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발음도 헷갈리는 공룡의 이름을 줄줄 외우듯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신들을 읊어댄 적이 있을 것이다. 곰과 호랑이의 자가격리 보다 화려한 그리스 신전에 열광하다 북구와 인도로 흩어진 기억도 있다.
그리스 신화를 구성하는 방만하고 속된 신들과 불멸의 영광에 집착하는 인간들은 각자의 롤이 뒤바뀐 것 같다. 그러나 불가침의 존재를 통해 자유와 윤리의 조화를 토로하면서도 노골적인 욕망이 회전 중인 드라마를 읽다 보면 이 신들과 인간이 같은 뿌리임을 알 수 있다.
정말이지 인본주의로 르네상스가 피어난 것이 너무도 개연성 있다
#금성 전집의 그리스 신화, 오딧세우스 https://brunch.co.kr/@flatb201/241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사랑을 통해 트로이 신화를 조망한 <아킬레우스의 노래 The Song of Achilles, 2012>는 2000년대 초반쯤 읽었더라면 그 애틋함에 감동했겠지만 21세기의, 특히 동아시아의 우리는 BL만 해도 절절한 작품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때문에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는 입소문에도 약간 시큰둥하게 읽기 시작했었다. 표류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든 고독한 섬의 마녀-스포랄 것도 없는 구태의연한 옛이야기다. 같은 카테고리의 차기작이 안이한 자기 복제로 흐르는 것은 또 얼마나 빈번한가. 그런데 <키르케>는 다른 목소리로 읽어나감으로써 이름을 찾아나가는 새로운 신화다.
얼마 전 개정판이 나왔는데 UK 판 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분위기를 돋우는 아름다운 표지이다.
주인공 ‘키르케’는 광휘의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이다. 고귀하고 특별한 신녀일 것 같지만 헬리오스의 무수한 자녀, 숱한 물의 님프 중 하나이다. 이 요정들은 한 철을 지나는 꽃잎과 같다. 신이라면 과시에도 들 수 없는 영생이 그나마 인간과 차별되는 유일한 능력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님프는 이름도 없다.
나이아스긴 해도 마력을 지닌 어머니의 혈통 덕에 키르케는 이름을 얻었다. 변덕스러운 헬리오스의 싸구려 동정심이었지만 아버지의 황금 전차에 동행한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한 어린 소녀이다. 그녀는 언제나 유순히 헬리오스의 발치에 엎드려 있다. 섹슈얼함을 무기로 써먹는 어머니 페르세의 정치감각도, 잔인한 성격마저 가려주는 자매 파시파에의 눈부신 미모도 가지지 못했다. 헬리오스의 ‘아들’들은 그들의 성별 자체가 특권이요 신권이다. 목소리마저 신족답게 우렁차지 못하고 인간처럼 나직한 그녀에겐 순종과 경외만이 허용되었다.
그 시절의 내가 그랬다. 줄곧 거기에서 벗어날 기회를 엿보았다고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 무지근한 고통이 전부라고 믿으며 마지막까지 그냥 부유했던 것 같다.
님프들은 신부라고 불렸지만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우리는 식탁 위에 차려진, 아름답고 늘 새롭게 바뀌는 진수성찬이었다. 그리고 도망치는 데 영 젬병이었다.
아버지의 발치에서 흐른 시간만큼 키르케의 하찮은 처지와 무감각함도 두터워진다. 그런 키르케에게도 마음에 담아둔 이가 생긴다. 가난하고 비루한 인간이었던 그는 키르케의 애정으로 신이 될 수 있었다. 님프들의 비웃음이 넘실대는 문어 같은 외모도 키르케에겐 애틋하기만 하다. 그런 그가 키르케를 잔인하게 괴롭히는 님프 스킬라를 사랑한다고 토로한다.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 주었듯 스킬라를 얻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키르케는 우연이었을지도 모를 ‘그 능력’을 다시 한번 시험해 보기로 한다. 자신의 언어를 꼬아 만든 ‘주문’이 어떤 행로를 던질지, 어떤 자각을 일깨울지 알지 못한 채.
기가 꺾인 여자들이야말로 시인들의 가장 주된 소재인 모양이다. 우리들이 바닥을 기며 흐느껴 울지 않으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는 걸까.
<키르케> 속 여성들은 모두 살아남기 위해 갖은 수단을 강구한다. 키르케의 방어처럼 파시파에의 선공 또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순종적인 님프이건 마성의 팜므파탈이건 그녀들의 최우선 목표는 생존이다.
괴물은 항상 자기 자리가 있잖아. 그녀는 이제 그 이빨로 모든 영광을 낚아챌 수 있어. 그 덕분에 사랑받을 일은 없겠지만 구속당할 일도 없지.
키르케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거듭나는 스킬라의 창조자이자 수호자다. 각자의 해석은 다르겠지만 나는 스킬라에게서 ‘명예 남성’을 읽었다. 스킬라가 보장받은 자리는 온전한 자유나 독립이 아니다. 스킬라는 어느 성별에도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배척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서로 대치하던 키르케에 의해 마무리 지어진다.
명예 남성은 생물학적 여성으로 분류되지 신념으로서의 여성성이 부과되지 않는다. 같은 성별에 대한 혐오로 트로피를 획득하고 불리할 때면 연대의 수혜를 알뜰하게 파먹는 이 무성 無性은 ‘여적여’ 서사에 힘을 실어주기에 진저리 처진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여성성의 자각을 가진 이들은 명예 남성조차 피해자의 한 형태임을 인지하고 있다.
각자의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같은 가치와 대상을 향해 각자의 전투에 임한다. 서로 간에 다정한 말 한마디 없지만 그녀들은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아버지인 헬리오스를 시작으로 키르케가 맞이하는 이성들은 단계마저 익숙하다. 문어처럼 생긴 첫사랑 글라우코스-해산물처럼 생긴 이성을 애틋하게 수발하는 여성은 지금도 얼마나 흔한가.
남성들이 아련하게 간직하고 들척지근하게 회상하는 ‘누이, 어미, 쌍년’이 모두 녹아있다. 긴 시간 납작 엎드려 있던 키르케는 마침내 무릎을 일으켜 세운다. 인간에 가까워 경멸받는 자신의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한다.
“아버지 생각이 틀렸어요” 내가 말했다.
여성주의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키르케>는 정말 재미있다. (HBO 어디까지 진행되었나요!!)
섬세한 번역의 공이 큰데 다소 반복되는 습관성 표현들과 앞서 나간 부분이 있지만 매끄럽게 읽힌다. 원전인 영문판보다 서정적이다. 캐릭터에 충실한 뉘앙스를 구현했기에 서사에 쉽게 이입하도록 도와준다. 만약 남성 번역가가 이 작품을 맡았다면 높은 확률로 대부분의 남성 등장인물만이 하대를 하지 않았을까?
#앵무새 죽이기, 수줍고 평범한 악 https://brunch.co.kr/@flatb201/172
이토록 흥미진진한 <키르케>의 아쉬운 점은 역시 1세계 백인 여성의 나이브한 시선이겠다. 로맨스에 의지한 각성도 아쉬움을 준다. 그러나 신탁도 예언도 아닌 어린애 같은 다정한 응원에 힘입어 스스로를 독려하는 용기도 있는 법이다.
고독한 삶을 살다 보면 별들이 일 년에 하루 땅을 스치고 지나가듯 아주 간혹 누군가의 영혼이 내 옆으로 지는 때가 있다. 그가 내게 그런 별자리와 같은 존재였다.
정치적으로 공정한 작품이 모두 같은 모습이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공정성을 위해 일원화된 서사는 문학이 아닌 프로파간다일 것이다. <키르케>의 경우 오히려 여성주의에 무관심했던 존재가 스스로 길을 찾아나가는 여정, 그리고 아직 진행 중이라는 점이 더 애틋하다. 지금의 여성들 또한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여러 갈래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자각과 언어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 될 수 있다. 그 주문으로 우리는 이름을 되찾는다.
@출처/
키르케, 매들린 밀러 (Circe, Madeline Miller, 2018)
키르케 (이봄, 2020, 번역 이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