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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pr 30. 2017

수정의 상자,
소녀들은 모험을 꿈꾼다.


‘어렸을 때 어떻게 하면 우주비행사가 될 수 있느냐고 NASA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이 답하길 여자는 우주비행사가 될 수 없다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들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 여성 최초 대서양 횡단 파일럿 아멜리아 에어하트 추모 연설, 힐러리 클린턴, 2012


현실적인 조건을 떠나서 시도 자체가 차단된 꿈, 특히 인종이나 성별로 인한 차단의 역사는 여전히 공고하다.

열네 살의 힐러리 클린턴은 이런 사회적 편견을 깨고 싶어 정치인으로 선회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일화의 결말을 알고 있다. 물론 그 결말은 현재까지의 결말이다. 지금도 무수한 어린 힐러리들은 더 높고 아름다운 곳에 닿기를 꿈꾼다. 모험을 주저하지 않는다.


소녀 재봉사 아솔리나도 어느 날 모험을 떠난다.

먼지 같은 일상에서 일어서 매일 흘려보내던 창 밖의 풍경 속으로 뛰어든다.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또렷한 문구로 앞치마에 수놓는다.


아델라 튜린이 쓴 <아솔리나의 모험 Las Aventuras De Asolina> 시리즈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의 리버럴 한 분위기 속에 집필을 시작한 아델라 튜린은 성 편견과 차별에 관한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이런 인식은 함께 작업한 일러스트레이터들과 뜻을 같이하며 시너지를 내었다. 체사리 아우라 Cesari Aura, 소피 질 Sophie Gilles, 레티시아 갈리 Letizia Galli 등 유능한 일러스트레이터들과의 협업은 멋진 결과물들을 남겼다. 그러나 그녀의 페어는 역시 넬라 보스니아 Nella Bosnia를 꼽아야 할 것이다.

<아솔리나의 모험> 시리즈에서 넬라 보스니아는 애니메이션 같은 색감과 동적인 구도를 선보인다. 이런 장면들은 페이지를 넘김에 따라 한 편의 영상물을 보는 느낌을 준다.

Lumen사의 판본으로 살펴본 에피소드별 제목은 아래와 같다.


수정의 상자 Las Cajas de Cristal, 1980

거인 우르도스 Los Gigantes Orejudos, 1980

요정의 선물 LA Herencia Del Hada, 1980

Lumen사 판본 <아솔리나의 모험>


시리즈 중 유일하게 읽은 <수정의 상자>는 대부분 그렇겠지만 문선사 전집을 통해서였다. 주인공 ‘아솔리나’의 이름이 ‘애드리나’로 바뀐 것은 일서 중역본이기 때문이다. 문선사 전집은 권마다 서사와 일러스트가 독특했지만 무단 복사본이기에 인쇄 상태가 상당히 조악하다. 다른 작품들을 원서와 비교해보면 번역도 그리 매끄럽지 않고 축약된 부분이 많다.

(주인공 이름 외에는 문선사 전집의 표기를 따릅니다.)





소녀 재봉사 아솔리나의 작은 창 밖에는 매일 무수한 풍경이 지나간다.

갖가지 물건을 지고 다니는 행상꾼, 손풍금과 원숭이를 진 집시.. 초라한 행색이지만 모두 자유로워 보인다.

어느 날 병사들의 고적대 행렬을 바라보던 아솔리나는 참을 수 없게 된다.


“나도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하던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고양이 밥그릇에 우유를, 화분에는 물을 듬뿍 준 후 여행을 떠난다.

소망을 수놓은 앞치마를 매고.


아솔리나는 쓸쓸한 숲 속에서 여행의 첫날밤을 맞는다. 짐승들을 피해 나무로 올라간 아솔리나는 멀리 불빛을 발견한다. 친절한 할머니는 아솔리나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한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는 아솔리나에게 앞치마에 수 놓인 문구를 묻는다. 할머니는 자신도 오두막을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할머니의 안내로 간 곳에는 눈물 흘리는 영양이 있다.

다정한 할머니는 오두막의 검은 돌 위에 웅크린 채 꼼짝 않고 울기만 하는 영양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양의 이끌림으로 아솔리나는 검은 돌바닥 위에 '두 번 다시는..'이라는 글자가 있음을 발견한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할머니는 그동안 그것이 글자인지 몰랐다. 아솔리나는 몸을 숙여 보석으로 된 글자를 닦는다. 그 순간 검은 돌바닥이 점점 지하로 가라앉는다.

검은 돌이 멈춘 곳은 파란 연기가 가득 찬 유리병이 수없이 많은 커다란 방이다. 방 한가운데에는 투명한 수정으로 만든 상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수정 상자 안에는 너무도 아름답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성이, 다른 상자에는 금발의 미녀가 잠들어 있다. 꼼꼼히 살펴보던 아솔리나는 이것들이 모형이 아님을 깨닫는다. 아솔리나의 도움으로 잠에서 깬 미녀는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말해준다.

사랑하는 사촌과 행복하게 살아가던 그녀 앞에 어느 날 괴상한 마법사가 나타나 애정을 강요한다. 거절한 그녀와 성안의 모든 사람은 마법에 걸려 잠든다. 그녀가 사랑하던 사촌은 영양으로 변했다.

아솔리나의 도움으로 성안의 마법이 풀리고 유리병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원래의 모습을 찾는다. 사람들은 힘을 합쳐 저주를 풀 목걸이를 찾아낸다. 모형 같던 성도 위풍당당한 모습을 되찾는다.


뜻밖의 모험을 끝내고 아솔리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고양이와 제라늄이 기다리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아솔리나에게 할머니가 말한다. 이제는 자신도 세상 구경을 해보려 한다고.





아솔리나의 모험에는 아델라 튜린이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온 페미니즘적 함의가 녹아 있다.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소녀 아솔리나는 결단력 있다. 실체 없는 공포에 쉽사리 함몰되지 않는다. 일상을 무책임하게 내던져버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책임지고 있던 고양이와 제라늄에게 조치를 취한 후 모험을 떠난다.

행동하는 아솔리나는 갇혀 있던 다른 여성을 구해내고 협업한다. 아마도 1960년대 페미니즘 캠페인 티셔츠를 상징할 앞치마는 움직일 수 없던 또 다른 여성을 격려한다.

모험의 끝, 아솔리나는 어떤 왕자님의 에스코트를 받는다거나 징벌받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준비해둔 안락한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와 재회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한다.

아름답지만 사실 견고한 감옥이었던 수정의 상자는 여성들이 가로막힌 유리 천장이다. 그 안에는 갇힌 이는 약자로서 구속받는 여성이고 그녀를 구해내고 독려하는 것 역시 여성인 아솔리나이다.

그 독려의 방법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교육에 의한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선량한 할머니가 저주를 풀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문맹이기 때문이었다. 각성한 그녀는 자신을 묶어둔 어쩌면 스스로 안주했던 곳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 짧은 판타지는 읽어볼수록 중의적이고 세련된 함의가 담겨 있다.


레고의 여성 과학자 시리즈는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며 품절되었다. 이 시리즈가 출시된 것은 ‘남자 레고는 모험을 즐기고 사람을 구하지만 여자 레고는 쇼핑하고 집에 있다’는 어린 소녀의 편지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가부장의 세계가 지우개질 한 자리에는 무수한 여성들이 있다. 존재가 지워진 그늘 속의 그녀들이 이룬 과업은 언제나 뒤늦게 발견된다. 언제나 과업에 비해 미비한 대접을 받는다. 공정하지 못한 출발선에도 편견과 인습을 앞질러 힘차게 뛰어간 그녀들에겐 박수가 모자라다. 트로피와 정당한 이름이 주어져야 한다.


아솔리나가 기다린 것은 무지개 너머 백마 타고 오실 왕자님이 아니다.

씩씩한 소녀는 박제된 창문 너머 세상으로 나가 무지개의 끝을 볼 수 있길 바란다. 자신의 의지를 수놓은 앞치마 문구는 또 다른 창문 안쪽의 여성에게 용기를 북돋아준다.


동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짜릿한 모험은 대개 소년들의 전유물로 계승되어 왔다. 그러나 소년들처럼 소녀들도 모험을 꿈꾼다. 아니 소녀들은 모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모험이 자신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형태라는 것이다. 직업적 성공, 미스터리의 해결, 한계를 넘어서는 온갖 짜릿함보다는 현실에서 배제되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

때문에 모든 소녀들에게는 ‘진짜 모험의 첫날’에 관한 욕망이 있다. 자신이 그려온 환희와 열정으로 가득한.

여전한 불평등 속에 지금의 소녀들-여성들이 꿈꿀 수 있고 박차고 나갈 수 있는 것, 이름이 지워진 과거의 무수한 그녀들 덕분이다.

소녀들의 모험은 진행 중이다.





@출처/ 

아솔리나의 모험 ; 수정의 상자, 아델라 튜린 (Las Aventuras De Asolina ; Las Cajas de Cristal, Adela Turin, 1980, 일러스트 넬라 보스니아 Nella Bosnia)

문선사 현대세계걸작그림동화 10, 수정의 상자 (문선사, 1984, 번역 박지동, 일러스트 넬라 보스니아 Nella Bos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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