고 한층 불안한 마음을 인정하기 싫다. 아름다운, 보호본능을 느끼게 하는 순간의 루미는 그를 옭아매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다.
태식과는 아마도 곧 약혼할 수순이었다. 루미는 영길 곁에 있고 싶다. 그의 품에 안겨 숨 막히게 키스하다 보니 태식과의 약속은 아무래도 좋아졌다. 영길의 다그침에 루미는 태식과의 교제를 끝내겠다고 한다. 영길의 존재를 밝히면 태식도 이해해주겠지.. 그런 생각에 잠겨 무심히 거리를 걷던 루미 앞에 태식이 나타난다. 아, 그런데 저 코트 아까부터 언뜻 본 것 같은데..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침착한 태식은 같은 태도로 약속을 깬 이유를 추궁한다. 꽤 구체적이고 집요한 그의 다그침에도 아직 솔직할 수 없다. 고급 레스토랑, 호텔 쇼 관람으로 이어지는 데이트도 거절 못한다.
태식은 마음이 복잡한 루미에게 강압적으로 키스한다. 타액 범벅인 미끌미끌하고 축축한 그 키스는 영길과의 키스와는 다르다. 불의의 재난 같은 불쾌한 경험이다. 그러나 이 키스를 거부하면 돌변할 태식이 두렵기에 루미는 순간을 견디고 만다.
태식은 떠넘기다시피 선물을 건넨다. 아름다운 만큼 엄청난 고가의 보석시계다. 돌려주려다 루미는 문득 그 시계를 차 본다. 내일 보러 가자는 공연을 거절하며 돌려줘야지, 이 혼담을 조만간 반드시 끝내야지..라고 결심하면서도.
태식도 어렴풋이 ‘자각’은 하고 있었다. 어릴 적 쥐를 잘게 다져 난도질한 사건은 그 자각을 이미지로 완성한 경험이다. 더럽고, 징그럽고, 소름 끼치지만 태식은 멈출 수 없다. 미친 듯 날뛰어대는 그 감각 아래는 압도적인 쾌감이 존재한다. 성인이 된 태식은 이제 그 감각을 은폐할 줄 안다. 예민함으로 평가받던 잔인함은 의대생이 되자 비범함으로 승격된다.
광기는 그의 일부이다. 성장하며 심미적 취향이 더해진 ‘그것’만이 온전한 충만함을 준다. 때문에 일격은 가당치 않다! 난자당할 대상이 아름답고 연약할수록, 죽는 것이 나을 고통 속에 퍼드덕댈수록 경외감은 높아간다.
병아리, 나비, 학과 실습으로 연명해가던 그것은 궁극의 대상을 만났다. 아름답고 순종적이기까지 한 루미는 그간 태식이 찾아 헤맨 존재다. 스토킹 중인 태식은 루미를 그녀 자신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연약함, 그녀의 허영, 하찮아서 더 귀여운 작은 거짓말, 완벽한 순종까지! 이것이 그가 이해할 수 없던 사랑이란 감정이라고 태식은 확신한다.
자격지심을 극복하지 못한 영길은 서둘러 입대해버린다. 영길과의 관계를 밝히자 더 거세지는 태식의 집착을 루미는 태식 나름의 사랑으로 이해해 보려 한다. 영길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자 루미는 주변의 떠밀림 속에 표류한다. 힘겹게 스토킹을 따돌리고 만난 태식의 학과 동기는 태식의 가학적 변태 행위에 대해 알려준다. 이 일로 숲 속에서 어느 때보다 기괴하게 폭행당한 루미는 파혼을 선언한다. 태식이 선물공세와 재력과시로 상황을 전환하려는 동안 영길은 동기로부터 태식에 대해 전해 듣는다. 그러나 영길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심신 미약 상태로 칩거하던 루미는 모든 관계들을 종지부 내기 위해 스스로를 격려한다.
결말을 짓고자 태식을 만난 루미는 되려 그들의 신혼집이 되었을지도 모를 외진 주택으로 끌려간다. 자신의 광기는 루미 때문이라며 태식은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자해까지 한다. 루미가 초주검 상태에 이르자 그는 돌연 허기진 것처럼 피 묻은 손으로 식빵을 거칠게 뜯어먹더니 나가버린다. (진짜 이렇게 전개됨) 바닥에 나뒹구는 선연한 잉크병을 보고 루미는 폭력도, 자해도 태식의 쇼였음을 깨닫는다.
얼마 후 뒤늦게 루미의 죽음을 알게 된 영길은 그녀와 재회했던 남산의 숲으로 향한다. 변함없이 달콤한 숲의 향기 속에서 그녀를 아련하게 회상한다. (휴우.. 이 결말 어쩔;;;)
영길은 너무도 전형적이다. 스스로를 교양인으로 생각하지만 갖은 혐오를 다양하게도 품고 있다. 주류 계급에서 밀려난 후 짐짓 초연한 척 하지만 그의 불안과 자격지심은 점점 비대해진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 ‘4.19 정권으로 망한 장관 집안’이란 설정을 보면 그의 권위적인 오만함이 어떻게 공고해졌는지 짐작된다. 애정이던 스킨십이던 그는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아닌 루미를 조종해 획득하려 한다. 전기용품점집 딸에게 매달리는 것은 이중의 모멸감이 들기 때문이다. 루미의 마음을 건너 짚고 뜻대로 되지 않자 차일 것이 두려워 먼저 차 버린다. 그럼에도 내내 루미의 근황을 기민하게 수집하지만 정작 그녀가 위험에 처한 걸 알았을 때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계집아이라는 것이 나는 정말 싫다.
..긍지 있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손잡고 세상을 걸어가기에는 자격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되풀이하지만 나는 동성애적 경향 같은 것은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건전한 여성관을 가진 공과대학생이다.
..나는 여성을 경멸한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여간 그 겁먹은 표정을 대하면 두 팔 속에 감싸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스무 살이나 된 여대생이 아니고 유치원에 갓 올라간 동녀 童女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품 도입부 루미와 연락이 닿지 않아 애가 타던 영길이 여성관을 피력하다 ‘어린 여자아이’ 같은 루미를 떠올리며 감상에 빠지는 부분이다. (동녀 童女라니.. 정말 토 나온다.)
<숲에는 그대 향기>의 첫 문장은 <젊은 느티나무>의 첫 문장만큼 노련하다. 혐오주의자들은 절대 한 가지만 하지 않는다. <젊은 느티나무>의 오빠를 애틋하게 곱씹던 독자들에게 영길은 대다수의 오빠의 실체를 아주 확실하게 알려준다. 싸구려 1+1처럼 끼어드는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야’라는 멍청이들까지 포함해서.
루미의 스킨십은 매번 상대의 강압에 밀려 시작된다. 성애에 있어 수동성을 요구한 시대임을 고려하더라도 그녀는 청순가련 프레임으로 재단된다. 영길과의 열정적인 키스에서 루미는 둘의 사랑을 확인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독자 입장에선 다소 모호하다. 감각에 취약한 어린 나이의 여성은 종종 피지컬과 사랑을 혼동한다.
영길에 대한 루미의 열정은 사실 내재된 자기 욕망 쪽에 가깝다. 시계 에피소드처럼 루미가 이 욕망을 긍정할 때 당장 꽃뱀 서사부터 뒤집어쓸 것이다. 루미는 감각에 취약한 어리석고 어린 여성인지 몰라도 태식이나 영길에게 무엇도 부당하게 갈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가학을 이해해보려 애쓴다.
루미가 태식의 스킨십을 참아내는 이유도 그의 분노보다 낫다고 여겨서다. 거부당하면 미친 듯이 몰아세우는 태식의 변태적 폭력을 루미는 지나치게 격렬해진 스킨십으로 애써 규정한다. 루미 자신이 스킨십에 동참했기에 이 자기 검열을 사랑으로 규정해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한다. 21세기의 독자인 우리는 태식과 영길의 행동이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임을 안다. 그러나 현재보다 폐쇄적인 196,70년대 순결성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떠올려보면 루미의 자기 합리화는 안타까우면서도 수긍하게 된다.
사이코패스로서의 태식은 선정성과 전형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런데 태식의 전형성은 강신재의 설계가 부실한 것이 아닌 오히려 시대성으로 인한 것이다. 현재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사이코패스 캐릭터는 태식이란 모델이 비일비재하다. 연기력을 인정받는 치트키처럼 여기는 가학적 남성 빌런들을 떠올려보자. 심지어 빌런조차 못 되는 현실 속 남자들은 앞날을 걱정해주는 지원군이 가득하다. 타고 난 특정 성별 자체가 그들의 모든 것을 수호하고 변호해준다.
어떤 죽음도 사무치지 않을 수 없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은 감히 가늠조차 안된다. 그러나 고작 여중생인데 성폭력으로부터 도망치다 함께 투신한 어린아이들은 방역수칙을 무시하고 만취 끝에 사망한 남자 대학생처럼 애도받지 못한다.
후반기로 갈수록 강신재 작가의 작품들은 파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내가 읽어본 장편은 이 작품 하나뿐이지만 대다수의 단편에서도 시대적 폭력에 짓눌리거나 자기 욕망으로 파국을 선택하는 여성들을 그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젊은 느티나무>의 숙희조차도 현재에도 파란이 될 자기 욕망을 향해 직진한다. 대중적 인기를 의식해 이런 방향을 고수했다고 보기엔 이후의 작품마다 너무 일관적이다. 오히려 강신재의 이런 인물들은 선정적이라는 폄하를 받았다고 한다.
발표 당시엔 상업성의 첨병이던 것들이 레트로란 명칭으로 아련하게 포장되는 것이 좀 지겹다. 강신재 작가에 대한 평가 중 빈번한 것은 시대를 앞서간 현대적 감수성이다. ‘강신재식 현대성’이란 것이 톡 쏘는 코오-크나, 코럴-핑크 같은 당대의 중산층 묘사에 있다고 한정하면 그 역시 폄하라고 생각한다. 성별로서의 기득권과 한국식 계급의식을 조망한 이 반세기 전 작품은 전혀 레트로 하지 않다.
느티나무를 끌어안고 연심을 토로하던 소녀는 어둑한 강변에서 음독한다.* 또 다른 소녀들은 이데올로기조차 개의치 않고 욕정에 충실한 악녀로 회상되거나 노을로 불타오르는 은행나무를 응시하는 마녀가 된다.** 그녀들은 모두 회상되거나 전해질뿐 지금 여기에 없다. 그녀들은 가해자와 방관자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전해진다. 살아있는 자들의 가십으로 기록된다.
폭력과 혐오는 레트로일 수 없다. 그것들은 지난한 계승이며 끈질긴 권력이다. 느티나무를 돌던 소녀들이 마녀의 은행나무를 택하게 되는 이유이다.
@출처/
숲에는 그대 향기, 강신재, 1969
숲에는 그대 향기 (교양사, 1990)
강신재 소설 선집 (현대문학, 2013)
*<젊은 느티나무, 1960>, <강물이 있는 풍경, 1965>
**<향연의 기록, 1955>, <찬란한 은행나무, 1974>
<강물이 있는 풍경>은 종종 <젊은 느티나무>의 후속처럼 여겨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