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물의 목적이 교훈에만 있을 리 없다. 문학이, 미술이, 음악이-모든 창작물은 도락으로서 그 세를 불린다. 그러나 세대를 걸쳐 변주되고 곱씹어지는 창작물은 빈번히 ‘질문’을 던진다. 정해진 답이 있건 없건 시대의 불씨가 된다.
반세기를 넘어가는 고전 <앵무새 죽이기>는 읽을 때마다 새삼 한 문장 한 문장 짚어나가게 된다.
1930년대의 앨라배마는 여전히 인종주의가 공고한 지역이었다. 그들의 선의와 정의는 피부색 앞에 변덕스러웠다. 앨라배마의 배타적 공동체에서 자란 하퍼 리는 여러 종류의 시혜적 정의를 목격했다. 그녀의 이웃들은 투박하고 선했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백인 공동체를 거스르는 존재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런 성장 배경은 후에 친구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 In Cold Blood, Truman Capote, 1966> 집필을 위한 인터뷰에 동행했을 때 큰 도움을 준다. 붙임성 좋은 카포티였지만 남부 시골의 폐쇄성은 백인 남성이라도 외지인에겐 우호적이지 않았다. 시골마을의 배타적 습성을 잘 이해하고 있던 하퍼 리의 친화력은 주민들의 경계를 허물어뜨렸고 카포티는 사건을 다각적으로 바라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앵무새 죽이기>는 계도형 소설일까? 어느 정도 맞겠지만 <앵무새 죽이기>는 반문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한 축인 부 Boo Radley는 한때의 실수로 인생을 유폐당한다.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부가 보여주는 행동들은 그 실수라는 것이 그가 치러야 할 징벌과 동일한 무게인지 묻게 한다.
효율성을 위한 트리거로 인종문제를 선택했지만 하퍼 리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모든 종류의 편견과 양심에 관한 문제이다. <파수꾼 Go Set a Watchman, 2015>을 읽어보면 이런 함의가 좀 더 강하게 느껴진다.
핀치 남매는 아버지인 애티커스 변호사를 Dad, Atticus 두 가지 호칭으로 섞어 부른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이름으로 호칭하는 것은 그들이 대등하고 평등한 존재라는 자각을 심어주기 위한 애티커스식 교육법이다.
지나가는 짧은 설정이었지만 전형적인 대한민국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나로선 퍽 충격적이었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1930년대 남부 공동체도 농도만 다를 뿐 비슷하게 반응한다. 딜은 핀치 남매에게 왜 아빠를 애티커스라고 부르냐고 묻는다. 완고한 독설가 듀보우스 부인은 젬이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곤 기함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내 발행본에서는 이런 설정이 사라지거나 축약되어버렸다.
물론 <앵무새 죽이기>도 시대적 한계가 내포되어있다. 톰 로빈슨의 재판 종료 후 스카웃은 표면적으로 화기애애한 부인들의 티타임에서 속물적이고 신경질적인 균열을 어렴풋이 느낀다. 이때 스카웃은 자신은 남자들의 세계를 좋아하고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 자긍심의 이유를 서술하려 할 때 부인들의 수다 중 ‘위선자’라는 단어가 그녀의 몽상을 깨뜨린다. 하퍼 리의 이런 균형감각은 화자의 진술을 어린아이의 일방적 경외로 비약되지 않게 하며 시대성을 거의 뛰어넘는다.
<앵무새 죽이기>이란 제목부터 초월 번역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의 국내 발행본은 거의 모든 판본마다 오역과 초월 번역이 난무한다. 국내 발행본 중 오래 읽힌 유명한 판본들을 살펴보겠다.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 정병조 (청담문학사, 1989)
내가 처음으로 읽은 판본이다. 촌스러운 제목에서 짐작 가듯 종종 번역기처럼 경직된 문장에 축약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국내 발행된 단행본 한정, 비교적 충실히 원작의 분위기를 옮기려 했다 생각한다. 정병조 교수의 번역은 앞서 말한 호칭 문제를 포함 경어가 아닌 평어체를 통해 서사의 분위기를 원전에 가깝게 고조시켜 나간다.
#앵무새 죽이기, 박경민 (한겨레, 1992)
스카웃으로 유추되는 똘똘한 소녀 표지의 이 판본은 가장 많이 읽혔을 것이다. 박경민의 번역은 부제를 달아 좀 더 낮은 연령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상적 표현들이 사용된다. 그래선지 번역 수준이 너무 떨어지고 유치하다. 오역들은 심지어 한국식 관용어구이다. 스카웃은 아빠뿐 아니라 오빠에게까지 빈번히 경어를 쓴다. 그러나 이 판본의 진짜 문제는 초월 번역으로 포장하기도 힘든 오역들이다. 너무 많으니까 유명한 것 중 뽑아보면..
원문 : Jem said Mr. Nathan Radley “bought cotton,” too.
(젬은 나단 래들리 또한 목화를 샀다고 말했다.)
한겨레 : 젬 오빠는 나단 래들리 역시 ‘단추 구입상’이라고 했다.
원전에 따르면 목화 주산지 앨라배마에서 목화를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의 완곡한 표현 a polite term for doing nothing’이다. bought cotton이란 표현은 래들리 가의 특징을 요약하고 남부 지역사회를 상징한다. 박경민의 번역은 ‘단추 구입상’처럼 맥락을 알 수 없는 무성의함으로 가득하다.
이 판본의 가장 큰 오역은 모두가 지적하는 대로 다음 문장일 것이다. 오역이라기에는 살짝 억울할 수도 있지만 작품 내 애티커스의 화법을 생각해보면 역시 과도한 훈계조의 의역이 아닐까 싶다.
원문 : “Most people are, Scout, when you finally see them.”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스카웃. 그들을 알고 보면 말이야.)
한겨레 : “스카웃, 나중에 너도 그들을 이해하게 될 게다.”
#앵무새 죽이기, 김욱동 (열린책들, 2015)
화제 만발하던 <파수꾼>에 힘입은 개정판이다. 이전 판본들과 비교하면 주석을 비롯해 신경을 쓰려한 티는 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판본을 다시 볼일은 없을 것 같다.
개정판을 내며 김욱동 교수는 작품 전체의 화법을 경어체로 바꿨다. 원전에서 영어이긴 해도 스카웃이 반말을 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 맥락과 작품 내 함의를 예민하게 관찰했다면 선택해선 안 되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처음 읽는 사람들은 이 경어체가 왜 문제인지 못 느낄 것이며 다시 읽는 독자들도 어투가 바뀌어 이 판본이 읽기 힘든가 싶을 것이다.
이 판본의 경어가 문제 되는 것은 원전의 분위기를 곡해시키기 때문이다.
드레스의 세계에서 오버롤을 즐겨 입는 스카웃에게는 은연중에 정의로운 아빠를 보며 성장하는 어린 소녀 프레임이 입혀진다. 극 중 알렉산드라 고모가 요구하고 애티커스는 냉소한 ‘집안의 햇살 같은’ 위치로 격하된 것이다. 유교권 국가의 남성 중심 프레임을 하퍼 리의 작품으로 느껴야 한다니.. 정말 끔찍한 독서경험이었다. (조선국 남자들.. 자신들은 쓰지도 않는 존댓말 사랑.. 강박인가요?) 그 와중에 주구장창 서술형으로 풀어낸 문장들은 원전의 운율감을 거세시켰을 뿐 아니라 되풀이해 읽어야 할 정도로 매끄럽지 못하다.
나는 번역에 민감한 독자가 아니다. 번역 세계의 고충을 헤아리기엔 평이한 언어 실력과 때로는 초월 번역조차 애틋하게 받아들이는 감상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앵무새 죽이기>만큼은 좀 더 제대로 된 번역이 나와주길 바란다. 적어도 하퍼 리가 말하고자 했던 것들을 곡해하지 않는 번역 말이다.
물론 출중한 번역가들은 초월 번역을 통해 전설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원전이나 잘 옮겼으면 싶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단지 줄거리 채집을 위한 것 아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작품 고유의 목소리이다.
화제 무성했던 하퍼 리의 숨겨진 작품 <파수꾼> 발간 시 나 또한 갈팡질팡한 독자였다. 무척 읽어 보고 싶지만 절대 읽고 싶지 않기도 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냉큼 집어 들고 싶지만 작가가 출간을 원치 않던 작품을 사후에 내놓는 행위가 반칙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결국 읽어보았고 <앵무새 죽이기>에 못 미치는 투박한 작품이지만 <파수꾼>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앵무새 죽이기>는 성인이 된 스카웃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때문에 하퍼 리가 설정한 스카웃의 화법은 무척 중요하다. 말하는 이는 어린 스카웃이지만 사유하는 이는 성인 스카웃이다. 과거의 사건 속에서 대립하는 그룹은 모두 스카웃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소수의 좋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명하지만 독자인 우리는 스카웃의 증언만 들을 수 있었다. 그것도 모호하게 윤색된 추억의 이름으로. <파수꾼>은 어렸거나 외면해서 보지 못했던 이면을 목도하게 한다.
걸출한 데뷔작을 낸 하퍼 리는 왜 다른 작품을 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바보가 되느니 침묵하는 게 나아요.”
작가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지만 하퍼 리가 소포모어 징크스가 두려워 절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벽에 가까운 문학적 야심은 끝없는 퇴고의 시간을 요구했을 것이며 그 중압감에도 작가는 자신이 정해둔 일치의 순간을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퍼 리가 이런 결벽성을 버리고 때로는 바닥을 치거나, 때로는 진화된 모습으로 내내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열패감을 인정하고 타협하지 않은 작가적 자존심 또한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싸구려 연민이라 할지라도 곰 인형을 버릴 때면 표정을 보지 않기 위해 얼굴을 돌려서 버린다.
한결같이 무심해 보이는 화분이지만 말려버렸을 때 매번 씁쓸해진다.
망설임, 후회, 연민.. 얄팍해 보이는 감상조차 가치 검열을 거쳐 드러나는 인간의 보편적 특질이다.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특징은 공감력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기에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범죄에도 서슴없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유전자가 생존과 관계된 방어기제를 자의적으로 선택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멸종해가고 있는 것일까? 고결한 유전자들은 스스로 생존을 포기하고 무념무상의 유전자들만이 남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다 멸종하는 것일까? 지구를 위해서는 그 역시 나쁘지 않지만 멸망의 시간까지 너무도 지난한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야 하므로 최소한의 선 아니면 차악이라도 기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종차별, 여성, 장애인, 노동자와 동성애에 관한 모든 혐오.. 수많은 혐오들을 지속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평범한 이들도 가학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에 따라 우리는 얼마든지 조준당하는 앵무새가 될 수 있다.
내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는 누군가의 투쟁으로 얻어진 것이다.
무심한 대화 중 세월호 희생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부모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
.. 란 지극히 평이한 의견에 해맑고 분개하기까지 한 대답이 돌아왔다.
“덕분에 살아남은 애들은 입시 혜택 받았잖아.”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짧은 문장에 포함된 방대한 무식함과 무례함보다 조금의 수치심도 없는 당당함 때문에. 한나 아렌트를 들먹여보면 ‘평범하고 진부한 악’을 목격했을 때 구역질은 막막함 다음에 차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아들이 입시 혜택과 퉁칠 수 있는 존재냐고 물었고 그녀는 몹시 불쾌해했다.
스스로의 혐오나 사회적 위치를 착각하는 이들일수록 집단의 이름 뒤로 숨는다.
각종 혐오론자들이 ‘~샤이 Shy’라는 단어로 자신들의 혐오를 포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양성이라는 모호한 정의 아래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견해를 안고 살아간다. 그 생각들 중엔 자각했건 자각하지 못했건 분명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있다. 보편적인 사회의 도덕은 마음속에 내재된 악을 적어도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제어해왔다. 생각을 품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생각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수치심도 함께 주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 아니, 피와 살을 넘어 정신이 갖춰진 인간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수치심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다. 고결하지 않다. 언제나 실수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좌절 또한 함께한다.
크기와 상관없이 내재된 악을 부끄러워하고 경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보편적 조건일 것이다.
@출처 및 인용/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To kill a mockingbird, Harper Lee, 1960)
To kill a mockingbird (Harper Collins, 2006)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 (청담문학사, 1989, 번역 정병조)
앵무새 죽이기 (한겨례, 1992, 번역 박경민)
앵무새 죽이기 (열린책들, 2015, 번역 김욱동)
*치카, 정세랑 (W Korea, 2017. 2)
http://www.wkorea.com/2017/02/08/%EC%86%8C%EC%84%A4-%EC%9D%BD%EB%8A%94-%EC%8B%9C%EA%B0%84/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 Yuval Noah Harari, 2015)
사피엔스 (김영사, 2015, 번역 조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